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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보랏빛 ㅣ 에디션F 8
히구치 이치요 지음, 유윤한 옮김 / 궁리 / 2021년 4월
평점 :

궁리출판의 에디션 F 시리즈는 문학사에 영향력을 남긴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다.
이번에 소개된 작가는 일본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짧은 생애를 살다간 히구치 이치요(1872-1896)다.
일본 5천엔 지폐의 인물이기도 한 그녀의 대표작과 일기를 담은 이 책을 읽기 전 책의 말미에 소개된
그녀의 프로필을 읽다 보니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짧은 그녀의 삶 자체가 책 속의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고,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의 삶 곳곳에 드러나지 않는 또 한편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많은 전시나 문학작품들 속에서 오랜 시간 답습되고 있는 문제점들을 확인하곤 했지만
역시 여자의 삶, 꼭 페미니즘이 아니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한 여성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 성장하고 출가한 이후의 삶에서 어느 순간 자신을 잃어가는 일상이
간혹 미덕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여러 관계들 속에서 스스로의 희생을 감내하는 과정이
섬세한 심리묘사로 작품 속에서 드러난다. 여자 혹은 남자를 떠나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하기 마련이라
관계 속에서 많은 갈등을 초래하고, 그 중심에서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기도 한다.
수록된 작품들은 히구치 이치요의 자전적인 이야기이자, 고해성사이자, 치유의 흔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작품을 읽는 내내 들었다.
수록된 작품들 중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미완성으로 마무리가 된 작품이기도 한 <해 질 녘 보랏빛>
미완성으로 명확하게 마무리하는 이 작품 이외에도 수록 작품들 모두는 독자들에게 열린 결말을 숙제로
남긴다. 이후에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 상상하게 되는데 그 예상의 결말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많은 근대의 작품들 속에서, 실존의 인물들이 던진 봉건적인 사회적인 문제나, 여성의 삶에 대한 현실 등
이미 많은 논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었으나, 결론은 늘 거기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긴 그녀의 이야기는 인생에 대한 여러
통찰의 교차점을 이어주고 일깨워주는 단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