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당신을 위한 공감 수업
아서 P. 시아라미콜리.캐서린 케첨 지음, 박단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버드 의대 심리학 교수는 왜 동생의 자살을 막지 못했을까?

 

 

 

제목과 책이 주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의 글이 담기지 않았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보게 되는.

 

나는 이 책이 공감의 에세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살로 사랑하는 이를 빼앗긴 누군가가 들려주는 슬픔과 위로의 다독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그 자신의 이야기도 이 책에 담겨있지만, 그저 위로와 경험적 공감만을 내세우는 책은 아니었다.

 

저자는 동생을 잃었지만 슬픔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

분명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테지만, 결국 그는 그 슬픔과 절망으로 인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졌다.

바로 '공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말이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공감이 어떤 힘을 발휘해 우리를 지켜내는가.

이 책은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감의 핵심은 이해하는 것이고,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이해해야만 그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은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며 즉각적인 답은 거부한다. "잘 모르겠어"는 공감의 가장 강력한 언어 중 하나다. 공감은 모든 질문의 답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폭넓은 이해를 얻기 위해 시야를 확대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_ P.81

 

단순히 '공감을 느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 어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한 것을 바깥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기 위해 건설적인 공감 표현법을 배울 수 있다. _ P.81

 

공감은 어딘가로 움직이거나, 행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변화시키지는 않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보다는 가져가는 것이 더 많은 정서적 경험인 듯하고 말이다. 우리는 공감을 '느낀다'는 것은 확실한데, 과연 공감으로 무엇을 '할' 수도 있는 걸까? _ P.83

 

 

 

나는 지금껏 공감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저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정도, 그로 인한 연민이나 동질감 같은 감정들을 공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보다 큰 공감의 행동들도 물론 하고 있었겠지만, 공감의 진짜 위력을 알지 못했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 혹은 상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마저도 공감 속에 숨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공감'은 아주 작은 의미의 공감이었던 것 같다.

실체를 다 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공감이라는 존재의 아주 미미한 일부를 붙잡고 마치 다 안다는 듯 행동했던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바라본 공감은,

심리학을 통해 배우는 공감은, 많이 달랐다.

우리 삶 곳곳에 공감의 힘이 작용했고, 나의 생각과 행동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나도 모른 채 상대방의 공감의 힘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도 공감의 선한 힘과 악한(악용된 공감)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조종하거나 착각하게 만들거나 속이는 일들, 그 속에도 공감의 힘이 담겨있었다.

상대가 나에게 과한 친근감을 표하거나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 때, 그 너머에 담긴 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공감의 힘에 휘둘려 이쪽 저쪽으로 비틀거리다가는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공감의 선한 힘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충고나 지나친 다정함이 아닌 선을 지킨 공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해받고 싶을 것이다. 정답이 필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을 일정하게 지켜줄,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공감의 온도를 우리가 찾아낼 수 있다면 많은 것들이 변화할 것이다.

상대방을 위해서뿐 아니라 나 스스를 위해서도 우리에겐 공감이 필요하다.

 

심리학을 공부하던 저자는 동생을 죽음으로부터 지켜내진 못했지만, 공감의 힘으로 오늘도 누군가를 죽음으로부터 건져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 잡아주지 못했던 동생의 손을 대신해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며 그만의 방식으로 동생을 기억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세상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 책은 다정한 에세이라기보다는 심리학서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다.

공감을 통해 우리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절반까지는 공감이 어떤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여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심리 상담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덕분에 어려운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고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나머지 절반에서는 '공감의 힘을 키우는 여덟 가지 키워드'를 통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식으로 우리의 행동을 제어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일러준다.

공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우리 삶에 어떤 방식으로 대입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 분명 조금씩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새로운 방식의 마음 챙김을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이다.

 

심리학을 학문으로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활용이 절실하지만 삶을 살아내는 일 만으로도 지친 우리는 전문적인 심리학서를 공부하기엔 역부족이다.

