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 것도 없는데 또, 봄을 받았다
정헌재(페리테일) 지음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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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아니 내가 청춘의 덜 핀 봉오리쯤 되었을 적에, 너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에, 페리테일이 나에게 말을 걸었었다.
머리카락은 딱 두 가닥뿐인 동글한 녀석이 씨익 웃으면서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그렇게 내게 주문을 걸었다.
보고 있으면 괜히 빙그레 웃게 되고, 설레게 되고, 위로가 되어주던 페리테일.

이제는 파릇한 청춘을 지나 녹음 짙은 젊음의 후반부 어디쯤을 달리는 내게,
어느 순간 잊고 있던 감성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어 세상 때가 묻는 동안 당신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아직도 그렇게 푸른 청춘 같기만 한지,
청춘의 불안과 청춘의 슬픔과 청춘의 무모함과 청춘의 긍정을 여전히 지닌 채 살고 있는지,
여전히 얼뜨기 같은 스물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혹여 당신도 나처럼 나이 들고 지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스물 언저리에 만났다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된 친구의 안부를 묻듯 당신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쉼과 희망이 되어주고 있는지.

 

잘한 것도 없는데
또,
봄을 받았다.



가을을 몹시도 사랑하던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상하게 봄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가을의 공허함과 쓸쓸함을 격렬히도 앓곤 하던 내가,
이제는 봄의 다정함과 봄의 생명력을 보며 굳은 어깨를 느른히 펴곤 한다.
생명이 움 트는 땅의 기운을 느낄 때면
다시 나도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붕 떠오른다.

봄은 그저 계절의 이름만이 아닌,
삶 속에서 지나는 겨울의 시간들을 견디게 해주는 위로의 이름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내가 다시 꽃을 피우고 풍성한 잎을 틔울 수 있다고 알려주는 희망의 이름이다.

나도 그렇게 매번,
봄을 또 받는다.
그저, 겨울을 견뎌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끌어안고, 조금이라도 더 끌어안고,

아무리 그렇게 해도 시간과 함께 흘러가버리는 것들이 있다.

시간은 모두에게서 공평하게 가져간다. 시간의 양은 모두에게 똑같지만 그 질은 다 다르다. 그래서 빨리 알아챌수록 내 시간은 더 행복해진다.

 

어떤 것이 시간과 함께 정직하게 사라지는지

어떤 것이 시간을 거스르며 오래 남는지.

시간에 잡아먹히지 말고

시간을 살아내고 싶다.

 

돌아가지도 않을 시계를 억지로 돌리느라 앞으로의 시간을 보지 못하며 사고 싶지 않다. 추억은 그냥 돌아보는 것이지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꼭 끌어안고 있어도 커피는 곧 식을 테니 가장 마시기 좋은 순간에 제일 많이 느끼면서 마시고 싶다.

p.191

 

 

그는 아직도 여전했다.
아니 더 깊어진 것 같다.
조금 더 홀가분해진 것도 같고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은 그를 가장 좋은 빛깔로 물들여 익어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그를 만나서 기쁘다.

나이를 먹어 타성에 젖은  충고 같은 것만 해대는 어른이 되지도 않았고,
철들지 못한 채 칭얼대는 불안과 몽상 같은 희망만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일상 같은 고민들과 놓치기 쉬운 순간의 행복들을 캐치해 '지금'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뜬구름 잡는 희망 말고, 진짜 우리가 놓치고 있는 현실의 소소한 행복과 희망들.

지나치게 무겁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의 글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다정한 온도의 위로들.

책을 읽는 동안,
페리테일과 만나는 동안
... 내 마음이 쉬었다.
책 한 권을 읽는 시간 동안 달게 쉬었다.
달콤한 오수를 즐기고 일어난 것처럼 느른하고 편안해진 마음이 씨익 웃는다.
저 동그란 녀석을 보고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난다.

