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처럼
다니엘 페낙 지음, 문영훈 옮김 / 산호 / 1995년 11월
평점 :
품절
이처럼 야릇한 제목을 만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소설처럼』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가 한껏 궁금증은 부풀려진다. 겉장을 열자마자 이런 글귀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 책은 읽지 않아도 됩니다. 혹은, 건너뛰어가며 읽어도 되고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며 다시 읽어도 됩니다. 그것은 독자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왠지 풋웃음나는 분위기속에서 아무 페이지를 펼쳐 읽었던 이 책은 신선하고 용감한 시선과 어투로 독자의 권리를 은근히 일깨워주고 있다. 누가 읽어도 어떤 강요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한 이야기로, 특별히 연결해서 읽지 않아도 되는 독특한 내용구성이 그 재미를 더한다.
소설이라 하기에도, 에세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책위에서 군림하는 뿌듯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건 작가의 재치와 유머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니엘 페냐크는 밝은 영혼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도입부에선 독서를 강요당하지만 책의 신성성(?)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소년과 과거에 독서에 열중하고 있던 한 소년이 밖으로 내몰리는 장면이 겹친다. 부모들은 아이를 올려보내고 아이교육에 대한 걱정거리를 토로하고, 아이가 보는 책은 여전히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고 있다. 독서를 두려워하는 아이들, 계속되는 부모님의 걱정속에 책에게도, 가족에게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는 걸까........?
곧 책읽기를 사랑하는 법이 뭔가 해결해 줄 듯 이야기를 꺼내지만, 교육환경에 둘러싸인 학생은 독서행위에 경직되어 있고, 교사는 그런 학생들에게 계속해서 작품을 읽고 분석하는 과정을 기대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진정한 독서의 기쁨은 온데간데 없으며 수많은 훌륭한 고전들도 소리없이 죽어가지나 않을까..결국 교사(혹은 페냐크)는 독서의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몸소 보여준다. 한학기 수업시간 내내 쥐스킨트의 '향수'를 소리내어 읽기 시작하고 우왕좌왕하던 학생들 모두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몇차례가 지나기 전에 학생들은 독서라는 거대한 행위에 대한 자각없이 그저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서히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아이들은 독서습관들을 몸에 담으며 진지한 책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데....이것이다 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이 책은 무엇보다 독자의 권리를 일깨워주고 그 경쾌함이 또 다른 책을 향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책을 읽지 않을 권리, 중간을 건너뛰어 가며 읽을 수 있는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수 있는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보바리즘에 빠질 수 있는 권리, 어떤 장소에서나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권리, 중간 중간 발췌해서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권리. 그렇다, 그 열가지가 주어지는 데 누리고 싶지 않을자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책과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책읽기 싫어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책읽기를 강요하는 부모의 모습으로, 독서를 지도해야 하는 선생님의 모습으로 자신을 종종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힘 안들이고도 책이 읽어진다는 것을 이 책이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다음 책에 손을 옮기게 해줄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