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세트 - 전2권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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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길을 걷다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면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아련하게 그려낸 나무이다.

서울 모처에 있는 '뉴욕 제과점'이라는 이름의 빵집 앞을 지나게 되면 나는 괜히 간판을 조금 더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남쪽 어느 도시로 향하다가 김천 쯤 가까워오면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며, 역에 멈춘 잠깐을 틈타 '김천역' 간판을 카메라에 담곤 한다. 이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지나다 좌판에 푸릇하게 놓여 있는 열무를 보고 기분 좋게 훗, 웃어본다거나 인터넷에서 오로라 사진을 보면 잠시 손을 멈추고 오로라에 시선을 빼앗긴다거나, 스페인 말라가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창에 '말라가'를 넣어본다던가, 남아공 월드컵 때 경기를 지켜보다 그 뜨거운 나라를 다녀온 누군가를 생각한다거나, 이런 것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이다.

그와 (그의 책과) 짧다면 짧을, 길다면 길 여러 시간을 함께 하며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관심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우리가 보낸 순간들 때문이라고...

 

'우리' '보내다' '순간' 이런 단어들이 실은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들인지,

'우리가 보낸 순간'이란 정말이지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하고 아련한 시간들인지...

나는 그 '순간'에 빠져버린다.

이 지구상 수많은 존재들,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장소든, 그 어떤 존재가 되었든, 그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나와 너, 그러니까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 명명하고 그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너와 나, 우리가 만난 그 확률의 아찔함을 생각해 본다면, 내 곁의 존재 하나하나에 정말 이 순간 최선의 애정과 노력을 쏟아야 마땅하건만, 때로는 허투루, 때로는 띄엄띄엄 흘려버린, 내 인생의 수많은 '보내버린' 순간들에 대해, 나는 잠시 고개 숙여 미안함을 표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는 말 그 한 마디가, 내 안에서 건드린 건, 내가 소중히 여기지 못 한 내 생애 수많은 페이지에 대한 애도, 그리고 아직도 내 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황금빛 페이지들에 대한 가슴 벅찬 추억.

 

어쩌면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그렇게 김연수 작가가 세상 많은 존재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 지금의 '김연수'라는 사람을 이루게 된 작은 세포 하나하나들에 대한 애틋한 연애편지.

"어떤 날은 그냥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이 그날이네요. 그냥 문장을 읽기만 합시다."라고 '말하지 않을 권리'와 보낸 순간도 있지만, 그 외 이 책에 담긴 많은 순간들은 정말이지,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곱고 눈부시다.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인가, 그와 함께 한 '순간'이란 녀석들은 참으로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암흑으로 가득한 순간이었을지라도, 그 순간들을 이겨내고 통과해냄으로써 빚어낼 수 있었던 지금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돌아보는 그들이 보낸 순간은, 참으로 애틋하기만 하여 부러움에 가슴이 뛰는걸!

그런 김연수 작가의 '순간'들에 대한 연애편지를 이끌어 낸 것은, (어쩌면 편지 내용과는 조금쯤 거리가 있어보이기도 하는) 그가 날마다 읽고 보듬었던 소설과 시 들. 몇 해 전 '문학집배원'으로서 매주 배달해주었던 그 소설들과, 지난해 신문 연재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시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그 글들이 작가의 마음속 샘에서 길어올린 문장들을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게 내 안에 차곡차곡 담는다. 정말이지, 마중물과 콸콸 쏟아져나오는 물 모두 일급 청정수 같은 책들! 내 안에 새롭게 새겨진, 우리가 보낸 순간.