 

봄은 누구에게나
연둣빛의 다정함으로 오기를.
막 겨울을 지난 추운 이에겐 더 따뜻한 훈풍으로 불어오기를.
누구에게나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계절이기를.
그 계절은 기어코 매번 꼭, 다시 오고야 말기를.

당신과 나 사이의 그 간격에는 늘 봄바람이 불기를.
다정한 봄 향기가 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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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팟캐스트를 듣다가 나도 읽어야겠다 싶어진 책들.
다양한 독서가 중요하다는데 ... 나는 여전히 다양하지 못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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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4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장미 2017-06-06 16:30   좋아요 0 | URL
저도 좀더 읽기 편해보이는 종이달과 환상의 빛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어요.
종이달은 팟캐스트에서 탈탈 털어줘서 ㅋㅋ 환상의 빛을 더 먼저 사볼까 싶어져요.^^
대성당은.....어렵나요?? ㅠㅠ

2017-06-06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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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또한 이 책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 글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작가의 저 시선 때문이었다.
사랑의 숙주.
우리의 몸은 그저 숙주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에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나간 사랑의 상처들에 마데카솔을 바르는 심정으로... 새살이 솔솔 돋기를 원하면서.
그 시간 속의 나와 그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그저 사랑의 숙주로써 우리는 이용당했던 것뿐이라는 위안 같은 것들 말이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그 사람이라던지, 도저히 나답지 않았던 나의 모습들이라던지, 그저 상처로 남겨져버린 사랑이라던지, 사랑으로 말미암아 파생되었던 그 모든 일들의 책임을 뒤늦게라도 '사랑'에 떠 넘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찾아 헤매었다.
내 잘못이 아니거니와, 상대방의 잘못 또한 아니라는 또렷한 증거를 찾길 원했다.
어느 순간 내 몸속에 들어와 제멋대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랑이 잘못 한 거지, 그저 숙주로써 몸을 제공하고 사랑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그래서 그가 내게 입힌 상처들 또한 그의 의지가 아니었고, 나의 부족함이나 나의 서투름 때문이 아니었다는 위안.
내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무엇이든 용서하고 싶었고, 편안해지고 싶었다.
'사랑'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서라도 나는 치유되고 싶었다.
사랑을 잃은 상처들을.

 

여기 네 사람이 나온다.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예 사랑하지 않기를 선택한, 형배.
사랑이 생존의 문제와 동일시되는 절박함을 맞닥뜨린, 영석.
이 두 명의 남자를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는, 선희.
그리고 자유연애주의자인 형배의 친구, 준호.

똑같은 사랑이 네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누구의 몸에 기생하느냐에 따라 사랑은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고 만다. (애초에 똑같은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사랑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의지대로 움직였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본인의 생각과 의지와 가치관을 통과해서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랑을 보여준다.


내가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은 준호였다.
실제로 준호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바람둥이라고 욕을 할 것만 같지만, 어떤 부분에서 그의 생각들은 몹시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은 다 다르다. 사람은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만 전부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공유하고 있는 많은 부분이 아니라 공유하지 않은 아주 작은 부분이 개체 간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성격, 그 사람의 정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주 작은 그 차이 속에 매력이 잠겨 있다.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고유하고 특별하므로 모든 사람을 고유하고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 유일한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의 매력은 한 줄로 순서를 매겨 세울 수 없고, 비교 불가능하다.
- p.072/073

 

이게 이성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저 인간 자체에 대한 정의라고 생각해보면 준호는 참 멋진 사람이다.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깊은 사람인 것이다.
단지 이런 통찰력 있는 시선들이 연애를 할 때 빛을 발하고, 여러 여자를 두루 만나야 하는 이유로 사용된다는 게 통탄할 일이다.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이 이상화된 것은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회를 갈등과 혼란에서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의 불변성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의 신화는 사랑에 의해, 사랑을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사회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모르는가. 사랑은 이 신화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 p.077/078

