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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평점 :
어느 밤이었다.
이 책은, 조금쯤 '느닷없이', 조금쯤은 '몽롱하게', 조금쯤은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지금껏 어떤 책을 받아들고 그 밤의 그런 느낌을 맛본 적 없었으므로, 딱 어떠한 만남이었다고, 나도 잘 설명하지 못하겠다.
다만, 아주 특별했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 남을 만큼 아주아주 특별했다는 것.
그리고,
이 삶이 온통 선물처럼 느껴졌다는 것...
책을 받던 그 밤으로 바로 펼쳐 들었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시집이기에, 어떤 시들이 실려 있나 살짝 맛만 볼 생각이었다.
그럴 수 있는 시집, 아니었다.
한 편 한 편 아껴가며 읽고 싶은 마음은, 시집에 수록된 시 한 편 한 편의 매력에 사로 잡힌 내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_ '작은 별 아래서' 부분
이 작은 별 아래 펼쳐지는 60억 개 '연극 무대'를 떠올리고, 때로는 과분하다고 때로는 부족하다고 때로는 타당하다고 때로는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나의 연극 무대를 가만 돌아본다.
언젠가는 반납 예정인 나의 심장과 간에 대해, 타고난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묵묵히 뛰고 있는 심장에 대해, 가만가만 나를 덮쳐올 듯 하다가 덮치지 않는 불운에 대해,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쉼보르스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건져 올리는 비범한 삶의 지혜이다.' '쉼보르스카의 시는 특별히 현학적인 시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소박하고 진솔한 언어로 우리에게 삶의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시인은 결코 목소리를 높여 단언하거나 애써 독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단순 명료한 어조로 독자들의 귓가에 생의 의미에 대해 나직하게 속삭이고 있을 뿐이다.'(옮긴이 해설)
나직하지만 웅숭깊은 속삭임. 그로부터 길어 올리는 '삶의 소중한 진리', '생의 의미'는 오롯이 나의 몫.
그 밤 이후 수시로 시집 펼쳐 두레박 던져 넣는다. 어느 구절을 읽어도 청량하고 깨끗한 우물물 같은 시편들.
이 시집을 만나게 해 준, 이 시집을 만날 수 있었던, 이 시집을 만났던 모든 순간순간이 선물 같은, 나의 연극 무대.
이 시집에 '시작'은 있을지언정, '끝'은 없을 것만 같다.
어쩌다 보니 이 화창한 아침,
어느 한적한 강가의 나무 그늘 아래 이렇게 앉아 있다.
이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결코 기록되지 않을
지극히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동기가 무엇인지 낱낱이 분석되어져야 할
중요한 전투나 조약도 아니고,
기억할 만한 폭군의 학살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지금 이 강변에 앉아 있고,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도달했다는 건
어딘가에서 이곳을 향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갑판에 오르기에 앞서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지의 여러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으리라.
비록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누구나 자신만의 무수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게 마련.
사령관의 망원경에 포착된 동그란 풍경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자신만의 지평선을 가지고 있다.
(……)
어쩌다 보니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바로 이 자리에서 강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위로 하얀 나비가 오직 자신만의 것인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 손에 그림자를 남긴 채 포드닥 날아간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인
그림자를 남긴 채.
이런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더 이상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과연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지. _ '제목이 없을 수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