 

 

_ 사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보라고 한다면 저는 엄마 얼굴을 그리겠습니다. 태어나서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름답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근사近似하다'는 말. 내가 아는 뭔가와 닮았다는 말. 그래서 거기 아무리 많은 불빛들이 반짝인다고 해도 그중에 무엇이 아름다운 불빛인지 우리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소설, 20)

 

_ 그러지 말고, 가능하면 편애하려고 노력합시다. 모든 걸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느니 차라리 편애하고, 차라리 편애하는 것들을 하나둘 늘려가도록 합시다. 편애한다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무조건 지지하는 일이에요. 다들 콩꺼풀을 준비하세요.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의 판관도 아닌데, 공연히 공정해지려고 반대로 행하지 맙시다. (소설, 37)

 

_ 저는 순간瞬間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 짧은 찰나 말이죠. 처음으로 꺼내 입은 스웨터에서 옷장 냄새가 훅 풍기던 순간, 달리기를 한 뒤에 등을 수그리고 심호흡을 할 때 이마의 땀이 운동장 바닥으로 뚝 떨어지던 순간, 작업실 창 옆으로 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가던 순간. 그런 순간들 속에 나의 삶을 결정짓는 모든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짧은 순간도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기나긴 인생이란 결국 그런 순간들의 집합체죠. (소설, 146)

 

_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소설, 223)

 

_ 실수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건 제 버릇이랍니다. 반성하고 후회해서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놀라기 위해서. 동네를 산책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는 놀랐던 지난해 여름처럼. 거기 그렇게 예쁜 공원이 있을 줄이야……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어쩌면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처럼. (시, 115)

 

_ 우리의 소망이 이뤄질 확률은 반반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될 일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하든 안 됐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과 어떻게 하든 안 되는 일은 낮과 밤처럼 다르죠. 우리의 희망은 아마 낮과 밤의 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을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노을만큼이나 희망은 아름답죠. (시, 142)

 

_ 그러니까 줄루족의 안부 인사는 사우보나sawubona라고 한다지요.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이죠. (……) 제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죽을지 다 알 수도 있겠네요. 나는 당신을 봅니다, 그건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압니다, 그런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고픈 인사군요. (시, 284)

 

_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시,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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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7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사진, 강성은 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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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면 이석주 작가의 사진이 생각나요... 사진집, 반갑고 뭉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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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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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인생이란 짐작할 수 없는 인생. 늘 기대를 저버리는 인생. 마술쇼에 들어가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관객의 인생. 이윽고 마술사가 무대로 나와 긴 모자 속에 꽃을 넣으면, 거기서 다시 꽃이 나오는 일은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으리라. 그는 마술을 보려고 거기까지 갔으니까. 그러니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꽃이 아닌 것. 어쩌면 꽃만 아니면 되는 것. 비둘기든, 하얀 천이든, 햄스터 일곱 마리든. 꽃만 아니라면. 꽃만 아닐 수 있다면. 청춘의 희망이라는 건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마술을 원하는 마음. 한 가지를 제외한 그 모든 걸 원하는 마음. (40)

 

최상의 독서란 짐작할 수 없는 결과. 마술사의 모자에 집어넣어진 꽃처럼, 다시 꽃으로 되돌아 나오는 일은 없는 것. 김연수 작가의 책은 늘 마술사의 모자 같다. 그 앞에서 얌전히 모자 속으로 들어갈 대기를 하고 있는 나는, 곧 비둘기든, 하얀 천이든, 햄스터 일곱 마리든, 어쨌든 이제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변하길 기다리고 있는 꽃 한 송이. 그랬다, 그 모자 속에 들어갔다가 내가 꽃인 그대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미미한 변화를 거친 뒤라 꽃 그대로처럼 보일지 몰라도, 꽃잎이 조금 더 풍성해졌다거나, 줄기에 가득 돋혀 있던 가시가 사라졌다거나, 물기 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꽃이 새 물 머금고 빳빳해졌다거나, 뭐 그런 사소한 변화라도 내겐 있어 왔다는 이야기. 김연수 작가는 최고의 마술사니까.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마법 가루를 솔솔 뿌려 내가 아닌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적어도 다시 태어나고 싶게 하는. 그렇게 내가 통과한 마법사의 모자는 김연수 작가의 책이었지만, 청춘 시절의 '나'와 재현이 통과한 마법사의 모자는 '7번 국도'였다.