그 두려움의 배후에 있는 것이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에 대한 신화인데, 그 신화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실체는, 사랑이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일 뿐이다.
…중략… 결혼 제도의 유지를 위해 사랑은 왜곡되고 희생을 강요받았다. …중략…
결혼이 사랑을 훼손하고 사랑이 결혼을 곤란에 빠뜨릴 것을 그는 걱정했다.
- p.079/080

 

굉장히 신선한 시선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시선과 생각들로 영원한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사랑의 결말이 결혼이 아님을, 결혼을 하고서야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의 종착점이 결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라 나를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사랑을 만난 순간 그 충족감을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느냐고, 나조차도 그런 힐난의 시선을 사랑에게 보내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그 사랑을 지키려고,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영원불멸의 사랑의 신화 앞에 우리는 모두 세뇌당했던 것일까.
존재하는지 아닌지 조차 모르는 그 영원한 단 하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바람둥이의 자기합리화의 뻔뻔한 변명에 불과한 것일 뿐인건가.

나는 다만 사랑 앞에
성실할 뿐이다.

(박원의 '노력'이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사랑은 성실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영역의 것이 분명하지만.)

 

사랑이 두려운, 혹은 어려운 사람에게는 형배가 더 와 닿을 테고,
사랑이 너무 절실해서 삶의 문제로 인식이 될 만큼 목마른 사람들은 영석이 더 와 닿을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사랑하기를 두려워 한 적은 없으니 ( 어느 날 갑자기 날 찾아온 사랑 앞에 나는 매번 순응했고, 사랑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숙주의 역할에 몹시도 충실했었다. ) 차라리 사랑에 지나치게 간절하고 집착하고 서툴렀던 영석의 모습에서 더 동질감을 느꼈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게 아닌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었다는 대목에서 순간 움찔했다.
아무리 묻고, 아무리 대답을 들어도 여전히 허전하고 목마른 사랑의 요구.
그건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를 요구하는 스스로에게 매료되어서 란다.
요구한 것을 받지 못한 경험이 아니라 요구하는 일 자체를 해 본 경험이 없어 서란다.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봐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요구의 경험 따위를 인식해 본 적이 없으므로.

지금도 나는 남편에게 요구한다.
Say you love me...
아무리 들어도 배부르지 않는 말, 사랑해.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 사랑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다. 맹렬하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열등감을 느껴서 맹렬하게 질투하는 것이다.

p. 228

 

 책 속에는 이런 문장들이 많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과 사랑으로 인해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정의.
A 인지 B 인지 C 인지...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지, 도저히 알아챌 수 없었던 순간의 감정들과 내 속에 숨어있던 또 다른 감정들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끌어내서 나열해 준다.
이 모든 것이 사랑에 점령당한 네 몸속에서 나온 감정들이라고.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사랑을 탓하기를 잃어버렸다.
허깨비로서의 숙주의 변명을 내밀고 싶었던 나는, 결국에 숙주로서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내 속으로 들어온 사랑이 제멋대로 내 몸을 움직였지만, 사실은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사랑의 핑계를 대며 사랑의 잘못 인양 덮어 두고 싶었던 내 부끄러움이 있었다.


묘한 책이다.
소설이지만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사랑' 그 자체를 파해지고, 현미경을 대고 관찰하고, 고민해서 내린 정의들이 한가득이다.
어찌 보면 인문서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스토리가 중요한 책이 아니다.
기승전결 따위 없다.
그저 사랑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책이다.
내 속에 있고, 당신 속에 있고, 우리 속에 있지만, 사실은 알아채기 힘들었던 그 사랑의 다른 얼굴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사랑을 행하기만 했던 나와
사랑을 따지고 있는 작가와의 묘한 만남이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사랑을 따져볼 이유가 없고, 사랑을 행하고 있지 않는 사람만이 사랑 밖에서 그 사랑을 따지고 연구한다는 작가의 말에 따라... 작가는 연구자일 수밖에.)