전문적이지만 쉽고, 좀 더 가까이 느끼고, 좀 더 편하게 닿을 수 있는 심리학 책으로 이 책을 추천해 본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감의 기술'일 테니까.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누군가가 네게 험한 말을 한다면 그 말의 근원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렴. 분노는 대개 오래 묵은 수치나 두려움에서 만들어지는데, 그 옛일은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넌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 우연히 있었던 것뿐이야.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해도 그들의 불안정함에 속지 말아야 한다."

P.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의 속도로 걸어가는 법
이애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얼마의 속도로 걷고 있을까.

남들은 또 어떤 속도로 걷고 있을까.

좋은 속도, 혹은 알맞은 속도라는 게 인생에 존재할까?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적당하고 여유로운 속도.

우리들은 늘 그것을 갈망하는 것도 같다.

누군가가 달리니까 덩달아 달리다가 신발이 벗겨지고 돌에 발이 채이기도 하면서, 남들의 속도에 맞춰 억지로 달리고 있지는 않는지.

인생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달리기인데, 나도 모르게 전력 질주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늘 숨이 차서 다른 걸 돌아 볼 여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나의 속도가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이애경 작가는 제주에 살고 있었다.

모든 시간이 좀 더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곳.

뭔가 치열하게 살아야만 살아있음을 인정받는 것 같은 세상에서 '느리게 걸어도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곳.

그녀에게 제주는 그런 곳인 것 같다.

 

나는 제주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제주의 바람과 제주의 날씨와 제주의 삶을 모른다.

하지만 남쪽의 어느 작은 섬에서의 일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는 낯선 제주보다 익숙한 남쪽의 섬을 먼저 떠올렸다.

 

섬이라는 공간이 어쩔 수 없게 폐쇄적인데 그래서 이방인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배타적인 곳은 아니다.

그냥 이방인인 채로 그들을 껴안는 곳이기도 하다.

투박한 채로 다정한 그들만의 온기를 누구에게라도 넉넉히 풀어놓는다.

 

얼마 전 읽은 다른 에세이는 가평으로 내려가 사는 작가의 글이었는데, 이번엔 제주다.

도심에서 살았던 그들은 자연이 가까운 곳으로 가서 자신만의 템포를 찾아냈다.

도심에서 멀어지면 사람들의 마음에도 여유가 깃드는 걸까?

자연이 변하는 시간을 몸소 체험하면 스스로 알아서 자신에게 알맞은 속도를 인지하게 되는 것일까?

비슷한 나이대의 그들이 비슷한 것을 열망하며 찾아든 곳이 결국은 자연 가까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 책 속에는 제주에서의 삶이 담겨있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길을 더 잡아 끈 것은 '사랑' 혹은 '이별'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고 나니 사랑 에세이에는 시들해졌다.

읽어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고 해야 될까?

설렘을 느낀지 너무 오래되었고, 헤어짐에 가슴 뜯긴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가 묘하게 겉돌고는 했는데, 이 책 속에 담긴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잘 우린 차를 넘기는 것처럼 은은하고 편안했다.

 

만남과 이별에 지나치게 뜨거울 나이를 지난 작가의 글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나와 엇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라서 그럴까.

그녀가 들려주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자꾸 고개 끄덕이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특히나 이별에 관한 글들이 참 좋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 책은 이별 후유증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읽으면 참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 막 뜨거운 사랑을 끝낸 스무 살의 누군가가 아니라 몇 번의 사랑에 가슴 데여본 적 있는 깊어진 청춘에게 더 권해주고 싶다.

 

 

 

나는 내 인생에 있을 '언젠가'를 위해 모아두고 있는 건 없을까. 내가 사라지고 나면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누군가가 치워야 하는 쓰레기가 될 텐데. 이렇게 할아버지가 남겨놓은 '언젠가'들이 미래가 되지 못하고 쓰레기 처리장에 들어가 버리는 것처럼.

