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그럼에도 코엘료는..
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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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유는 뭔가? 오랫동안 나는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왔다."-(22쪽)

이렇게 시작하는 코엘료의 <오 자히르>는 이란에서 압수되면서 판매금지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란이 코엘료의 <오 자히르>의 유통을 금지하는 뚜렷한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카톨릭 작가라는 사실 이외에도 이 책의 서두에 나오는 '자유'라는 저 맹목적인 단어와 이 책의 전편을 흐르는 '자유'스러움을 그들의 이슬람 시각기준으로 볼 때 위험한 암호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장애물에도 구애받지 않고 제 멋대로 말하는 것만큼이나 코엘료도 비교적 자유스러운 줄거리를 내놓는 작가다. 그의 자유분방함은 <11분>을 읽으면서 결론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게 만들었고,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내게 있어 코엘료의 소설은 남는게 없는, 건질만한 알갱이의 질량이라곤 사금파리를 담아내는 얇은 접시의 그림이 연상되었다면 '코엘료의 자유'를 너무 박대해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코엘료에 관한 시각과는 다르게 이슬람에서는 바로 내가 지적한 그 '자유스러움'이 못마땅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유는 인간의 근본적 제1본능이며, 이념과 종교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상당한 도발성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아무튼, 코엘료의 '자유'에 대한 열정적 반응은 주인공 '나'가 네번째 아내를 만나 사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그는 유명하고 돈이 많은 작가다. 젊은 날에 사회주의 이상을 위해 싸우다가 감옥에까지 갔다 온 그의 자유에 대한 방향은 비틀즈를 듣고 난 이후 마르크스보다 록 음악이 더 신나고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쪽으로 회전을 한다. 그는 안정과 편안함과 대다수라는 이름의 오른쪽으로 턴을 한 것이다. 군중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게 된 '나'

어느 날 종군기자 출신의 아내는 돌연 행방불명된다. 4개국어를 하는 서른 살의 아내는 그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의 시야로부터 사라지고 만다. 그녀는 몽골계 카자흐스탄 남자와 동시에 사라졌다. 어디로? 왜? 언제?

'나'는 아내가 사라진 이유를 경찰서에서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본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친구와 부정의 관계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긴 것일까. 그녀는 납치된 것일까. 이 쯤되면 이 책은 추리의 기본적인 물음표를 지니게 되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 어디론가, 누구와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아내를 찾아 나서는 2년 9개월만의 여정. 추리적 구성을 기본기로 설정한 로드무비식의 아내 찾기는 미국판 인디애나 존스를 연상시키지만 코엘료의 글에서는 인디애나 존스의 만화적 요소 대신에 신화적 요소가 있다. 매스컴에는 이것을 두고 '오디세우스'적 기법을 차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풍랑길에서 쉽게 돌아오지 않는 무정한 남편 오디세우스를 20년동안 베틀 앞에서 천을 짜며 기다리는 정절녀 페넬로페의 풍경에 이입하는 이러한 이중적 구도 설정은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화의 힘이 아무리 매혹적이라해도 온갖 정적자들의 음모에 굴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며 남편을 기다린 페넬로페와는 다르게 그의 아내는 누구의 아기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가지며 베틀을 짜고 있었다. 이 마지막 대목에서는 베로니카가 죽기로 결심했다가 일주일 이라는 유예된 시간을 만나면서 살아야겠다는 터닝 포인트를 할 때의 반전처럼 황당한 대목이다. 베로니카는 제법 거창하게 죽는 계획을 세웠다. 별 대단치도 않은 이유였지만 그녀에게는 자살을 결심할 만큼 심각한 우울증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듯(?!!) 베로니카는 죽지 못했다. 이 책에서도 그의 아내 에스테르는 페넬로페처럼 남편이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을 기다렸지만 조신하게 기다리지는 않았다. 하룻밤의 열정으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임신을 한다는 마지막 대목은 그러므로 코엘료의 마지막 반전은 다시 내게 새삼스러운 실망감을 주었을 뿐이다.

‘나’를 기다리는 아내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지역에서 양탄자를 짜고 있었다. ‘나’는 파리에서 그 먼 알마티까지 찾아가 아내를 상봉하게 되는데,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찾아 올 것을 알면서 그를 기다렸다고 말하며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나, 아이를 가졌어."-(443쪽)

2년 9개월동안 찾아 다닌 아내는 외간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을 기다렸다는. 이 책의 주 무대인 중앙 아시아에서의 그들의 신화는 결말에서 코엘료 특유의 달필로 그려진 예상밖의 결말로 독자에게 황당함을 던져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신화를 차용한 코엘료 자신의 이야기다.

그가 아무리
"언제 생의 한 시기가 끝에 이르렀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한 주기를 마감하고, 문을 닫고, 한 장(章)을 끝마치는 것. 그걸 뭐라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완결된 삶의 순간들을 과거 속에 놓아두는 것이다. 뒷걸음질할 수 없다는 걸, 어떤 것도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나는 서서히 이해하고 있었다."-(227쪽)

고 말을 해도 나는 그의 아내가 왜 그 먼 카자흐스탄까지 가야 했는지, 가서 왜 돌아오지 않고 그 곳에서 남편을 기다렸는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이해 할 수 없다. 아니 코엘료라는 다단한 자아분열을 가진 작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의 <11분>에서 마리아가 브라질을 떠나 돈 벌이를 위해 파리로 '순례'의 길을 떠난것이 차라리 더 쉽게 이해되는 쪽이다.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있어야 하오. 그러면 매일매일이 달라지니까"-(275쪽) 길을 떠나는 것은 코엘료 글의 주 모티브다. 그는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또는 떠날 수 밖에 없는 요건을 서두로 시작하지만 그가 그린 길의 끝에 다다르면 나는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만다. 차라리 그의 길을 함께 걷는 동안 길에서 만나고 체험하며 사유하는 풍경이 더 낯익고 가깝게 다가오며 이해의 과정에서 난이도가 쉬워진다. 그러나 그의 길의 종점에 서면, 그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결론 앞에서 털썩 주저앉고야 만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유'라는 중독성은 무엇일까. 사랑이란 그대에게, 나에게 향하는 여행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본다면 진정한 자유의 사랑을 찾아서 떠난 그곳에서 그 부부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후 무엇이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인지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때의 반복되는 지루한 삶을 잠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고 이 책의 소감을 매듭짖는다면 나의 코엘료 읽기는 야박하기 그지없다.

“나는 ‘말[言]’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가장 가까운 섬으로 항해를 떠나기로 한다. 가는 도중에 파도와 바람과 폭풍우를 만나지만, 나는 계속 노를 저어 나아간다. 지쳐서 힘이 다 빠져버린 뒤에야 내가 항로를 벗어났음을, 배를 대려 했던 섬이 수평선에서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중략....파도가 왜 그를 그가 다다르고자 꿈꾸었던 저 섬이 아닌 이 섬으로 데려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98쪽)

코엘료의 사유를 요구하는 달필과 수도자 같은 철학적인 문장과 여성취향적인 문체에 때로는 감탄을 하면서 여전히 이 작가의 이야기는 나를 어렵게 만든다. 그가 지정해 준 섬이 아닌 전혀 다른 섬에 다다른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난 아직 인정 못하겠다.

왜?
그의 글은 피카소 그림만큼이나 여간해서 친숙해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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