지금 사랑에 점령당한 사람,
사랑의 맥락 없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휘둘리는 사람,
사랑의 좁은 시야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의도를 넘어선 표현들, 동기와 상관없는 결과들, 원문에서 달아나는 번역들이 삶에 신비를 더한다. 생존이라는 이국의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P. 180/181

말은 맥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자족적인 신호체계라서 듣고 싶은 데에 따라 달리 들리는 속성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
P.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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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박정아 지음 / 청어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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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세상의 시선 앞에 당당히.

무엇무엇 때문에 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게 진짜 사랑이라는 어느 시구절이 생각났다.
'불구하고'의 높낮이가 존재한다면 그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불구하고'에 해당할 것만 같은 두 사람.
부모의 반대가 너무도 당연하고 타당해 보이는 두 사람.
사랑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뛰어넘게 해주는지 보여주는 두 사람.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을 한다.

언니 지윤과 청첩장까지 돌리고 결혼할 '뻔'했던 남자 권기주.
결혼식 2주를 남기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며 결혼을 파투 낸 여자의 동생 최서윤.
가장 껄끄럽고, 가장 부담스럽고, 몹시도 난감한 사이인 두 사람이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다시 만났다.
우연인 건지, 운명인 건지 이웃사촌으로 지내게 된 둘은 객지 생활이 주는 낯설음과 외로움을 종종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된다.
껄끄럽고 부담스러울 것만 같았던 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저 남자와 여자로 끌리게 되지만
이성이 크게 외친다, 이건 아니라고.
감정이 귓가에 속삭인다, 놓치면 안 되는 사랑이라고.
처음부터 끝을 예감하고 시작하는 사랑이라는 건, 매 순간 가슴을 움켜쥐게 만드는 저릿함으로 고통스럽다.
그들의 사랑은 안녕할까?


형부가 될 뻔했던 남자와 처제가 될 뻔했던 여자의 사랑 이야기라니.
너무 당연하게도 몹시 신파스러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내내 차분하고 현실적인 분위기의 글은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장 질척이기 쉬워 보이는 소재를 가지고 담백하고 바삭한 참 크래커 같은 글을 써내다니.
글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꾸며놓은 글이 아니라서 더 그런 느낌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사설 같은 느낌?!
문장이 딱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군더더기가 없다는 의미로.
초보 작가이신 것 같은데 거슬리는 문장이 하나도 없었다. (가독성 갑!!)
애써 멋지게 쓰려고 좋아 보이는 문장이나 특이한 표현들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고, 단정하게 그 자체로만 글을 쓴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 워낙 조사가 엉망인 글과 과도한 멋짐을 꾸며낸 글을 읽어서 그런 건지... 깔끔한 문장이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그들이 기어코 지나야만 하는 터널을 꾸밈없이 그대로 내보여주는 느낌.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생각들과 행동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감정 선의 변화들.
너무 현실적이라 실제 누군가의 연애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고, 또한 그래서 공감할 수 없기도 했다.

책의 모든 것을 공감했지만
어쩐지 현실적인 글은 내게도 현실로 다가와서, 이 결혼 나도 반댈세를 외치게 된달까.
언니와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지만 키스와 적당한 스킨십 정도는 했던 사이였고, 강제 결혼 진행도 아닌 상황이었던지라 묘한 찝찝함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청첩장에 찍힌 같은 부모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스토리를 만들고 손가락질할 테다.
부모님의 남우세스럽다는 말이 너무도 와 닿는 두 사람인지라 읽는 내내 그들을 이해했음에도 관계 자체에서 오는 껄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었다.
두 주인공만 놓고 보자면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고 둘만 보이는 게 사랑이니까 사실 전혀 상관이 없다.
둘에 집중하면 공감 × 100.
주변 인물들에 집중하면 공감 - 100.