P.194

 

 

언젠가를 위해 모아둔 것들이 우리 집에도 많다.

특히나 어릴 때부터 수집하는 게 취미였던 나는, 여전히 버리는 것에는 젬병이다.

웬만해선 버리지 못하는 병에 걸렸는데, 문제는 여기에 사 모으는 병이 더해진 것이다.

자꾸만 쌓인다.

필요해서 사고, 예뻐서 사고, 갖고 싶어서 산다.

그렇게 모은 것들이 점점 자리를 차지하고, 언젠간 다 필요하게 될 거라고 애써 변명하며 껴안고 살아간다.

 

이렇게 다시 죽음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될 때마다 나의 욕심이 부끄러워진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어버리면 내게는 반짝였지만 타인에겐 쓰레기일 뿐인 물건들을 다 어쩌나 싶어진다.

그런 순간에 정리해서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실제로 그렇게 버려지는 것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다시 또 인생무상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의 '언젠가'가 미래가 되지 못하고 쓰레기가 된다는 글에 마음이 시큰거린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미래를 위해 참 많은 것들을 모아뒀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난다.

지금 필요한 것, 지금 가능한 것들에 집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질끈 동여매본다.

 

 

 

나는 충분히 느리게 걷는 사람이라, 그녀와는 반대로 좀 더 속도를 높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뛰었던 그녀에게는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할 테고, 내내 늦장을 부리던 내게는 달려야 할 시간이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기에도 속도가 존재한다.

그녀의 말처럼 내 몸이 견뎌낼 수 있는 속도, 내 마음이 부서지지 않을 속도를 나도 찾아내야겠다.

느릿느릿 걷다가 갑자기 달리면 탈이 나고 말 테니 조금씩 걸음의 속도를 높여보기로 한다.

 

지금 너무 숨차게 달리고 있다면 조금만 천천히 속도를 늦춰보길 바란다.

속도를 조금만 늦춰도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인생은 아니다.

나를 지나치는 풍경, 내가 밟고 선 땅, 나를 감싼 하늘의 색을 바라보는 일.

참 사소한 일인 것 같아도 그것들에 시선을 주고 마음을 주는 순간 삶의 색채가 분명 달라질 것이다.

 

내 앞에서 달리는 이의 번호는 이제 그만 쳐다봤으면 좋겠다.

그는 그만의 속도로 달릴 테고, 나는 나만의 속도로 달리는 게 옳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래희망은 이기적인 년 - 날카로운 직감과 영리한 태도로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캐런 킬거리프.조지아 허드스타크 지음, 오일문 옮김 / 놀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대방이 불쾌한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경험, 다들 있잖아요. 그러면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저 무시하거나 혹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상황을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들이죠. 제대로 방어 한번 못 하고요. 대부분 사건이 지나간 후에야 분노하고 후회하며 기가 막힌 대처법을 떠올리곤 해요.

P.17_ 1장. 지랄을 해야 한다

 

 

아마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방 예의지국인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사회학적으로 강요된 예의부터,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참기의 미학까지 더해져 불쾌한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집에 돌아와 화장실 거울을 보며 뒤늦게 되받아 칠 말을 뱉어내거나 자려고 누워서 이불킥을 하며 씩씩대본 경험들,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예의'없는 사람을 참 싫어하는데, 한편으론 그 빌어먹을 '예의'를 차리느라 상처받고 울게 되는 경험 또한 넘치게 많다.

그동안 나는 그냥 내 성격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 책의 첫 챕터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학습되고 강요된' 행동방식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예의 바르고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너무 심하게 목 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타인의 무례를 견디는 것보다 우리가 무례해지는 것을 훨씬 더 겁내고 어려워하거든요.

P.18_ 1장. 지랄을 해야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기적인 년'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면서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마음으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동안 우리를 얽매고 속박했던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당당하게 '이기적인 년'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우리를 얽매는 그것은 사회적 규범일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일 때도 있고, 내면의 상처일 수도 있다.