 

동해 바닷가를 따라 아름다운 절경을 곁에 끼고 펼쳐져 있는 그 7번 국도. 그 7번 국도는 '나'와 재현이 달리기 이전에 먼저 김연수 작가와 그의 친구가 자전거로 달렸던 길이다. 지금은 자동차전용도로로 승격되어 청춘의 그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추억'을 누릴 수는 없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대신 또다른 '7번 국도'를 달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으니까. 청춘의 김연수 작가와 친구가 마법사의 모자처럼 통과했던 그 7번 국도를 따라 우리 앞에는 '나'와 재현의 『7번 국도』가 펼쳐졌고, 그게 벌써 1997년의 일. 그 후 13년이 지난 2010년, 그간의 세월 동안 7번 국도는 자동차전용도로로 승격되었고, 『7번 국도』는 'Revisited'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우리 앞에 찾아왔다. 책 속의 '나'와 재현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7번 국도를 달리지만, 7번 국도 앞뒤로 펼쳐진 풍경은, 그들의 이야기는, 13년의 세월만큼 달라졌다. 많은 문장들이 사라지거나 태어났고, 이제는 자전거로 달릴 수 없게 된 7번 국도를 향한 아련한 향수가 더해져, 무언가 아득한 그리움이 짙어졌다. 김연수 작가의 글에는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하는 질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13년 시간이, 당연히 그 시간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 시간의 일부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다시 찾은 7번 국도에서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 시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마법사의 모자를 통과하고 있던 작가의 더욱 옹골지고 수려해진 문장들, 그리고 20대를 '추억'하게 된 연륜에서 오는 애틋한 감수성은 또다른 감동으로 7번 국도를 달리게 해준다.

 

재현의 잠든 모습은 하늘에 붙박인 별자리처럼 보였다. 별들은 어떤 힘으로 거기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어떤 힘이 있기에 아직도 청춘일까? (183)

 

우리가 아직 청춘일 수 있다면 그 힘은, 앞에 무엇이 펼쳐질지도 모른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을 품고도 용기를 내어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했던 그 시간들이겠지. 그 마술사의 모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는 그저 미리 눈속임으로 준비해둔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할 수도 있고, 어딘가 긁히고 찢기고 상처만 입을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금빛 치장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어쨌든 나는 이제 어딘가 무언가 얼마만큼은 변하게 되어 있다는 것. 청춘의 우리는 누구나 다 그렇게 각자의 '마술사의 모자'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던 그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자꾸자꾸 나는 변하고 변해 지금의 인간이 되었고, 앞으로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될 거라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마술사의 모자를 지나는 동안, 나는 영원히 청춘일 거라는 것. 그리고 이런 걸 내게 일깨워 준 '마술사의 모자'가 바로 김연수 작가의 책들이라는 것. 그의 책이 있는 한은 나는 늘 변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좌절도 하)는 청춘이겠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한 것.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고 이렇게 에둘러 왔네요.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기억의 달인이 되어, 사소한 것들도 빼놓지 않고, 어제의 일인 것처럼 늘 신선하게,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도 그 기억들이 남을 수 있도록, 이 세계 곳곳에 그 기억들을 숨겨두는 일. (187)

 