그런데 난 왜 자꾸만 노친네처럼 로맨스 소설을 보면서 부모들에 감정 이입을 하는 건지. ㅠ_ㅠ
끝까지 반대를 했던 기주의 엄마도 옳고,
딸의 행복을 위해 끝내져주었던 서윤의 엄마도 옳다.
자식에 대한 기대와 세상의 시선과, 자식의 행복 앞에 갈등하고 고민하고 번뇌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는 옳다.
부모의 반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에 눈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서로만 바라보는 두 사람보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막아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옳을 수밖에 없다. 그 마음에는 감히 잴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으니까.
많은 이유들로 결혼을 반대하는 세상의 부모들이 결코 독선적이라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아가게 된다.
부족해도 내 자식이 최고이고, 행복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자식을 등 떠밀 부모는 없다.
물론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현재가 암흑이라도 그들 앞에 찬란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의 반대가 잘못된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만은 옳다고 말하고 싶다.
결국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일 테니까.

이 글 속의 부모는 유독 옳고 옳고 옳다.
내 자식 행복을 위해 상대방 부모의 생채기는 눈 감는 게 흔한 일인데
딸 가진 부모가 동거를 권하면서 상대 부모와 연을 끊게 생긴 남주 때문에 자신들 또한 그들을 보지 않겠다고 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남의 천륜을 끊어놓고 자신들만 자식들을 끼고 행복할 수 없다는 부모의 마음에 코끝이 시큰했다.
참 이기적인 세상이다.
시댁과 인연 끊고 사는 사람도, 처가와 인연 끊고 사는 사람도 흔한 세상이다.
다 나름의 상처와 이유들이 존재하겠지만, 가족을 버리고 선택해야 되는 사랑이라니.
가족을 외면하며 살아야만 하는 그들의 상처에 대해 나는 모른다. 또한 옳다 그르다 할 말도 없다.
단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지금은 내가 자식이지만 곧 부모가 되고,
언젠가 자식의 외면을 받는 노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자식이 사랑 앞에 부모와 함께한 30년쯤은 우습게 외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그래서 서윤의 부모가 더 빛나 보였다.
자식의 사랑을 이해하면서도,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주는 부모라서.
내 자식 상처만 바라보느라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도 발 뻗고 자는 부모가 아니라서.
인간의 도리와 자식의 미래를 함께 지켜주는 부모라서.
나도 그런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
그럼에도 기주의 엄마가 가장 잘 이해가 되는 걸 보면.... 나는 한참 멀었다 싶다.


그런 부모 밑에서 결국에는 천천히 올곧게 사랑을 지켜낸 그들이 아름답다.



현실적으로도
로맨스적으로도
사랑을 하기엔 너무도 '곤란한' 관계인 두 사람.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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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 위인전에 속은 어른들을 위한
함현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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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날 비밀 독서단을 시청하다가 알게 된 책, ' 위인전에 속은 어른들을 위한 찌질한 위인전'.
몹시 흥미롭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겉핥기 식으로 대강대강 알고 있던 '위인'들의 전혀 다른 모습들이 궁금해졌다.
그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후대에 남겨지고 회자되어지는 업적들 말고, 그 빛나는 업적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단면의 어두움 같은 것들, 혹은 찌질함 같은 것들, 그것도 아니라면 평범한 우리네들의 속내를 닮은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들.
그것들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위인들을 읽어낼 때, 대체로 그들은 태어남부터가 비범하고 남다르기 그지없다.
모든 위인들이 그러하진 않을 테지만, '위인' 이라는 단어에 내가 떠올린 여러 명의 인물들은 대부분 그렇다.
(세종대왕이랄지, 모차르트라던지,,,, 떠올리기만 해도 천재였던 사람들)
남다르고 비범하고 심상찮은 모습으로 자라나고, 삶을 이끌어가는 모든 모습들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덕분에 더 먼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와는 다른,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그들만의 리그라고나 할까.
도저히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넓은 시각과 담대한 마음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같은 것들.