각자의 삶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 바로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아마 책을 다 읽고 덮으면 다들 '이기적'이다는 형용사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인 '년'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유 또한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관계에 대해, 상처에 대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지만, 무엇보다도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 가장 크게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좀 새로운 느낌의 페미니즘 에세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많이 상처받고 넘어지고 깨지면서 오늘에 도착한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 준다.

 

 

 

 

우리, 찬란한 실패담을 함께 나눠요. 그래야 어리석었던 과거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어요. 자신을 너무 고통으로 몰아넣지 마세요. 우리 조금만 덜 미치자고요.

P.153_ 4장. 내가 막살아봐서 아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들의 결정은 매번 현명할 수 없었고, 자주 넘어지고 자주 상처받고 오래 아팠을 것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그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칠 때도 있다.

그럴 때 자책하느라 과거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져 스스로를 아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럴 때 '인생 좀 조져본 언니들의 유쾌한 카운슬링'이 필요하다.

 

'나 너보다 더 망가져봤어, 너보다 더 멍청했던 순간이 있었어, 너만큼이나 절망적인 시간을 지나 오늘에 도착한 우리들을 봐, 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꽤 괜찮지 않아? 그런 순간을 지나왔기에 괜찮은 어른으로, 멋진 언니들로 여기에 있는 우리가 보인다면 너의 지금도 분명 괜찮아질 거야!'

 

그녀들이 전해준 찬란한 실패담을 읽고 있노라면, 그 속에 숨은 끝없는 응원이 느껴진다.

형편없었던 선택의 순간마저도 이해받고 위로받게 된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상처들마저 조용히 치유되는 느낌이다.

지금이 엉망이라고 해도 결국은 괜찮아질 거라고, 이미 망가져버린 것만 같은 삶이라고 해도 다시 웃게 될 거라고, 자신들의 상처와 실패를 서슴없이 보여주는 그녀들의 위로에 누구라도 무장해제되어버리지 않을까?

 

상처받아 웅크린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녀들이 단단히 손잡아 준다.

괜찮아, 얼마든지 넘어져도, 얼마든지 실패해도, 진짜 괜찮아!

결국 우리는 웃게 될 거야. 꼭.

 

 

 

 

그녀들이 들려주는 좌절과 실패의 경험 중에서도 유난히 폭풍 공감하며 읽었던 이야기는 첫 챕터에 등장하는 조지아의 이야기였다.

단순하게 멋진 사진을 찍고 싶었던 조지아는 단골손님인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고 반해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차를 타고 사진을 찍기 위한 장소로 이동하면서 그동안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미묘하고 모호한 위험신호를 감지하게 되지만,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인다.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그런 예민함은 상대를 모욕하는 행동일 수 있기에 차마 당장 차를 세워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결국 차는 아주 외딴 산속에서 멈추고, 그녀는 이제 빌어먹을 예의 때문이 아니라 공포심에 사로잡혀 '거절'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야 만다.

사진을 찍는 내내 무섭고 두렵고 싫었지만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만 했고, 결국 그가 요구하는 누드 사진까지 찍어야 했다.

그 남자가 폭력을 사용하거나 강제로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상황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에 이미 함락되어버렸고, 거절했을 때 혹시라도 맞게 될지 모를 '죽음'이 너무 무서워 그가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해 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보다 더 심각하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간신히 돌아온 그녀는 안도감과 수치심에 펑펑 울면서 자책하게 된다.

왜 그 위험 신호들 앞에서 매번 괜찮을 거라고 믿었는지, 상대방에게 무례한 행동이 될까 봐 첫 위험 신호에서 차를 멈추라고 소리 지르지 못했는지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녀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을 경계하며 잠재적 살인마나 성폭행범으로 의심하며 매일을 사는 일이 가능할까?

단지 누군가를 믿었다는 이유로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속인 상대의 잘못이다.

