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위인전 - 위인전에 속은 어른들을 위한
함현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비밀 독서단을 시청하다가 알게 된 책, ' 위인전에 속은 어른들을 위한 찌질한 위인전'.
몹시 흥미롭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겉핥기 식으로 대강대강 알고 있던 '위인'들의 전혀 다른 모습들이 궁금해졌다.
그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후대에 남겨지고 회자되어지는 업적들 말고, 그 빛나는 업적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단면의 어두움 같은 것들, 혹은 찌질함 같은 것들, 그것도 아니라면 평범한 우리네들의 속내를 닮은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들.
그것들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위인들을 읽어낼 때, 대체로 그들은 태어남부터가 비범하고 남다르기 그지없다.
모든 위인들이 그러하진 않을 테지만, '위인' 이라는 단어에 내가 떠올린 여러 명의 인물들은 대부분 그렇다.
(세종대왕이랄지, 모차르트라던지,,,, 떠올리기만 해도 천재였던 사람들)
남다르고 비범하고 심상찮은 모습으로 자라나고, 삶을 이끌어가는 모든 모습들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덕분에 더 먼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와는 다른,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그들만의 리그라고나 할까.
도저히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넓은 시각과 담대한 마음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같은 것들.

너무 멀기만 한 그들을 조금 더 가까운 우리들의 곁으로 끌어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읽었다.
딱히 그들의 찌질함을 보면서 당신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사람'이구나 하는 폄훼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나만큼이나 치열하고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는 마음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 부족함과 찌질함을 갖고서도 그들이 위대해진 이유.
현대의 찌질하고 고달픈 우리의 모습들이 그들보다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는 다독임 같은 것들.
그런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소개된 '위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위인의 범주와 예상에서 절반쯤은 벗어나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어떤 위인들이 등장할 거라는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리고, 예술인들이 더 많이 등장했다.
아마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그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본성들이 찌질함으로 부각되기에 더없이 좋은 모습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대체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기행이나 까칠함, 극과 극으로 치닫는 감정의 변화들은 유명하니까.
그런 예민함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꼭 필요한 창작의 원천이 아닐까 싶은 마음마저 드니까 말이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시인 김수영.

비독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바로 이 시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기도 했으니 나에겐 역시나 그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그의 '찌질함'을 이해한다면 나는 나쁜 사람일까.
가정폭력을 행사한, 대낮의 대로에서 부인을 때리고 그것을 시로 고백할 수 있는 남자를 이해한다고 하면,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배신하는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나쁜 거라고 주야장천 주장했던 내가, 그의 폭력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너무 이중적인 것인가.
그럴 수밖에 없던 그를, 나는 이해했다.
우습게도 이해가 되었다.
바람을 피우고 더한 짓을 한 대도 여자를 때리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내가, 그를 이해했다.
그의 삶을, 그가 처한 상황들을, 그가 살아낸 시간들을, 그의 상처들을 나는 이해했다.
궁색한 변명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지만, 왜인지 나는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스스로의 바닥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 바닥을 똑바로 마주하고 인정할 줄 알았던 그를 이해했다.
누구나 가지고 산다. 그 바닥을.
다 다른 모습으로, 저마다의 깊이로,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컴컴한 우물을 지닌 채 살아간다.
어둠과 같은 그 우물의 바닥을 똑바로 마주 보기가 우리는 겁이 난다.
나의 가장 초라하고, 가장 치졸하고, 가장 편협하고 더러운 모습을 혹시나 마주 보게 될까 봐.
내 속에 그런 '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들킬까 봐.
그것을 기어코 인정해야 할까 봐.
우리는 우리의 바닥에서 눈을 돌리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좀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에는 반드시 한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밑바닥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 진저리 치게 싫어하는 자신의 밑바닥, 애써 외면하고 다시는 들키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본인조차 그것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애써 외면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합리화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좌절하고 그대로 주저앉거나.
그러나 스스로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온몸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과 화해를 하든, 시원하게 욕을 쏟아내든, 최소한 그 모순의 실체를 발견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등 뒤에서 나를 비추는 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26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사실, 나는 내 바닥과 대면하는 중이다.
나의 모든 바닥을 만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중 어느 부분을 끊임없이 마주하고 있다.
자기합리화의 시간은 끝났다.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서 내 바닥을 인정하는 중이다.
스스럼없이 나의 잘못을 남에게 드러내는 중이다.
김수영 시인처럼 그것으로 속죄를 하고 싶은 것인지,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싶어서 바닥의 깊이를 재고 있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면으로 내 싫은 부분을 마주한다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절망의 어둠에 숨겨진 한줄기 빛을 찾으려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아프다.
내 바닥을 마주 보는 일이 고통스럽다.
진저리 치게 싫고, 인정하기 힘들다.
나 스스로 나를 마구잡이로 찌르는 이 고통을 이겨내야지만 나는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손톱만큼이라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진심으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도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김수영처럼.



