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출간 당시 구입해서 앞부분은 읽다가 덮어뒀던 책이다.
글의 문제가 아닌, 당시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시간 날 때 읽어야지 하고 덮었던 것 같다.
얇으니까 언제든지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그런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서, 영화가 개봉한다니까, 뒤늦게 책을 읽을 줄이야.
2013년에 출간된 책인데 2017년에 읽었다.
나 스스로에게 뭔가 씁쓸한 기분.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p.51

 

그는 연쇄 살인범이다.
연쇄살인은 일종의 중독이라 멈출 수 없다고들 이야기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멈췄다.
그 계기라는 게 정말 교통사고로 인한 뇌 수술인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살인을 멈춘 채 평범한 사람들 속을 유영하며 살았던 시간이 26년.
놀랍도록 평온한 삶을 그는 살아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빛나는 살인의 기억을 간직 한 채.
살인 충동이 일지 않아 심심하고 평온했던 삶의 끝, 알츠하이머 판명을 받게 된 70세의 그는 다시 살인을 계획한다.
딸의 곁에 들러붇은 그놈은, 연쇄 살인범이 분명하다!
내 딸을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놈을 해치워야 한다.
아 제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자꾸만 어제의 기억이 사라진다.
처음 보는 딸의 남자친구, 뭔가 섬뜩하다.
수첩을 뒤지자, 그 속에 낯선 기록들이 꿈틀 거린다.
무슨 뜻일까.
자꾸만 사라지는 어제의 기억들을 붙잡고 싶다.
가까운 기억들은 형체도 없이 깨끗하게 지워지고, 수십 년 전 살인의 기억들은 선명하다.
집 뒤 대나무 숲이 울고 있다.
뽀족한 죽순이 돋아난다.
이상하다, 뭔가 잊은 것만 같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지난 시절의 연쇄 살인마.
그의 기억과 기록을 따라 글은 움직인다.
짧게 짧게 기록된 그의 일상의 단상들과 기억의 편린들.
몹시도 속도감 있게 글은 나를 끌고 갔다.
휘몰아치듯 급하게 나를 끌고 가는 글의 속도에 올라타, 문득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가 싶었다.
가독성이 지나칠 정도로 좋다.
그것은 대부분 장점일 텐데, 왠지 자꾸만 브레이크가 밟고 싶어졌다.
빠르게 지나쳐서 제대로 보지 못한 차창 밖 풍경이 궁금해졌다.
놓치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왠지 나인 것인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찾아온 혼돈.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 _니체"

당신의 혼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도 혼돈 속에 빠져버렸다.
당신을 지켜보았다는 혼돈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다.
당신의 기억을 나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던 기억들과 마주치면서 어쩌면 나는 예감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긋나는 대사들과 두서없는 상황들.
치매환자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라가고 있었던 당신이었는데, 그럼에도 당신의 기록들을 나는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신은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도 기록하고 남겼으니까.
그 기록들이 안타까웠으니까.

하지만 책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기억들이 진실과 다를 수도 있다는 섬뜩함이다.
기억이란 얼마나 쉽게 날조될 수 있는지.
우리가 믿었던 그것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순간, 우리의 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기억이 무너져내리며 나의 존재도 무너져 텅 비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과거를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p.93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얼마나 정확할까.
치매환자의 기억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는 걸까.
이 책은 두렵지만, 현실은 서글프다.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이 너무도 서글프게 묘사되어 있다.
엄마가 알츠하이머다.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가버리는 손안에 움켜쥔 모래알 같은 기억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기억이 사라진 엄마.
엄마를 볼 때마다 엄마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내내 궁금했었다.
바로 어제가 기억나지 않는 삶이란 어떤 기분일까, 상상했었다.
나의 상상보다 책은 더 잔인했다.
어제를 잃어버린 오늘의 시간들이 얼마나 허무한지, 내일의 기억을 갖지 못하는 오늘의 삶이 얼마나 난처한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거다.
미루어 짐작이란 참, 어설프기 그지없다.

엄마는 오늘도 혼돈을 들여다보고 계실까.
책 속에 등장하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처럼 공(空) 속을 부유하며 무(無)의 상태로 헤엄치고 계실까.
부디 그곳이 책 속에서 반증하는 공포의 공간이 아니기를.... 빌어본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이토록 무서운 일이었던가.

 

 

 

연쇄살인범도 해결할 수 없는 일 : 여중생의 왕따
p.40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p.44

 

 

종종 튀어나오는 블랙코미디적인 시니컬한 유머가 매력적이다.
가만 보면 나는 어둡고 날카롭고 꼬여있는 시니컬한 유머를 매우 좋아한다.
다른 책에서도 심각하고 어두운 상황에 등장하는 이런 유머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연쇄살인범이 이토록 유머러스 해서야 원.
배척하고 싶은 인간상인데 매력을 느끼는 건 곤란하다.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이 나를 홀린다.
그렇지만 연쇄살인범에게 홀리고 싶진 않다구요!

책장에 꽂아둔 김영하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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