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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나는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인물 중 하나다.
하필이면 그 해에 태어났고, 하필이면 여자인데다, 하필이면 지금 아이 엄마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어쩐지 양날의 검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완벽히 공감하거나,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거나.
왠지 공감하지 못한 이방인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공포가 일렁였다.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서 여기저기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댈 때도 눈 감고, 귀를 막았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보통의 사람이니까.
보편적이라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책 속에서 만난 82년생 김지영 씨는
딸만 둘에 간신히 아들 하나를 낳은 서울의 어느 집 둘째 딸이다.
여자는 돈을 벌어 남자 가족(오빠, 남동생)의 학비를 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을, 딱 그런 방식으로 살아낸, 그래서 배움에 한이 있는 엄마를 가진 여자다.
할머니의 너무 당당한 남녀 차별을 몸소 겪으며 자랐고,
너무너무 흔하디흔한 치한들에 치이며 사춘기를 보냈고,
이제는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축복받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IMF라는 복병을 만나 흔들리는 가정 속에서 공부를 했다.
다행히도 퇴직당한 아빠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장사를 해서 적당한 돈을 벌었고,
감사하게도 다른 친구들처럼 아르바이트에 시달리며, 쪽잠을 자고, 빚을 떠안은 채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취업의 벽은 높았고, 기대와 꿈을 갉아먹는 현실 앞에서 간신히 취직한 회사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결국 자신의 커리어와 삶을 내려놓은 채 육아에 전념하는 전업주부인 '엄마'가 되어버린 김지영 씨.
그녀는 결국, 어쩐지 내내 떠밀리고, 억울한 것만 같은 '여자'라는 인생에서 병을 얻고야 만다.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으로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울분 같은 것이 뒤섞인.
자, 이제 82년생 내 삶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아들만 셋인 집에 늦둥이에 막내로 태어났다. (심지어 친척들 중에서도 여잔 나 하나다.)
어릴 적부터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이쁨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나이 많은 오빠들은 나를 이뻐하면 했지 나를 편애한다고 질투하거나 억울해 한 적은 없었다.
명절에도 나는 오빠들과 똑같이 절을 했고, 아빠 옆에 꼭 붙어서 같은 상에서 밥을 먹었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당연히 제일 먼저 내 차지였다.
나이 차이가 많은 오빠들 덕에 외동딸이나 다름없이 자랐기에 누군가와 내 것을 나눌 필요도 없었고, '여자'이기 때문에 청소를 하거나 밥을 하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우리 집은 아빠가 엄마보다 꼼꼼해서 계란말이가 들어간 도시락도 아빠가 싸주셨고, 내 머리를 땋아준 것도 아빠였다.
직접적인 남녀 차별을 당하면서 자란 적은 없지만, 대신 시골에서 나고 자랐기에 세련되지 못한 옛날 사람의 정서를 그대로 답습하며 자랐다.
이를테면, 명절에 시댁에 가는 일은 당연하다고 알고 자랐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미 세상이 정해놓은 어떤 틀에 대한 의문이나 거부감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들이 '왜'그래야 하느냐고 세상에 따져 물을 때 나는 그냥 순응하며 세상의 뜻대로 살아왔다.
내게 주어진 '여자'의 역할에 적당히 순응하고, 적당히 무시하며(딱히 현모양처도 아니고, 딱히 열심히 주부 역할을 해내지도 않으며), 세상이 원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세상이 'A'라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기며 살아왔다.
그리고 오늘, 82년생 김지영 씨를 만났다.
무언가 늘 억울하고, 부당하고, 울분에 차 있는 것 같은, 어떤 면에서는 피해 의식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아주 잠깐 들뻔했던, 보편적이고 평범한 82년생 김지영 씨를.
이쯤에서 나는 고민하게 된다.
그녀가 살아온 삶의 곳곳에서 내 친구들의 삶의 흔적들이 발견되었고, 가끔은 내 삶의 흔적도 묻어 있었는데, 왜 나는 그녀처럼 내가 차별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갑자기 내가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