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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국 주방장 ㅣ 보름달문고 38
정연철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초등학생 시절, 늦은 밤까지 이불 덮어 쓰고
<학교는 밤마다 이상해> <난지도 하늘에 뜬 무지개> <우동 한 그릇> 같은 동화를 읽던 어린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자마자, 정든 친구들(동화책들)과 작별을 했어요.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이었겠죠.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童話)는 이제 안녕,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테스>를 읽고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깊은 슬픔> 같은, 소.설.을 읽으며(<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다읽다 포기하기도 하며)
이것이 바로 소녀를 위한 책이다, 생각했을까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어언, 글쎄요, 얼마나 됐나 금방 계산이 되질 않네요.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강산이 두 번째 탈바꿈을 할 만큼의 시간이 흘러흘러, 무척 오랜만에 동화책을 만났어요.
그동안 동화책이라고는 읽을 생각도 안 해봤는데(청소년 소설이라면 조금 읽었더랬지만) 정말 우연한 기회로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왔어요.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었지만, 이른 아침 지하철에서 무겁고 탁한 머리로는 읽힐 것 같지 않아, 시원시원한 행간에 그림까지 있어서 술술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을 펼쳤지요. 그리고, 그냥 그대로 빠져버렸습니다. 다시 만난 동심의 세계에...
어려서부터 주방장이라는 확실한 꿈을 가지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예비 주방장 주병국, 다른 아이들과 약간 다른 생김새 때문에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얻고 왕따를 당하는 '외계인', 할아버지에게서 최신 휴대폰을 얻어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애교와 착한 짓을 가증스럽게 해내는 미나, 동네가 '개벽천지'를 하며 들어선 아파트에 살고 싶어 떼를 쓰다가 아픈 이별을 맞이한 한우, 선생님을 짝사랑 하는데 자꾸만 옆에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정훈이 때문에 미칠 것 같은 혜미, 층간 소음을 원인으로 일상이 점점 팍팍하게 변해가고 있는 1605호와 1705호.
여섯 편의 이야기 속에서 만난 어린 친구들의 모습이, 때로는 멋있고 듬직하고, 때로는 소름 끼칠 정도로 솔직하면서 얄밉고, 때로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도록 귀엽고, 때로는 눈물이 똑똑 떨어지게 가슴이 먹먹하고, 그랬어요. 이야기 한 편 한 편, 참 매력적이었답니다.
표제작인 '주병국 주방장'을 읽다가는 이런 문장 때문에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어요.
"내가 콧구멍이 두 개니까 살지, 한개였으믄 벌쎄 숨 막히 죽었을 끼라!"
아니, 이 말은!! 우리 어머니의 단골말!!! @.@
우리 엄마가 속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자주 쓰시는 말이거든요. "내가 진짜 콧구멍이 두 개니까 숨을 쉬고 산다!"라고요...
주병국 엄마의 입에서도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요. (나중에 지인에게 들으니, 경상도에서는 흔히 쓰는 표현이라고...)
책 속에서, 내 가족의 (더군다나 '전매특허'라고 생각한) 단골말을 발견함으로 해서,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더욱 커졌어요.
아파트로 이사가자고 떼 쓰다가, 예상치 못하게 할머니와 작별하게 된 한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 방울을 떨어뜨리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짓궂게 밟아버린 할머니표 찐빵도 떠오르고, 한우 좋아하는 칼국수 만든다고 서둘렀을 할머니 모습도 떠오르고, 그리고 그만, 내가 좋아하는 나물 반찬을 해주시겠다고, 들로 나물 뜯으러 가던 우리 할머니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지고...
여기에서 책을 잠시 덮었네요. 자꾸만 가슴속에 떠오르는 할머니 모습 때문에, 더 이상 글자를 읽어나갈 수가 없었어요.
마지막 수록작인 '쿵쿵'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싶은 이야기였어요. 이야기 속에서는 층간 소음으로 시작된 아파트 아래위 층의 오해일 뿐이지만, 사실 우리 일상에는 이런 오해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지요! 타인의 삶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내 시선으로만 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김없이 생겨나는 오해, 그리고 그로 인한 정신적 소모.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괜히 이해하려고 애 쓰다가 잘 되지 않아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고속도로에서 미친듯이 속도를 높이며 추월해 오는 차나, 얌체 같이 갓길이나 버스 전용 차로를 달리는 차를 만나면 우리 가족들은 늘 우스개처럼 말 해요. "마누라 애 낳으러 가는 갑다." 정말, 그런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정말 그럴 수도 있거든요. 물론, 실제로는 왜 그렇게 달리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려드렸더니, 아버지가 물어보세요.
"그래가 오해 풀고 끝났나?"
"아니. 그냥 오해 한 채로 끝나."
"그라믄 우야노. 오해를 풀고 끝나야지."
"그럼 권선징악 같은 그렇고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시시하지! 우리 삶도 어차피 그 많은 오해들 그냥 안고 가는 건데. 진짜 같은 이야기지."
진짜 같은 이야기. 여섯 편 모두, 내 안에 그렇게 품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난 동화책 한 권으로, 마음이 아주 포근해진 시간이었답니다.
아주 오래 떨어져 있던, 그래서 이제는 서로 잊혔던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 떨어져 산 세월만큼 더 서로를 아끼고 보듬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주병국 주방장> 덕분에, 저는 동화를 다시 만납니다. 동화는, 아이들의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