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 것도 없는데 또, 봄을 받았다
정헌재(페리테일) 지음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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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아니 내가 청춘의 덜 핀 봉오리쯤 되었을 적에, 너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에, 페리테일이 나에게 말을 걸었었다.
머리카락은 딱 두 가닥뿐인 동글한 녀석이 씨익 웃으면서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그렇게 내게 주문을 걸었다.
보고 있으면 괜히 빙그레 웃게 되고, 설레게 되고, 위로가 되어주던 페리테일.

이제는 파릇한 청춘을 지나 녹음 짙은 젊음의 후반부 어디쯤을 달리는 내게,
어느 순간 잊고 있던 감성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어 세상 때가 묻는 동안 당신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아직도 그렇게 푸른 청춘 같기만 한지,
청춘의 불안과 청춘의 슬픔과 청춘의 무모함과 청춘의 긍정을 여전히 지닌 채 살고 있는지,
여전히 얼뜨기 같은 스물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혹여 당신도 나처럼 나이 들고 지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스물 언저리에 만났다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된 친구의 안부를 묻듯 당신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쉼과 희망이 되어주고 있는지.

 

잘한 것도 없는데
또,
봄을 받았다.



가을을 몹시도 사랑하던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상하게 봄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가을의 공허함과 쓸쓸함을 격렬히도 앓곤 하던 내가,
이제는 봄의 다정함과 봄의 생명력을 보며 굳은 어깨를 느른히 펴곤 한다.
생명이 움 트는 땅의 기운을 느낄 때면
다시 나도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붕 떠오른다.

봄은 그저 계절의 이름만이 아닌,
삶 속에서 지나는 겨울의 시간들을 견디게 해주는 위로의 이름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내가 다시 꽃을 피우고 풍성한 잎을 틔울 수 있다고 알려주는 희망의 이름이다.

나도 그렇게 매번,
봄을 또 받는다.
그저, 겨울을 견뎌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끌어안고, 조금이라도 더 끌어안고,

아무리 그렇게 해도 시간과 함께 흘러가버리는 것들이 있다.

시간은 모두에게서 공평하게 가져간다. 시간의 양은 모두에게 똑같지만 그 질은 다 다르다. 그래서 빨리 알아챌수록 내 시간은 더 행복해진다.

 

어떤 것이 시간과 함께 정직하게 사라지는지

어떤 것이 시간을 거스르며 오래 남는지.

시간에 잡아먹히지 말고

시간을 살아내고 싶다.

 

돌아가지도 않을 시계를 억지로 돌리느라 앞으로의 시간을 보지 못하며 사고 싶지 않다. 추억은 그냥 돌아보는 것이지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꼭 끌어안고 있어도 커피는 곧 식을 테니 가장 마시기 좋은 순간에 제일 많이 느끼면서 마시고 싶다.

p.191

 

 

그는 아직도 여전했다.
아니 더 깊어진 것 같다.
조금 더 홀가분해진 것도 같고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은 그를 가장 좋은 빛깔로 물들여 익어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그를 만나서 기쁘다.

나이를 먹어 타성에 젖은  충고 같은 것만 해대는 어른이 되지도 않았고,
철들지 못한 채 칭얼대는 불안과 몽상 같은 희망만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일상 같은 고민들과 놓치기 쉬운 순간의 행복들을 캐치해 '지금'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뜬구름 잡는 희망 말고, 진짜 우리가 놓치고 있는 현실의 소소한 행복과 희망들.

지나치게 무겁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의 글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다정한 온도의 위로들.

책을 읽는 동안,
페리테일과 만나는 동안
... 내 마음이 쉬었다.
책 한 권을 읽는 시간 동안 달게 쉬었다.
달콤한 오수를 즐기고 일어난 것처럼 느른하고 편안해진 마음이 씨익 웃는다.
저 동그란 녀석을 보고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난다.

 

봄은 누구에게나
연둣빛의 다정함으로 오기를.
막 겨울을 지난 추운 이에겐 더 따뜻한 훈풍으로 불어오기를.
누구에게나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계절이기를.
그 계절은 기어코 매번 꼭, 다시 오고야 말기를.

당신과 나 사이의 그 간격에는 늘 봄바람이 불기를.
다정한 봄 향기가 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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