너무 멀기만 한 그들을 조금 더 가까운 우리들의 곁으로 끌어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읽었다.
딱히 그들의 찌질함을 보면서 당신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사람'이구나 하는 폄훼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나만큼이나 치열하고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는 마음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 부족함과 찌질함을 갖고서도 그들이 위대해진 이유.
현대의 찌질하고 고달픈 우리의 모습들이 그들보다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는 다독임 같은 것들.
그런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소개된 '위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위인의 범주와 예상에서 절반쯤은 벗어나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어떤 위인들이 등장할 거라는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리고, 예술인들이 더 많이 등장했다.
아마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그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본성들이 찌질함으로 부각되기에 더없이 좋은 모습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대체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기행이나 까칠함, 극과 극으로 치닫는 감정의 변화들은 유명하니까.
그런 예민함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창작의 원천이 아닐까 싶은 마음마저 드니까 말이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시인 김수영.

비독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바로 이 시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기도 했으니 나에겐 역시나 그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그의 '찌질함'을 이해한다면 나는 나쁜 사람일까.
가정폭력을 행사한, 대낮의 대로에서 부인을 때리고 그것을 시로 고백할 수 있는 남자를 이해한다고 하면,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배신하는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나쁜 거라고 주야장천 주장했던 내가, 그의 폭력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너무 이중적인 것인가.
그럴 수밖에 없던 그를, 나는 이해했다.
우습게도 이해가 되었다.
바람을 피우고 더한 짓을 한 대도 여자를 때리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내가, 그를 이해했다.
그의 삶을, 그가 처한 상황들을, 그가 살아낸 시간들을, 그의 상처들을 나는 이해했다.
궁색한 변명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지만, 왜인지 나는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스스로의 바닥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 바닥을 똑바로 마주하고 인정할 줄 알았던 그를 이해했다.
누구나 가지고 산다. 그 바닥을.
다 다른 모습으로, 저마다의 깊이로,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컴컴한 우물을 지닌 채 살아간다.
어둠과 같은 그 우물의 바닥을 똑바로 마주 보기가 우리는 겁이 난다.
나의 가장 초라하고, 가장 치졸하고, 가장 편협하고 더러운 모습을 혹시나 마주 보게 될까 봐.
내 속에 그런 '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들킬까 봐.
그것을 기어코 인정해야 할까 봐.
우리는 우리의 바닥에서 눈을 돌리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좀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에는 반드시 한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밑바닥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 진저리 치게 싫어하는 자신의 밑바닥, 애써 외면하고 다시는 들키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본인조차 그것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애써 외면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합리화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좌절하고 그대로 주저앉거나.
그러나 스스로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온몸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과 화해를 하든, 시원하게 욕을 쏟아내든, 최소한 그 모순의 실체를 발견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등 뒤에서 나를 비추는 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6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사실, 나는 내 바닥과 대면하는 중이다.
나의 모든 바닥을 만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중 어느 부분을 끊임없이 마주하고 있다.
자기합리화의 시간은 끝났다.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서 내 바닥을 인정하는 중이다.
스스럼없이 나의 잘못을 남에게 드러내는 중이다.
김수영 시인처럼 그것으로 속죄를 하고 싶은 것인지,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싶어서 바닥의 깊이를 재고 있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면으로 내 싫은 부분을 마주한다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절망의 어둠에 숨겨진 한줄기 빛을 찾으려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아프다.
내 바닥을 마주 보는 일이 고통스럽다.
진저리 치게 싫고, 인정하기 힘들다.
나 스스로 나를 마구잡이로 찌르는 이 고통을 이겨내야지만 나는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손톱만큼이라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진심으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도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김수영처럼.



묘하게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인물, 빈센트 반 고흐와 이중섭.