따지고 보면 상대방을 믿는 행위가 나쁜 것도 아닌데, 그 믿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는 사람이 나쁜 것인데 우리 사회는 매번 믿은 여자를 탓한다.

속인 남자를 탓하지 않고.

 

상대방을 믿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다 결국 나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혹은 더 나쁜 상황(성폭행 혹은 살해)에 처하지 않으려고 협조적으로 굴었을 때, 왜 잘못한 상대방을 놔두고 피해자인 여자가 더 욕을 먹고 자책해야 하는가.

조지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들의 잘못된 시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고민하고 분노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마저도 이토록 왜곡되어 있구나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왜 더 강하게 반항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은 사라져야 한다.

그 순간의 공포심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멍청해서, 어리석어서 나쁜 일을 당하는 게 아니다.

가해자가 나쁜 것이지 피해자는 아무 죄가 없다.

 

'나는 왜 그날 거기에 있었을까'

그런 자책은 버리자.

그건 사실 자책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잘못된 반성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많은 순간에 우리는 사회적 폭력에 억압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들이 경험을 통해 일러주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안전하게 자유로울 것,

실컷 방황하고 행복해질 것! 」

띠지에 담긴 이 두 문장은 그래서 더 크게 와닿는다.

 

 

 

 

완벽을 향한 맹신은 두려움 그 자체였어요.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지만 결벽증 환자처럼 거절을 두려워하죠.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스스로 완벽해질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외치는 거예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가장 형편없고 아이러니한 삶의 교훈을 배우게 돼요. '완벽'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

P.131_ 3장. 진짜 미칠 것 같을 때에는

 

 

음, 인생은 능력에 비례해 굴러가지 않아요. 아무리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도 상처받는 일은 늘 있죠. 분명 그럴 거예요. 그건 삶을 얻은 대가예요.

P.132_ 3장. 진짜 미칠 것 같을 때에는

 

 

페미니즘적인 시선과 생각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들을 다시금 생각하고 돌아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녀들은 짐작해서 말하지 않는다.

직접 겪고 구르고 상처받으면서 얻어낸 깨달음들을 전해준다.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하게 삶을 통과하며 울고 웃은 기록이기에 그녀들의 조언은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솔직하고 당당한 그녀들의 이야기에 '진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나요? 그리고 그 태도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P.73 _ 2장. 지만 아는 년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해고 있나.

너무 험하게 쓰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두고 있지는 않은가.

남이 나를 상처 내도록 내버려 두고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지난 상처에 얽매여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한자리에서 오래도록 울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나를 다그치고 혼내고 엄하게 다루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누구보다 다정하게 안고 속삭이며 스스로를 사랑해 주어야 하는 때도 있다.

알면서도 매번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참 부끄럽다.

그래서 그녀가 건넨 질문 앞에 움찔했다.

 

오늘 나는 나를 어떻게 대했는가.

그로 인해 내 삶은 어떤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로 인해 당신의 삶은 온전해지고 있는가.

 

스스로를 홀대하지 않는 내일이 되기를 빌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그때의 하루는 '겨우'라는 부사만 넘쳐났다. 겨우겨우 일어나고, 겨우겨우 밥을 먹고, 겨우겨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가고, 겨우겨우 일을 하고, 겨우겨우 잠들었다. 대구의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알렉스 카츠의 인터뷰 기사도 겨우겨우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하려다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청년 같은 그 뒷모습을 보고 내가 얼마나 '겨우'라는 늪에 빠져 있는지 깨달았다.

_ P.89~90

 

 

지금의 나를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든다면, 이 문장처럼 '겨우겨우' 무언가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겨우겨우'와 비슷한 뜻이지만 어쩐지 더 위태롭게 느껴지는 '간신히'에 가깝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어느 순간 내가 이미 '간신히'의 늪에 빠져있다는 걸 또 '간신히' 발견하게 되었고,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가라앉을 뿐임을 깨달았다.