이제 7번 국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 같은 건 해볼 수 없게 되었지만 '기억하는 것'이라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누군가의 손끝에서 7번 국도는 영원히 이 세계에 기억되게 되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내 안에 기억해 그들의 기억에 대한 증인이 되었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바로 사랑이라는 것. 결국 우리 모두가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할 수 있었던 힘은 삶을 향한 각자 나름의 방식과 형태로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없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캄캄한 터널을 과연 누가 지날 수 있을까? 영원히 청춘이고 싶다면, 그 방법은 단 한 가지, 계속해서 삶을 사랑할 것. 끊임없이 애틋하게 뜨겁게 삶을 사랑할 것. 삶에 대한 사랑이 식더라도, 나는 이제 청춘이 끝났나보다 실망할 필요는 없겠다. 앞날은, 모르니까. 식었던 사랑이 다시 불타올라 '회춘'하게 될지도. 그러니까 이전의 나는 이런 식으로 청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7번 국도 Revisited』라는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한 뒤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모자에 들어가기 전의 꽃이 아닌, 비둘기나, 하얀 천이나, 햄스터 일곱 마리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떤 식의 변화든, 꽃만 아니면 되니까. 꽃만 아니라면. 꽃만 아닐 수 있다면. 청춘의 희망. 마술을 바라는 마음. 그 마음 있으니, 나는 아직도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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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특별판)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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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상의 인생이란 짐작할 수 없는 인생. 늘 기대를 저버리는 인생. 마술쇼에 들어가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관객의 인생. 이윽고 마술사가 무대로 나와 긴 모자 속에 꽃을 넣으면, 거기서 다시 꽃이 나오는 일은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으리라. 그는 마술을 보려고 거기까지 갔으니까. 그러니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꽃이 아닌 것. 어쩌면 꽃만 아니면 되는 것. 비둘기든, 하얀 천이든, 햄스터 일곱 마리든. 꽃만 아니라면. 꽃만 아닐 수 있다면. 청춘의 희망이라는 건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마술을 원하는 마음. 한 가지를 제외한 그 모든 걸 원하는 마음. (40)

 

최상의 독서란 짐작할 수 없는 결과. 마술사의 모자에 집어넣어진 꽃처럼, 다시 꽃으로 되돌아 나오는 일은 없는 것. 김연수 작가의 책은 늘 마술사의 모자 같다. 그 앞에서 얌전히 모자 속으로 들어갈 대기를 하고 있는 나는, 곧 비둘기든, 하얀 천이든, 햄스터 일곱 마리든, 어쨌든 이제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변하길 기다리고 있는 꽃 한 송이. 그랬다, 그 모자 속에 들어갔다가 내가 꽃인 그대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미미한 변화를 거친 뒤라 꽃 그대로처럼 보일지 몰라도, 꽃잎이 조금 더 풍성해졌다거나, 줄기에 가득 돋혀 있던 가시가 사라졌다거나, 물기 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꽃이 새 물 머금고 빳빳해졌다거나, 뭐 그런 사소한 변화라도 내겐 있어 왔다는 이야기. 김연수 작가는 최고의 마술사니까.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마법 가루를 솔솔 뿌려 내가 아닌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적어도 다시 태어나고 싶게 하는. 그렇게 내가 통과한 마법사의 모자는 김연수 작가의 책이었지만, 청춘 시절의 '나'와 재현이 통과한 마법사의 모자는 '7번 국도'였다.

 

동해 바닷가를 따라 아름다운 절경을 곁에 끼고 펼쳐져 있는 그 7번 국도. 그 7번 국도는 '나'와 재현이 달리기 이전에 먼저 김연수 작가와 그의 친구가 자전거로 달렸던 길이다. 지금은 자동차전용도로로 승격되어 청춘의 그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추억'을 누릴 수는 없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대신 또다른 '7번 국도'를 달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으니까. 청춘의 김연수 작가와 친구가 마법사의 모자처럼 통과했던 그 7번 국도를 따라 우리 앞에는 '나'와 재현의 『7번 국도』가 펼쳐졌고, 그게 벌써 1997년의 일. 그 후 13년이 지난 2010년, 그간의 세월 동안 7번 국도는 자동차전용도로로 승격되었고, 『7번 국도』는 'Revisited'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우리 앞에 찾아왔다. 책 속의 '나'와 재현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7번 국도를 달리지만, 7번 국도 앞뒤로 펼쳐진 풍경은, 그들의 이야기는, 13년의 세월만큼 달라졌다. 많은 문장들이 사라지거나 태어났고, 이제는 자전거로 달릴 수 없게 된 7번 국도를 향한 아련한 향수가 더해져, 무언가 아득한 그리움이 짙어졌다. 김연수 작가의 글에는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하는 질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13년 시간이, 당연히 그 시간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 시간의 일부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다시 찾은 7번 국도에서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 시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마법사의 모자를 통과하고 있던 작가의 더욱 옹골지고 수려해진 문장들, 그리고 20대를 '추억'하게 된 연륜에서 오는 애틋한 감수성은 또다른 감동으로 7번 국도를 달리게 해준다.