고흐야 너무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서 엄청나게 새로운 사실은 없었지만,
무언가의 결핍이 인간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지 .... 그냥 마음이 아프다.
그 결핍이 없었다면 그의 그림은 지금과는 다른 색채를 띄었을까?
그에게 결핍은 결단코 필요한 예술가적 '뮤즈'같은 것이었을까.
왠지 고통과 결핍이 그의 그림을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게 해주었던 게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고흐도 고흐지만, 그의 동생 테오가 정말 대단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삶에 찌들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이중섭.
그의 그림은 개인적인 취향과는 좀 거리가 멀어서 사람들이 다들 열광할 때도 나는 저만치에서 덤덤했었던 것 같다.
그의 삶을 담은 책들도 참 여럿인데... 사실 제대로 읽어본 책이 없다.
그래서 나도 그가 가난한, 가난하기만 한 화가인 줄 알았다.
(그놈의 은지화에 그린 그림 때문에...;;;;)
유복하게 태어나서 돈 걱정 없이 유학을 다녀와 생계 따위를 셈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비극은 삼팔선이었고, 6.25전쟁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을 살아내는 재주는 없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 같은 것들 말이다.
말 그대로 돈 벌 줄 을 모르고, 돈 쓸 줄도 모르고, 돈 모을 줄은 더더욱이 모르는.
그냥 한량 중에 한량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그에게는 악처가 있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생활고에 시달려 일본에 있었으니... 그에게 잔소리를 하고 대신 돈 관리를 해주며 '생활'을 이어나갈 방법이 없었다.

고흐와 이중섭은 결국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누구보다도 쓸쓸하게.

김수영은 나에게 자신의 찌질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럼에도 바라볼 수 있는 저 너머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중섭이 내게 보여준 것은, 어쩌면 내가 가진 찌질함 속에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이면에 가장 빛나는 부분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p.90

 

여성편력이 심했던 두 사람, 리처드 파인만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리처드 파인만은 진짜 '천재'였던 인물이었고, 권위와 관습을 정면으로 깨트리는 인물이었다.
솔직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할 때 저자가 '권위'와 '관습'에 대해 서술한 부분들에 깜짝 놀랐다.
지구는 둥글다고 배우고 자란 나에게 누군가 와서 지구는 사실 세모였다고 말한다면 아마 나는 절대 믿지 않을 것 같다.
그냥 그렇다고 배우고 자랐기 때문이다.
답습된 지식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관습에 누구보다 얽매여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마도 나처럼 고지식한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을 만났다면 괴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차근차근 이 글의 저자가 그의 기행들에 대해 설명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나의 이 무비판적인 사고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이 판단해 놓은 가치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헤밍웨이는 말할 것도 없이 유명한 작가인데 내 상상을 뛰어넘는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줘서 깜짝 놀랐다.
책이라는 것은 출판과 동시에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해석과 이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독자의 해석은 수만 가지로 존재할 테고 그것에 작가가 개입할 권리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가 썼다 하더라도 이미 내 시선과 내 생각들과 재해석된 책은 온전히 내가 소화시킨 나의 배설물이니까.
그것이 비평이든 호평이든 오롯하게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독자의 평가에 대한 침묵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헤밍웨이는 희대의 찌질함으로 대문호에 대한 생각을 바꿔주었다.
작가적 마인드가 부족해서 로설 작가들이 그토록 리뷰에 집착한다고 생각했는데, 대문호 너마저.
이 정도면 나에겐 컬처 쇼크다.
글 속에 등장하는 헤밍웨이 같은 사람을 한 명 안다.
엄청나게 소심한 사람이라는데, 실제로 만나니 심각할 만큼 공격적인 언사를 사용하고, 남의 기분은 생각지도 않은 채 지껄이는 데다가, 무슨 일이 날 때마다 남 탓하기 바쁘다.
조금만 나쁜 소리를 들어도 화내기 바쁘고, 자신의 대한 비평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이 소심하다는데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
헌데 가만 보니 극소심한 사람들이 그런 모양이다.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무도 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단 남을 먼저 찌르고 보는 사람.
그래놓고는 언젠가는 그가 나를 찔렀을 테니 그저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미리 그를 찔렀을 뿐이야라고 변명을 하는 사람.
상실에 대한 극도 불안감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붙였던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상실'은 두려움이고 고통일 텐데, 그들에게만 공포가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자기방어 기제가 뛰어났던 소심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전혀 다른 성격의 파인만과 헤밍웨이는, 전혀 다른 이유로 심각한 여성편력을 보여준다.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파인만과 버려짐으로 상처받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헤밍웨이는 각자의 이유로 불륜을 저지른다.
참 못났다.
오랫동안 많은 후대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그들인데, 손가락질 받기 충분한 사생활을 유지한 덕분에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헤밍웨이는 희대의 역작들을 얻긴 했다고 하지만.;;;)


