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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난난 - 남녀가 정겹게 속삭이는 모습
오가와 이토 지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미나리,냉이, 떡쑥, 별꽃, 광대나물, 순무, 무. 새하얀 죽에 곱게 다진 재료들을 흩뿌리자, 그 속에만 봄이 찾아들었다.(7)
꽃샘이 기승을 부려 창문으로 시린 바람이 파고들던 밤에, 봄향기로 나를 맞아주는 책을 만났다.
반가운 봄의 아이들 이름에 내 마음은 금세 훈훈해졌고, 이 소설, 읽기도 전부터 마음에 든다.
한 고즈넉한 동네에서 앤티크 기모노 가게를 운영하는 시오리. 다도회에 입고 갈 기모노를 사러 시오리의 가게를 찾은 하루이치로.
두 사람의 잔잔하고 은은한 사랑이 흘러가는 중에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 일본의 수많은 먹을거리들, 일본의 전통 풍습 등이 맛깔스러운 고명으로 얹어진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그려내는 중에 두 사람의 사랑이 간간이 등장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은은한 벚꽃 향기 같은 사랑을 조심스럽게 맺어가는 시오리와 하루이치로의 이야기도 예쁘고 애틋했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매 장면 장면 등장하는 향기롭고 맛깔스러운 음식 묘사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추천 받은 『달팽이 식당』과 같은 저자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달팽이 식당'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책은 식당 이야기를 그려낸 소설이라 했고, 당연히 음식 묘사가 절로 군침 돌게 할 정도로 뛰어났을 거다. 읽어보지 않았어도 어떤 분위기의 문장들로 음식이 그려져 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시오리는 이제 매일 매일 생각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하루이치로와, 늘 맛있는 간식을 사들고 방문하는 마도카 씨와, 시오리를 닮은 첫사랑에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는 잇세이 씨와, 애교스럽게 기모노 좀 빌려달라며 찾아오는 동생 하나코와 마주 앉아 많은 음식들을 먹는다.
하루이치로 씨와 이렇게 같은 음식을 먹다 보면 하루이치로 씨와 내 몸이 조금씩 같은 물질로 채워진다는 기분이 들어 기뻤다. 같은 세포, 같은 냄새. 하루이치로 씨와 같이 먹는 식사가 나이테처럼 내 몸속에 새겨져갔다. 하루이치로 씨의 몸에도.(202)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일이, 이처럼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일이었다니! 이제 누군가와 음식을 마주하고 앉으면, 우리의 몸이 같은 물질로 채워진다는 기분에 먹는 행위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다. 내 몸속에 나이테처럼 그 식사를 새기며.
평소에 일본 소설을 별로 읽지 않은지라 일본 문화나 풍습은 무척이나 낯선데, 이 책에서는 그런 전통적인 명절의 모습도 무척 잘 그려져 있어 이웃나라의 풍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기모노와 전통 풍습과 맛있는 요리가 아주 멋진 삼박자를 이루며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이 책!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솜씨 또한 어찌나 뛰어난지,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는 봄의 벚꽃, 여름의 무더위, 가을의 높은 하늘, 겨울의 눈송이가 차례대로 찾아들었다. 지금은 꽃샘이 기승을 부리는, 봄이라기엔 너무나 추운 계절이든 말든, 나는 화창한 봄부터 시작해 사계절을 한바퀴 돌았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작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는 일,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이 한 권의 책 덕분에 '오가와 이토'라는 이름을 확실히 기억했다. 그리고 그의 책이라면 무조건 다 찾아 읽을 준비 되어 있음!
얼마 전에 추천 받은 『달팽이 식당』 외에도 작가의 또다른 장편 『패밀리 트리』가 곧 번역 출간될 예정이라 하니 그 책들을 한 권 한 권 만나볼 생각에 무척 설레고 기쁘다.
신간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작가가 한 명 늘어났다.
행복하다.
"아직도 미흡한 점투성이에요."
"무슨 소리야, 시오리는 아직 젊은데. 그 나이에 인생이 다 완성되어버리면 재미없잖아."(252)
"난 안 좋은 일이나 힘든 일은 인생의 어둠이라고 생각해."
"응."
"그렇긴 한데, 그런 어둠이 없으면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행복한 일도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겠지. 최근에 별을 보다가 문득 인생이 줄곧 대낮처럼 밝으면 별의 존재도 알아챌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