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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발견 1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0
스텐 나돌니 지음, 장혜경 옮김 / 들녘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렸을 적에 행동이 무척 굼떴다. 아침에 학교 갈 준비를 하느라 전쟁을 치르는 통에도(4남매의 등교 준비가 얼마나 부산했을지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나는 "세월아 네월아~" 꿈지럭꿈지럭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부모님과 떨어져 살 적에는 지각을 밥 먹듯이 했고, 아침마다 아버지가 우리 4남매를 등교 시켜주실 적에는 나 때문에 몽땅 지각하게 생겨, 경적을 누르다 지친 아버지가 나는 빼놓고 다른 3남매를 먼저 '배달'하고 오신 적도 있었다. '쏜살같다'는 시간이야 지나가든 말든 나 혼자 무슨 배짱으로 그런 여유를 부렸었는지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지금은 다 옛일이다.
살다 보니, 시간이 더 빨라진 건지,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건지, 여하튼 이제는 '쏜살처럼' 지나가는 그 시간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이제는 '느리다'는 것이 죄악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바쁜 시대에 꿈지럭거릴 틈이 어디 있어!라고 누가 호통이라도 치는 것 같다. 요즘 들어, 그때의 '느림'이, 그때의 배짱이 가득 담긴 '여유'가 그리워지곤 한다. 바쁜 일도 없으면서 경보 대회라도 나간 모양으로 바쁜 걸음을 내딛는 내 모습을 발견 할 때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내 마음에 한 줄기 느림의 여유를 되찾아 주는 책을 만났다. 바로 스텐 나돌니의 <느림의 발견>.
이 책의 주인공은 19세기 영국해군장교이자 북극탐험가인 존 프랭클린이다. 존은 어렸을 적의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느린 아이였다. 존도 아버지에게 "또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네!"라고 꾸지람 듣기가 일쑤다. 친구들과 공놀이를 해도 공이 어느 순간에 지나갔는지, 누군가 공을 붙잡은 건지 그냥 내밀고 있는 손에 공이 와 닿았는지 알 수도 없다. 빠르게 날아다니는 공의 움직임을 따라가기에 존은 너무나 느렸다. 빨리 보려고 하면 눈에 줄무늬가 아른거리기도 한다. 존은 여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좋지만, 남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따돌림을 당할 뿐이다. 그래서 모습을 바꾸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미 사람들은 존의 느림에 대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존이 어떤 변화를 시도해도 사람들에겐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을 느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존은 바다로 나가 배를 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쓸만한 항해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존은 바다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 학업을 마치면 해군사관학교 생도 자격으로 배에 태워주겠다는 선원 매슈의 말에 용기가 충천하여 학교에서 열심히 '훈련'을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다른 사람이 되기는 어려웠다. 다들 존의 느림을 금세 간파하고 괴롭혔다. 하지만 존은 가슴 속에 거인 같은 희망을 품고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첫 항해에 나서는 날이 온다.
책은 이어서 존 프랭클린의 선원으로서의 삶, 선장으로서의 삶, 해군장교로서의 삶 등을 들려주며, 그의 삶 곳곳에 '느림'이라는 장치를 설치해 놓고, 우리가 '느림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존 프랭클린이 실제로 '느리게' 살았던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저자의 설정이든 실제 인물의 삶이었든, 소설 속 존 프랭클린의 인생을 통해 '느림'이 가르쳐주는 깨달음이 참 많았다. 지난 날의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느리다는 것이 삶을 크게 그르친 적은 없었던 것 같다(학교에 조금 지각한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어긋날 것도 아니지 않은가). 행동으로 인한 실수든, 말로 인한 실수든 대개는 조급함이나 성급함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해서 인생의 매 순간을 다 느리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빨라야 할 때는 빠르고, 느려야 할 때는 느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충실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의 나는 조금 느려도 될 때마저도 "빨리빨리!"를 외치며 시간을 재촉하며 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모처럼 '느림'을 발견한 나는, 이제 조금 더 여유로울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