묘하게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인물, 빈센트 반 고흐와 이중섭.

고흐야 너무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서 엄청나게 새로운 사실은 없었지만,
무언가의 결핍이 인간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지 .... 그냥 마음이 아프다.
그 결핍이 없었다면 그의 그림은 지금과는 다른 색채를 띄었을까?
그에게 결핍은 결단코 필요한 예술가적 '뮤즈'같은 것이었을까.
왠지 고통과 결핍이 그의 그림을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게 해주었던 게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고흐도 고흐지만, 그의 동생 테오가 정말 대단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삶에 찌들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이중섭.
그의 그림은 개인적인 취향과는 좀 거리가 멀어서 사람들이 다들 열광할 때도 나는 저만치에서 덤덤했었던 것 같다.
그의 삶을 담은 책들도 참 여럿인데... 사실 제대로 읽어본 책이 없다.
그래서 나도 그가 가난한, 가난하기만 한 화가인 줄 알았다.
(그놈의 은지화에 그린 그림 때문에...;;;;)
유복하게 태어나서 돈 걱정 없이 유학을 다녀와 생계 따위를 셈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 그에게 비극은 삼팔선이었고, 6.25전쟁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을 살아내는 재주는 없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 같은 것들 말이다.
말 그대로 돈 벌 줄 을 모르고, 돈 쓸 줄도 모르고, 돈 모을 줄은 더더욱이 모르는.
그냥 한량 중에 한량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그에게는 악처가 있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생활고에 시달려 일본에 있었으니... 그에게 잔소리를 하고 대신 돈 관리를 해주며 '생활'을 이어나갈 방법이 없었다.

고흐와 이중섭은 결국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누구보다도 쓸쓸하게.

김수영은 나에게 자신의 찌질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럼에도 바라볼 수 있는 저 너머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중섭이 내게 보여준 것은, 어쩌면 내가 가진 찌질함 속에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이면에 가장 빛나는 부분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p.90

 

여성편력이 심했던 두 사람, 리처드 파인만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리처드 파인만은 진짜 '천재'였던 인물이었고, 권위와 관습을 정면으로 깨트리는 인물이었다.
솔직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할 때 저자가 '권위'와 '관습'에 대해 서술한 부분들에 깜짝 놀랐다.
지구는 둥글다고 배우고 자란 나에게 누군가 와서 지구는 사실 세모였다고 말한다면 아마 나는 절대 믿지 않을 것 같다.
그냥 그렇다고 배우고 자랐기 때문이다.
답습된 지식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관습에 누구보다 얽매여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마도 나처럼 고지식한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을 만났다면 괴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차근차근 이 글의 저자가 그의 기행들에 대해 설명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나의 이 무비판적인 사고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이 판단해 놓은 가치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헤밍웨이는 말할 것도 없이 유명한 작가인데 내 상상을 뛰어넘는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줘서 깜짝 놀랐다.
책이라는 것은 출판과 동시에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해석과 이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독자의 해석은 수만 가지로 존재할 테고 그것에 작가가 개입할 권리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가 썼다 하더라도 이미 내 시선과 내 생각들과 재해석된 책은 온전히 내가 소화시킨 나의 배설물이니까.
그것이 비평이든 호평이든 오롯하게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독자의 평가에 대한 침묵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헤밍웨이는 희대의 찌질함으로 대문호에 대한 생각을 바꿔주었다.
작가적 마인드가 부족해서 로설 작가들이 그토록 리뷰에 집착한다고 생각했는데, 대문호 너마저.
이 정도면 나에겐 컬처 쇼크다.
글 속에 등장하는 헤밍웨이 같은 사람을 한 명 안다.
엄청나게 소심한 사람이라는데, 실제로 만나니 심각할 만큼 공격적인 언사를 사용하고, 남의 기분은 생각지도 않은 채 지껄이는 데다가, 무슨 일이 날 때마다 남 탓하기 바쁘다.
조금만 나쁜 소리를 들어도 화내기 바쁘고, 자신의 대한 비평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이 소심하다는데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
헌데 가만 보니 극소심한 사람들이 그런 모양이다.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무도 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단 남을 먼저 찌르고 보는 사람.
그래놓고는 언젠가는 그가 나를 찔렀을 테니 그저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미리 그를 찔렀을 뿐이야라고 변명을 하는 사람.
상실에 대한 극도 불안감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붙였던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상실'은 두려움이고 고통일 텐데, 그들에게만 공포가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자기방어 기제가 뛰어났던 소심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전혀 다른 성격의 파인만과 헤밍웨이는, 전혀 다른 이유로 심각한 여성편력을 보여준다.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파인만과 버려짐으로 상처받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헤밍웨이는 각자의 이유로 불륜을 저지른다.
참 못났다.
오랫동안 많은 후대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그들인데, 손가락질 받기 충분한 사생활을 유지한 덕분에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헤밍웨이는 희대의 역작들을 얻긴 했다고 하지만.;;;)