 

재현의 잠든 모습은 하늘에 붙박인 별자리처럼 보였다. 별들은 어떤 힘으로 거기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어떤 힘이 있기에 아직도 청춘일까? (183)

 

우리가 아직 청춘일 수 있다면 그 힘은, 앞에 무엇이 펼쳐질지도 모른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을 품고도 용기를 내어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했던 그 시간들이겠지. 그 마술사의 모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는 그저 미리 눈속임으로 준비해둔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할 수도 있고, 어딘가 긁히고 찢기고 상처만 입을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금빛 치장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어쨌든 나는 이제 어딘가 무언가 얼마만큼은 변하게 되어 있다는 것. 청춘의 우리는 누구나 다 그렇게 각자의 '마술사의 모자'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던 그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자꾸자꾸 나는 변하고 변해 지금의 인간이 되었고, 앞으로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될 거라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마술사의 모자를 지나는 동안, 나는 영원히 청춘일 거라는 것. 그리고 이런 걸 내게 일깨워 준 '마술사의 모자'가 바로 김연수 작가의 책들이라는 것. 그의 책이 있는 한은 나는 늘 변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좌절도 하)는 청춘이겠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한 것.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고 이렇게 에둘러 왔네요.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기억의 달인이 되어, 사소한 것들도 빼놓지 않고, 어제의 일인 것처럼 늘 신선하게,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도 그 기억들이 남을 수 있도록, 이 세계 곳곳에 그 기억들을 숨겨두는 일. (187)

 

이제 7번 국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 같은 건 해볼 수 없게 되었지만 '기억하는 것'이라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누군가의 손끝에서 7번 국도는 영원히 이 세계에 기억되게 되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내 안에 기억해 그들의 기억에 대한 증인이 되었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바로 사랑이라는 것. 결국 우리 모두가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할 수 있었던 힘은 삶을 향한 각자 나름의 방식과 형태로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없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캄캄한 터널을 과연 누가 지날 수 있을까? 영원히 청춘이고 싶다면, 그 방법은 단 한 가지, 계속해서 삶을 사랑할 것. 끊임없이 애틋하게 뜨겁게 삶을 사랑할 것. 삶에 대한 사랑이 식더라도, 나는 이제 청춘이 끝났나보다 실망할 필요는 없겠다. 앞날은, 모르니까. 식었던 사랑이 다시 불타올라 '회춘'하게 될지도. 그러니까 이전의 나는 이런 식으로 청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7번 국도 Revisited』라는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한 뒤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모자에 들어가기 전의 꽃이 아닌, 비둘기나, 하얀 천이나, 햄스터 일곱 마리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떤 식의 변화든, 꽃만 아니면 되니까. 꽃만 아니라면. 꽃만 아닐 수 있다면. 청춘의 희망. 마술을 바라는 마음. 그 마음 있으니, 나는 아직도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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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1-0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보낸 순간'을 읽으며 잊었던 김연수의 환각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중에 원주님의 이 리뷰를 읽었습니다. <7번 국도>로 꼭 가보고 싶게 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원주 2011-01-06 23:47   좋아요 0 | URL
^^ 그 환각을 품고, 7번 국도의 마술사의 모자까지 통과해보시길...
곧 7번 국도를 따라 (차를 타고) 달리는 여행을 가게 될 것 같아요. 역시, 이 책을 읽고서는 엉덩이가 들썩들썩 그냥 있을 수가 없네요.
저는 지금 <우리가 보낸 순간>을 읽고 있는데, 아아, 그냥 편애하고만 싶어요!!^^
 
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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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만에 다시 달리는 7번 국도. 7번 국도를 향한 아련한 향수가 더해져 더욱 애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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