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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최상의 인생이란 짐작할 수 없는 인생. 늘 기대를 저버리는 인생. 마술쇼에 들어가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관객의 인생. 이윽고 마술사가 무대로 나와 긴 모자 속에 꽃을 넣으면, 거기서 다시 꽃이 나오는 일은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으리라. 그는 마술을 보려고 거기까지 갔으니까. 그러니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꽃이 아닌 것. 어쩌면 꽃만 아니면 되는 것. 비둘기든, 하얀 천이든, 햄스터 일곱 마리든. 꽃만 아니라면. 꽃만 아닐 수 있다면. 청춘의 희망이라는 건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마술을 원하는 마음. 한 가지를 제외한 그 모든 걸 원하는 마음. (40)
최상의 독서란 짐작할 수 없는 결과. 마술사의 모자에 집어넣어진 꽃처럼, 다시 꽃으로 되돌아 나오는 일은 없는 것. 김연수 작가의 책은 늘 마술사의 모자 같다. 그 앞에서 얌전히 모자 속으로 들어갈 대기를 하고 있는 나는, 곧 비둘기든, 하얀 천이든, 햄스터 일곱 마리든, 어쨌든 이제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변하길 기다리고 있는 꽃 한 송이. 그랬다, 그 모자 속에 들어갔다가 내가 꽃인 그대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미미한 변화를 거친 뒤라 꽃 그대로처럼 보일지 몰라도, 꽃잎이 조금 더 풍성해졌다거나, 줄기에 가득 돋혀 있던 가시가 사라졌다거나, 물기 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꽃이 새 물 머금고 빳빳해졌다거나, 뭐 그런 사소한 변화라도 내겐 있어 왔다는 이야기. 김연수 작가는 최고의 마술사니까.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마법 가루를 솔솔 뿌려 내가 아닌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적어도 다시 태어나고 싶게 하는. 그렇게 내가 통과한 마법사의 모자는 김연수 작가의 책이었지만, 청춘 시절의 '나'와 재현이 통과한 마법사의 모자는 '7번 국도'였다.
동해 바닷가를 따라 아름다운 절경을 곁에 끼고 펼쳐져 있는 그 7번 국도. 그 7번 국도는 '나'와 재현이 달리기 이전에 먼저 김연수 작가와 그의 친구가 자전거로 달렸던 길이다. 지금은 자동차전용도로로 승격되어 청춘의 그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추억'을 누릴 수는 없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대신 또다른 '7번 국도'를 달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으니까. 청춘의 김연수 작가와 친구가 마법사의 모자처럼 통과했던 그 7번 국도를 따라 우리 앞에는 '나'와 재현의 『7번 국도』가 펼쳐졌고, 그게 벌써 1997년의 일. 그 후 13년이 지난 2010년, 그간의 세월 동안 7번 국도는 자동차전용도로로 승격되었고, 『7번 국도』는 'Revisited'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우리 앞에 찾아왔다. 책 속의 '나'와 재현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7번 국도를 달리지만, 7번 국도 앞뒤로 펼쳐진 풍경은, 그들의 이야기는, 13년의 세월만큼 달라졌다. 많은 문장들이 사라지거나 태어났고, 이제는 자전거로 달릴 수 없게 된 7번 국도를 향한 아련한 향수가 더해져, 무언가 아득한 그리움이 짙어졌다. 김연수 작가의 글에는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하는 질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13년 시간이, 당연히 그 시간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 시간의 일부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다시 찾은 7번 국도에서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 시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마법사의 모자를 통과하고 있던 작가의 더욱 옹골지고 수려해진 문장들, 그리고 20대를 '추억'하게 된 연륜에서 오는 애틋한 감수성은 또다른 감동으로 7번 국도를 달리게 해준다.
재현의 잠든 모습은 하늘에 붙박인 별자리처럼 보였다. 별들은 어떤 힘으로 거기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어떤 힘이 있기에 아직도 청춘일까? (183)
우리가 아직 청춘일 수 있다면 그 힘은, 앞에 무엇이 펼쳐질지도 모른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을 품고도 용기를 내어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했던 그 시간들이겠지. 그 마술사의 모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는 그저 미리 눈속임으로 준비해둔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할 수도 있고, 어딘가 긁히고 찢기고 상처만 입을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금빛 치장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어쨌든 나는 이제 어딘가 무언가 얼마만큼은 변하게 되어 있다는 것. 청춘의 우리는 누구나 다 그렇게 각자의 '마술사의 모자'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던 그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자꾸자꾸 나는 변하고 변해 지금의 인간이 되었고, 앞으로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될 거라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마술사의 모자를 지나는 동안, 나는 영원히 청춘일 거라는 것. 그리고 이런 걸 내게 일깨워 준 '마술사의 모자'가 바로 김연수 작가의 책들이라는 것. 그의 책이 있는 한은 나는 늘 변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좌절도 하)는 청춘이겠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한 것.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고 이렇게 에둘러 왔네요.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기억의 달인이 되어, 사소한 것들도 빼놓지 않고, 어제의 일인 것처럼 늘 신선하게,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도 그 기억들이 남을 수 있도록, 이 세계 곳곳에 그 기억들을 숨겨두는 일. (187)
이제 7번 국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 같은 건 해볼 수 없게 되었지만 '기억하는 것'이라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누군가의 손끝에서 7번 국도는 영원히 이 세계에 기억되게 되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내 안에 기억해 그들의 기억에 대한 증인이 되었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바로 사랑이라는 것. 결국 우리 모두가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할 수 있었던 힘은 삶을 향한 각자 나름의 방식과 형태로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없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캄캄한 터널을 과연 누가 지날 수 있을까? 영원히 청춘이고 싶다면, 그 방법은 단 한 가지, 계속해서 삶을 사랑할 것. 끊임없이 애틋하게 뜨겁게 삶을 사랑할 것. 삶에 대한 사랑이 식더라도, 나는 이제 청춘이 끝났나보다 실망할 필요는 없겠다. 앞날은, 모르니까. 식었던 사랑이 다시 불타올라 '회춘'하게 될지도. 그러니까 이전의 나는 이런 식으로 청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7번 국도 Revisited』라는 '마술사의 모자'를 통과한 뒤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모자에 들어가기 전의 꽃이 아닌, 비둘기나, 하얀 천이나, 햄스터 일곱 마리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떤 식의 변화든, 꽃만 아니면 되니까. 꽃만 아니라면. 꽃만 아닐 수 있다면. 청춘의 희망. 마술을 바라는 마음. 그 마음 있으니, 나는 아직도 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