정치적 인물들, 허균과 마하마트 간디, 넬슨 만델라, 그리고 외전에 등장하는 파울 괴벨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어찌할 수가 없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국민들을 떠올렸다.
허균이 그토록 바라던 세상을 떠올렸고, 괴벨스가 지배한 세상을 떠올렸다.
허균과 간디와 만델라의 공통점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고, 세상을 잘못 타고난 허균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쓰러져갔다.
간디와 만델라를 보면서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의 조상을 떠올렸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나라를 지켜낸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다.
나치의 선동가였던 괴멜스를 보며 나는 대한민국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괴멜스가 그토록 신적으로 믿고 따랐던 히틀러.
그의 잘못된 믿음 속에서 자행되어진 입에 담기도 어려운 악행들.
나치당의 정권 밑에서 살아야 했던 독일의 국민들.
독일인들은 지금도 나치의 이름으로 인해 행해진 수많은 일들에 대해 어느 곳에서든 고개 숙여 사과한다.
그들이 단지 독일 국민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길을 잃었다.
혼란 속에서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그래도 다행이다. 촛불을 들 만큼의 생각들이 우리들에게 남아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신념이 남아있어서.
지난 정권이 촛불을 든 우리에게 퍼부은 물세례를 기억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임을 ... 자랑스러워하고 싶다.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다.

하필 이런 순간에 이런 책을 읽어서 자꾸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에 정말로 관심이 없던 사람인데, 그런 나조차도 정치적인 말을 내뱉게 만드는 지금의 한국은 안녕하신가.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 이상의 감옥 안에 갇혀 살아간다. 그것은 선천적 환경으로 인한 감옥이 될 수도 있고, 경험적 한계가 만든 감옥이 될 수도 있다. 분노와 증오가 만든 감옥은 특히나 그 창살이 두꺼울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지식 또한 사람의 정신을 속박한다.
인간의 정신과 사유의 자유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이러한 형태의 감옥이 많이 존재할수록, 그리고 넓게 존재할수록 사람은 찌질해지게 마련이다.
p.276~277

 

 

마지막 외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아마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대단한 위인이 되지는 못하는 우리들이지만, 절룩거리는 걸음이라 할지라도 내내 앞으로 걸어나가는 우리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위대한 누군가보다도, 나를 닮고 서로를 닮은 그들이 더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니까.

오늘도 나의 찌질함을 견뎌내 보자.
내일을 향해 또 뚜벅뚜벅 걸어가 보자.
오늘만큼은 나의 찌질함을 사랑해 보자.




비평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나에게 누군가 비틀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전혀 다른 시각, 전혀 다른 생각들을 읽어내는 순간, 나의 이해의 폭이 한 뼘쯤 자라난다.
심지어 이 책은 재밌다.
가독성마저 좋다.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인데
이 저자와는 절대 말싸움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교묘할 정도로 설득력이 뛰어나다.
어느 순간 그가 건넨 말들을 모두 납득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 이런.
무비판적으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게 아니랬는데.
난 너무 설득을 잘 당한다. 하하.
유쾌한 설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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