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의 소설은 거의 37세 먹은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었다. 이제 서른 일곱먹은 남자들은 우리사회에서 반쯤은 정치적 문제아 취급을 받는 386세대이다.  나 자신 386세대이기에 이 미묘한 범주에 갇힐 때마다 억울한 심정이 들지만, 하루키라는 공통된 코드를 발견할 때면 오히려 묘한 흥분감을 느끼기도 한다.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다무라는 15세이긴 하나, 내겐 오히려 기존 하루키 주인공들이 여전히 투영된 존재인 것 같다. 여전히 재즈를 듣고, 독서를 하며 한 없이 외로운  주인공들은 그 무언가를 (그것이 어떤 비유라 할 수 있는 메타포일지라도) 찾아 헤매는 '고독한 까마귀'이다.

이미 출판된지 2년이 지난 책이기에 수 많은 독자의 손을 거쳐갔을 것이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그 수 많은 독자의 수 만큼 다양한 즐거움을 다양한 독자에게 주었을 것이라 믿는다. 하루키 소설의 맛은 다양한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자유를 주어왔고, 같은 사람이라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듯 하다. 이러한 그의 장점이 하루키를 오늘날 세계적인 문호로 만든 다양성과 융통성이 아닐까 싶다.

386세대인 우리의 공통점은 군부독재, 권위, 반민주로 상징되던 보수세력에 대한 저항감이었다. 그런 적대적 모순이 해결된 이즈음, 우리는 또다른 권위와 획일적인 감성을 공유한 세대가 된듯한 감이있다. 내 안의 도그마라고나 할까, 어느덧 우리는 또다른 권위로 무장된 획일적인 세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기에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 내가 얻은 독서의 즐거움은 '상권'에서 읽은 오시마상의 얘기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 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하루키는 나와 비숫한 부류들을 싫어하고 있나보다. 아니 하루키 속에서 성장한 내가 그가 표현한 것과 비숫한 인간에 대한 선호도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들과는 상종하기가 싫다. 자기 생각이 없고 기계적으로 대세에 휩쓸리는 저 거대한 무리들이 싫다.  커다란 주장을 하면서 작은 권리를 무시하는 세력들이 싫다. 익명의 틈 속에서 무책임한 돌덩이를 던지고 있는 저 거대한 도그마의 세력에게 저주를 내리고 싶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자유를 느낀다. 집단에 휘둘리지 않고 자아를 찾으려는 그 주인공에 그래서 쉽게 동화된다.그 자유의 공기를 숨쉬기 위해 다시 하루키를 꺼내들고,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 같다. 당신은 아마 나와는 다른 재미를 맛 보았으리라. 그것이 하루키가 주는 자유이고 읽을때 마다 새로운 해석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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