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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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또한 이 책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 글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작가의 저 시선 때문이었다.
사랑의 숙주.
우리의 몸은 그저 숙주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에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지나간 사랑의 상처들에 마데카솔을 바르는 심정으로... 새살이 솔솔 돋기를 원하면서.
그 시간 속의 나와 그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그저 사랑의 숙주로써 우리는 이용당했던 것뿐이라는 위안 같은 것들 말이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그 사람이라던지, 도저히 나답지 않았던 나의 모습들이라던지, 그저 상처로 남겨져버린 사랑이라던지, 사랑으로 말미암아 파생되었던 그 모든 일들의 책임을 뒤늦게라도 '사랑'에 떠 넘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찾아 헤매었다.
내 잘못이 아니거니와, 상대방의 잘못 또한 아니라는 또렷한 증거를 찾길 원했다.
어느 순간 내 몸속에 들어와 제멋대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랑이 잘못 한 거지, 그저 숙주로써 몸을 제공하고 사랑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그래서 그가 내게 입힌 상처들 또한 그의 의지가 아니었고, 나의 부족함이나 나의 서투름 때문이 아니었다는 위안.
내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무엇이든 용서하고 싶었고, 편안해지고 싶었다.
'사랑'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서라도 나는 치유되고 싶었다.
사랑을 잃은 상처들을.

 

여기 네 사람이 나온다.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예 사랑하지 않기를 선택한, 형배.
사랑이 생존의 문제와 동일시되는 절박함을 맞닥뜨린, 영석.
이 두 명의 남자를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는, 선희.
그리고 자유연애주의자인 형배의 친구, 준호.

똑같은 사랑이 네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누구의 몸에 기생하느냐에 따라 사랑은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고 만다. (애초에 똑같은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사랑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의지대로 움직였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본인의 생각과 의지와 가치관을 통과해서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랑을 보여준다.


내가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은 준호였다.
실제로 준호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바람둥이라고 욕을 할 것만 같지만, 어떤 부분에서 그의 생각들은 몹시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은 다 다르다. 사람은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만 전부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공유하고 있는 많은 부분이 아니라 공유하지 않은 아주 작은 부분이 개체 간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성격, 그 사람의 정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주 작은 그 차이 속에 매력이 잠겨 있다.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고유하고 특별하므로 모든 사람을 고유하고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 유일한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의 매력은 한 줄로 순서를 매겨 세울 수 없고, 비교 불가능하다.
- p.072/073

 

이게 이성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저 인간 자체에 대한 정의라고 생각해보면 준호는 참 멋진 사람이다.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깊은 사람인 것이다.
단지 이런 통찰력 있는 시선들이 연애를 할 때 빛을 발하고, 여러 여자를 두루 만나야 하는 이유로 사용된다는 게 통탄할 일이다.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이 이상화된 것은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회를 갈등과 혼란에서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의 불변성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의 신화는 사랑에 의해, 사랑을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사회의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모르는가. 사랑은 이 신화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 p.077/078

그 두려움의 배후에 있는 것이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에 대한 신화인데, 그 신화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실체는, 사랑이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일 뿐이다.
…중략… 결혼 제도의 유지를 위해 사랑은 왜곡되고 희생을 강요받았다. …중략…
결혼이 사랑을 훼손하고 사랑이 결혼을 곤란에 빠뜨릴 것을 그는 걱정했다.
- p.079/080

 

굉장히 신선한 시선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시선과 생각들로 영원한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사랑의 결말이 결혼이 아님을, 결혼을 하고서야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의 종착점이 결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라 나를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사랑을 만난 순간 그 충족감을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느냐고, 나조차도 그런 힐난의 시선을 사랑에게 보내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그 사랑을 지키려고,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영원불멸의 사랑의 신화 앞에 우리는 모두 세뇌당했던 것일까.
존재하는지 아닌지 조차 모르는 그 영원한 단 하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바람둥이의 자기합리화의 뻔뻔한 변명에 불과한 것일 뿐인건가.

나는 다만 사랑 앞에
성실할 뿐이다.

(박원의 '노력'이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사랑은 성실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영역의 것이 분명하지만.)

 

사랑이 두려운, 혹은 어려운 사람에게는 형배가 더 와 닿을 테고,
사랑이 너무 절실해서 삶의 문제로 인식이 될 만큼 목마른 사람들은 영석이 더 와 닿을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사랑하기를 두려워 한 적은 없으니 ( 어느 날 갑자기 날 찾아온 사랑 앞에 나는 매번 순응했고, 사랑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숙주의 역할에 몹시도 충실했었다. ) 차라리 사랑에 지나치게 간절하고 집착하고 서툴렀던 영석의 모습에서 더 동질감을 느꼈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게 아닌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었다는 대목에서 순간 움찔했다.
아무리 묻고, 아무리 대답을 들어도 여전히 허전하고 목마른 사랑의 요구.
그건 사랑한다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를 요구하는 스스로에게 매료되어서 란다.
요구한 것을 받지 못한 경험이 아니라 요구하는 일 자체를 해 본 경험이 없어 서란다.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봐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요구의 경험 따위를 인식해 본 적이 없으므로.

지금도 나는 남편에게 요구한다.
Say you love me...
아무리 들어도 배부르지 않는 말, 사랑해.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 사랑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다. 맹렬하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열등감을 느껴서 맹렬하게 질투하는 것이다.

p. 228

 

 책 속에는 이런 문장들이 많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과 사랑으로 인해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정의.
A 인지 B 인지 C 인지...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지, 도저히 알아챌 수 없었던 순간의 감정들과 내 속에 숨어있던 또 다른 감정들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끌어내서 나열해 준다.
이 모든 것이 사랑에 점령당한 네 몸속에서 나온 감정들이라고.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사랑을 탓하기를 잃어버렸다.
허깨비로서의 숙주의 변명을 내밀고 싶었던 나는, 결국에 숙주로서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내 속으로 들어온 사랑이 제멋대로 내 몸을 움직였지만, 사실은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사랑의 핑계를 대며 사랑의 잘못 인양 덮어 두고 싶었던 내 부끄러움이 있었다.


묘한 책이다.
소설이지만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사랑' 그 자체를 파해지고, 현미경을 대고 관찰하고, 고민해서 내린 정의들이 한가득이다.
어찌 보면 인문서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스토리가 중요한 책이 아니다.
기승전결 따위 없다.
그저 사랑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책이다.
내 속에 있고, 당신 속에 있고, 우리 속에 있지만, 사실은 알아채기 힘들었던 그 사랑의 다른 얼굴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사랑을 행하기만 했던 나와
사랑을 따지고 있는 작가와의 묘한 만남이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사랑을 따져볼 이유가 없고, 사랑을 행하고 있지 않는 사람만이 사랑 밖에서 그 사랑을 따지고 연구한다는 작가의 말에 따라... 작가는 연구자일 수밖에.)


지금 사랑에 점령당한 사람,
사랑의 맥락 없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휘둘리는 사람,
사랑의 좁은 시야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의도를 넘어선 표현들, 동기와 상관없는 결과들, 원문에서 달아나는 번역들이 삶에 신비를 더한다. 생존이라는 이국의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P. 180/181

말은 맥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자족적인 신호체계라서 듣고 싶은 데에 따라 달리 들리는 속성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
P.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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