간신히 일어나고, 간신히 밥을 하고, 간신히 아이들을 돌보고, 간신히 하루를 보내고, 정말 간신히 잠드는 삶.

반쯤 잠든 채 길을 걷는 느낌이랄까.

선명하도록 맑은 정신으로 삶을 바라보고 싶지만 자꾸만 꾸벅꾸벅 조는 일상의 반복.

 

'겨우겨우', '간신히' 무언가를 하는 삶에서 미치도록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그 늪을 벗어나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비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힘을 빼고 다시 천천히 떠오르기 위해, 손을 뻗어 무엇이라도 부여잡고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간신히 책을 읽는다.

 

 

 

마흔은 괜찮지 않았다. 다 뿌리내린 줄 알았는데 그 뿌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깨닫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삼십대를 지나면서 이제야 자리를 잡았나 했는데 마흔이 되니까 이십대처럼 다시 위태로워졌다. 마흔은 그런 나이였다. 다시 흔들리는 나이.

_ P.5

 

 

십대와 이십대를 겪으며 나이 들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 단단해지고, 현명해지고, 분명해지리라 기대했었다.

멍청이 같고 두부처럼 무르고 속빈 수수깡 같던, 젊음 말고는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시절.

약한 바람에도 갈 길을 잃고, 작은 돌멩이에도 툭툭 꺾이고 무너져 버리던 그때에 가장 기대했던 나이가 바로 마흔이었다.

마흔이 되면 무어라도 되어있을 줄 알았다.

명확하고 선명한 삶이 나를 흔들림 없이 걷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곧 마흔이 되는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바보 같고 줏대 없으며 연약하다.

 

나는 지금까지 무얼 하며 살았나 허탈해지던 마음에 그녀가 말을 건넨다.

 

마흔은 그런 나이라고.

다시 흔들리는 나이라고.

연약한 나의 뿌리를 깨닫는 나이라고.

 

 

내게 마흔은 삶의 후광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인생이라는 무대 전체를 비추던 조명이 딸깍, 딸깍 하나씩 사라져가는 때. 조금씩 어두워지고 적당히 흐릿해졌다.

…<중략>…

마흔 이후의 삶은 조명이 꺼지고 암전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마흔을 지나는 길은 단 하나의 핀 조명이 남는 일이었다. 불필요한 요소들이 사라지고 비로소 나 자신에게 몰입하게 되는 때였다.

_ P.7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왔다.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그 모든 곳에 내렸던 나의 뿌리들이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진짜 나만의 땅에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많은 것들에 휘둘리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

마흔쯤 되면 이제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느라 나를 소비하는 일은 그만둬도 되지 않을까.

너무 많은 것들이 나를 함부로 헝클어트리도록 내버려 두었던가 보다.

하나씩 어둠 속에 잠겨들고 나면 오롯이 내가 보이는 시간이 찾아온단다.

마흔에 마주치는 나만의 시간.

오롯이 나를 비추는 조명 속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일.

 

나는 그녀 덕분에 조금 덜 흔들리며 마흔을 맞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벌써 마흔인데 이룬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시간들이 내게 쏟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하나는 미리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흔에 나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여전히 불안과 걱정과 고민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다 보면 몰랐던 나를 뒤늦게 발견하기도 하겠지.

내 안엔 나도 모르는 내가 여전히 많으니까.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마흔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이미 내 맘을 잡아채버렸지만, 딱히 마흔을 위한 위로라고 규정지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흔들림을 느끼는 때라면 그게 어떤 나이라고 해도 우리들에겐 손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삶은 우리를 끝없이 뒤흔든다.

때로는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우리를 스쳐지나 가지만, 가끔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태풍의 힘으로 우리를 내동댕이 치기도 한다.

살면서 넘어지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내 잘못으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밀쳐서 넘어트리기도 한다.