정치적 인물들, 허균과 마하마트 간디, 넬슨 만델라, 그리고 외전에 등장하는 파울 괴벨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어찌할 수가 없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국민들을 떠올렸다.
허균이 그토록 바라던 세상을 떠올렸고, 괴벨스가 지배한 세상을 떠올렸다.
허균과 간디와 만델라의 공통점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고, 세상을 잘못 타고난 허균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쓰러져갔다.
간디와 만델라를 보면서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의 조상을 떠올렸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나라를 지켜낸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나치의 선동가였던 괴멜스를 보며 나는 대한민국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괴멜스가 그토록 신적으로 믿고 따랐던 히틀러.
그의 잘못된 믿음 속에서 자행되어진 입에 담기도 어려운 악행들.
나치당의 정권 밑에서 살아야 했던 독일의 국민들.
독일인들은 지금도 나치의 이름으로 인해 행해진 수많은 일들에 대해 어느 곳에서든 고개 숙여 사과한다.
그들이 단지 독일 국민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길을 잃었다.
혼란 속에서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그래도 다행이다. 촛불을 들 만큼의 생각들이 우리들에게 남아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신념이 남아있어서.
지난 정권이 촛불을 든 우리에게 퍼부은 물세례를 기억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임을 ... 자랑스러워하고 싶다.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다.

하필 이런 순간에 이런 책을 읽어서 자꾸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에 정말로 관심이 없던 사람인데, 그런 나조차도 정치적인 말을 내뱉게 만드는 지금의 한국은 안녕하신가.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 이상의 감옥 안에 갇혀 살아간다. 그것은 선천적 환경으로 인한 감옥이 될 수도 있고, 경험적 한계가 만든 감옥이 될 수도 있다. 분노와 증오가 만든 감옥은 특히나 그 창살이 두꺼울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지식 또한 사람의 정신을 속박한다.
인간의 정신과 사유의 자유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이러한 형태의 감옥이 많이 존재할수록, 그리고 넓게 존재할수록 사람은 찌질해지게 마련이다.
p.276~277

 

 

마지막 외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아마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대단한 위인이 되지는 못하는 우리들이지만, 절룩거리는 걸음이라 할지라도 내내 앞으로 걸어나가는 우리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위대한 누군가보다도, 나를 닮고 서로를 닮은 그들이 더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니까.

오늘도 나의 찌질함을 견뎌내 보자.
내일을 향해 또 뚜벅뚜벅 걸어가 보자.
오늘만큼은 나의 찌질함을 사랑해 보자.




비평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나에게 누군가 비틀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전혀 다른 시각, 전혀 다른 생각들을 읽어내는 순간, 나의 이해의 폭이 한 뼘쯤 자라난다.
심지어 이 책은 재밌다.
가독성마저 좋다.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인데
이 저자와는 절대 말싸움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교묘할 정도로 설득력이 뛰어나다.
어느 순간 그가 건넨 말들을 모두 납득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 이런.
무비판적으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게 아니랬는데.
난 너무 설득을 잘 당한다. 하하.
유쾌한 설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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