가끔은 삶이 직접 손을 뻗어 우리를 넘어트린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쳐버린 몸과 마음이 한없이 무거울 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그녀는 산책을 한다.

반려견 하이와 함께 매일 동네를 걷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가장 깊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식물이 아닐까 싶다.

싹을 틔우고, 잎을 올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간의 흐름.

그 흐름 속에 계절이 있다.

그녀는 매일매일 산책을 하며 식물을 만나고, 그 식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계절을 배운다.

 

그녀가 그렇게 깨닫게 된 계절의 의미.

식물의 이름과 담긴 뜻을 통해 더 넓게 보고 깊게 느끼는 그녀의 시선이 다정하면서도 따뜻했다.

 

부끄러운 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종종 이기적이고 못된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감추고 싶은 순간의 얼굴들도 말갛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식물의 말간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본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녀가 드러낸 숨기고 싶은 얼굴들마저도 전혀 못나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미 그녀의 얼굴이 식물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봄 풀처럼 보드랍다.

 

 

 

개미와 꿀벌의 도움을 받다가 더 이상 꿀벌이 오지 않으면 스스로 수분 과정 없이 스스로 씨앗을 맺어 생을 연장시킨다. 자가수분, 자가수정. 누구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해낸다. 악조건에 적응하다 보니 이게 가능해졌단다. 처음부터 앙다물고 살아남은 건 아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아무리 해도 어려우면 누구에게 기대기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스스로 해낸다.

올 봄에도 어쨌든 제비꽃은 피었다. 좁은 틈에서 애를 쓰면서도.

_P.36

 

 

 

 

너무 좋거나 너무 슬프거나 너무 화나거나 너무 재미있거나

너무 벅차서 끓는 점을 지나쳐버리기 일쑤인 감정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해 결국 넘치고 졸아들어버린 시간.

삶은 그래서 항상 짜다.

소금기가 있는 땅에서 자란다는 염생식물 갯까치수염.

짜디 짠 인생에도 예쁜 꽃이 필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갯바위의 하얀 꽃

_ P.111

 

 

 

 

'위로'

소란스럽거나 화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조용하고 묵묵하고 다정할수록 더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

 

그녀의 위로는 조금도 소란스럽지 않고, 강하거나 직설적이지도 않다.

식물을 바라보며 떠올린 생각들이 강경하고 딱딱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주 보고, 오래 보고, 깊이 보는 것들은 결국 동화되어 간다.

그녀가 식물을 바라본 시간들이 그녀의 안에 차곡차곡 쌓여 그녀의 내면을 보드랍게 만들어 주었나 보다.

보드라운 위로가 너무 좋아서, 나뭇잎을 쓰다듬듯 책을 쓰다듬어 본다.

 

힘들 때 나는 초록이 많은 곳으로 간다.

그녀에겐 가평이 이방의 도시이겠지만, 내게는 풀보다 아파트가 더 많은 도심이 이방의 세계다.

온통 바다와 풀과 나무와 흙이 있던 곳에서 나고 자란 나는 초록의 위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회색 도심이 더 혹독하다. 그래서 자꾸만 초록으로 손을 뻗는다.

그녀는 회색 도심에서 벗어나 초록의 나라로 가 뿌리를 내렸다.

분명 건강하고 튼튼한 나무가 될 것이다.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리느라 여전히 고통스러운 나도 이방의 이곳에서 기어코 살아가기 위해 애쓰기로 한다.

보도블록의 아주 좁은 틈 사이로도 아름다운 보랏빛 꽃을 틔우는 제비꽃처럼.

나도 작지만 아름다운 연한 보랏빛 꽃을 피워 올리기 위해 애써야겠다.

 

그녀의 초록 일상이 조금은 부럽지만, 여리고 연약해 보이는 식물들이 어느 곳에서든 싹을 틔우고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기에 나도 이곳에서 삶을 버텨본다.

 

 

 

 

'해와 달과 바다, 숲과 노을과 안개에 대해. 비열하거나 비겁하지 않은 삶에 대해. 받아들임과 놓아버림에 대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생에 갖춰야 할 예의에 대해.' 이야기 나눌 줄 아는 작가.

'세상에 아무런 해 없이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가.

 

그 초록의 길들을 같이 걸으며 산책하고 싶다.

계절이 바뀌는 미세한 색감을 함께 발견하고, 계절의 소리를 듣고 음미하며, 계절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우리가 지금 걷는 계절은 삶의 어디쯤인지를 가늠해보며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러다가 다정히, 애쓰는 인생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라피스트
헬레네 플루드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름엔 누가 뭐래도 서늘하고 섬뜩한 스릴러가 제격이다.

하지만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잔혹한 스릴러는 좀 힘들다.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영상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지라 잔인한 장면들을 견디기가 어렵다.

그런 나에게 맞춤형 스릴러가 나타났다!

지적이며 우아한 심리 스릴러.

 

거짓 속에 내팽개쳐진 화자의 생각들을 따라 걷다 보면 나도 함께 혼란스러워지고, 날카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혼란스럽고, 헝클어진 시선들,

진실을 알 수 없어 더듬거리는 손,

당혹스러운 상황의 연속들.

모든 것들이 독자마저 그 혼돈의 상황 속에 내던져놓는다.

 

책장이 줄어들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진실.

나의 짐작들은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렸다.

 

그리고 맞았을 때 보다 틀렸을 때 더 큰 쾌감을 얻는다.

끝을 향할수록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이다.

 

보기 좋게 독자를 따돌리는 우아한 스릴러.

"테라피스트"

 

 

 

 

사라는 심리학자다.

그녀는 결혼한 여자다.

어느 날, 친구들을 만나러 간 남편이 실종된다.

 

친구들과 함께 있다던 남편의 마지막 메시지.

뒤늦은 친구들의 남편의 행방을 묻는 전화.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믿고 싶다.

모든 것이 장난이었다고 말하며 등장하는 남편을 보고 싶다.

 

하지만,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 집에서 남편을 기다린다.

히스테릭해지지 않기 위해, 공연한 상상을 하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시간을 견디고 있다.

 

과연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가 미치기 전에 이 두려움에서 그녀를 구제해 줄 손은 누구의 손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모든 것이 헷갈리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기억에 집착하는 것만 같은 사라의 모습마저도 그 혼란을 가중시키기만 한다.

사라를 믿을 수 있을까?

그녀의 기억은 온전한가?

혹시....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유전병에 대해서 책을 읽는 내내 의심했었다.ㅋㅋ)

 

심리 스릴러라는 이름에 너무도 잘 어울리게 쓰여진 책이라, 피 한 방울 없이 독자를 긴장하게 만들고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어떤 일상의 시간을 읽으면서도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공포영화의 특유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배경음악이 책 전체에 깔려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심지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 음악은 끊이지 않고 흐르다가 엔딩에서 비명으로 바뀐다.

긴장과 긴장의 끝엔 이완이 아니라 희게 질린 비명이 남겨질 뿐이다.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조차 전혀 사라지지 않던 긴장의 시간.

남은 페이지가 점점 줄어들수록 눈치채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테지만, '혹시~'하고 짐작했던 게 맞더라도 마지막에 느껴지는 서늘함은 여전할 것 같다.

북유럽 소설 특유의 서늘함과 만나 더더욱 스릴러의 맛을 한껏 높여준 작품이었다.

 

 

수없이 많은 평범한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장 무서운 건 이거다 - 평범하고 무료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해야 할 날들이. 그토록 무시무시하고 기나긴 날들이.

P.155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거짓말을 하고, 자기만의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그 거짓말과 비밀 사이에 조금씩 어긋나는 진실들.

어떤 진실들은 영영 어둠 속에 있기도 하다.

 

어둠 속에 걸어들어가 진실의 마지막 조각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