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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이기적인 년 - 날카로운 직감과 영리한 태도로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캐런 킬거리프.조지아 허드스타크 지음, 오일문 옮김 / 놀 / 2020년 8월
평점 :

상대방이 불쾌한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경험, 다들 있잖아요. 그러면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저 무시하거나 혹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상황을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들이죠. 제대로 방어 한번 못 하고요. 대부분 사건이 지나간 후에야 분노하고 후회하며 기가 막힌 대처법을 떠올리곤 해요.
P.17_ 1장. 지랄을 해야 한다
아마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방 예의지국인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사회학적으로 강요된 예의부터,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참기의 미학까지 더해져 불쾌한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집에 돌아와 화장실 거울을 보며 뒤늦게 되받아 칠 말을 뱉어내거나 자려고 누워서 이불킥을 하며 씩씩대본 경험들,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예의'없는 사람을 참 싫어하는데, 한편으론 그 빌어먹을 '예의'를 차리느라 상처받고 울게 되는 경험 또한 넘치게 많다.
그동안 나는 그냥 내 성격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 책의 첫 챕터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학습되고 강요된' 행동방식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예의 바르고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너무 심하게 목 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타인의 무례를 견디는 것보다 우리가 무례해지는 것을 훨씬 더 겁내고 어려워하거든요.
P.18_ 1장. 지랄을 해야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기적인 년'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면서 나만 즐거우면 된다는 마음으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동안 우리를 얽매고 속박했던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당당하게 '이기적인 년'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우리를 얽매는 그것은 사회적 규범일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일 때도 있고, 내면의 상처일 수도 있다.
각자의 삶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 바로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아마 책을 다 읽고 덮으면 다들 '이기적'이다는 형용사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인 '년'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유 또한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관계에 대해, 상처에 대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지만, 무엇보다도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 가장 크게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좀 새로운 느낌의 페미니즘 에세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많이 상처받고 넘어지고 깨지면서 오늘에 도착한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 준다.

우리, 찬란한 실패담을 함께 나눠요. 그래야 어리석었던 과거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어요. 자신을 너무 고통으로 몰아넣지 마세요. 우리 조금만 덜 미치자고요.
P.153_ 4장. 내가 막살아봐서 아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들의 결정은 매번 현명할 수 없었고, 자주 넘어지고 자주 상처받고 오래 아팠을 것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그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칠 때도 있다.
그럴 때 자책하느라 과거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져 스스로를 아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럴 때 '인생 좀 조져본 언니들의 유쾌한 카운슬링'이 필요하다.
'나 너보다 더 망가져봤어, 너보다 더 멍청했던 순간이 있었어, 너만큼이나 절망적인 시간을 지나 오늘에 도착한 우리들을 봐, 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꽤 괜찮지 않아? 그런 순간을 지나왔기에 괜찮은 어른으로, 멋진 언니들로 여기에 있는 우리가 보인다면 너의 지금도 분명 괜찮아질 거야!'
그녀들이 전해준 찬란한 실패담을 읽고 있노라면, 그 속에 숨은 끝없는 응원이 느껴진다.
형편없었던 선택의 순간마저도 이해받고 위로받게 된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상처들마저 조용히 치유되는 느낌이다.
지금이 엉망이라고 해도 결국은 괜찮아질 거라고, 이미 망가져버린 것만 같은 삶이라고 해도 다시 웃게 될 거라고, 자신들의 상처와 실패를 서슴없이 보여주는 그녀들의 위로에 누구라도 무장해제되어버리지 않을까?
상처받아 웅크린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녀들이 단단히 손잡아 준다.
괜찮아, 얼마든지 넘어져도, 얼마든지 실패해도, 진짜 괜찮아!
결국 우리는 웃게 될 거야. 꼭.

그녀들이 들려주는 좌절과 실패의 경험 중에서도 유난히 폭풍 공감하며 읽었던 이야기는 첫 챕터에 등장하는 조지아의 이야기였다.
단순하게 멋진 사진을 찍고 싶었던 조지아는 단골손님인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고 반해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차를 타고 사진을 찍기 위한 장소로 이동하면서 그동안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미묘하고 모호한 위험신호를 감지하게 되지만,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인다.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그런 예민함은 상대를 모욕하는 행동일 수 있기에 차마 당장 차를 세워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결국 차는 아주 외딴 산속에서 멈추고, 그녀는 이제 빌어먹을 예의 때문이 아니라 공포심에 사로잡혀 '거절'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야 만다.
사진을 찍는 내내 무섭고 두렵고 싫었지만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만 했고, 결국 그가 요구하는 누드 사진까지 찍어야 했다.
그 남자가 폭력을 사용하거나 강제로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상황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에 이미 함락되어버렸고, 거절했을 때 혹시라도 맞게 될지 모를 '죽음'이 너무 무서워 그가 원하는 대로 포즈를 취해 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보다 더 심각하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간신히 돌아온 그녀는 안도감과 수치심에 펑펑 울면서 자책하게 된다.
왜 그 위험 신호들 앞에서 매번 괜찮을 거라고 믿었는지, 상대방에게 무례한 행동이 될까 봐 첫 위험 신호에서 차를 멈추라고 소리 지르지 못했는지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녀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을 경계하며 잠재적 살인마나 성폭행범으로 의심하며 매일을 사는 일이 가능할까?
단지 누군가를 믿었다는 이유로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속인 상대의 잘못이다.
따지고 보면 상대방을 믿는 행위가 나쁜 것도 아닌데, 그 믿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는 사람이 나쁜 것인데 우리 사회는 매번 믿은 여자를 탓한다.
속인 남자를 탓하지 않고.
상대방을 믿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다 결국 나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혹은 더 나쁜 상황(성폭행 혹은 살해)에 처하지 않으려고 협조적으로 굴었을 때, 왜 잘못한 상대방을 놔두고 피해자인 여자가 더 욕을 먹고 자책해야 하는가.
조지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들의 잘못된 시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고민하고 분노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마저도 이토록 왜곡되어 있구나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왜 더 강하게 반항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은 사라져야 한다.
그 순간의 공포심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멍청해서, 어리석어서 나쁜 일을 당하는 게 아니다.
가해자가 나쁜 것이지 피해자는 아무 죄가 없다.
'나는 왜 그날 거기에 있었을까'
그런 자책은 버리자.
그건 사실 자책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잘못된 반성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많은 순간에 우리는 사회적 폭력에 억압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들이 경험을 통해 일러주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안전하게 자유로울 것,
실컷 방황하고 행복해질 것! 」
띠지에 담긴 이 두 문장은 그래서 더 크게 와닿는다.

완벽을 향한 맹신은 두려움 그 자체였어요.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지만 결벽증 환자처럼 거절을 두려워하죠.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스스로 완벽해질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외치는 거예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가장 형편없고 아이러니한 삶의 교훈을 배우게 돼요. '완벽'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
P.131_ 3장. 진짜 미칠 것 같을 때에는
음, 인생은 능력에 비례해 굴러가지 않아요. 아무리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도 상처받는 일은 늘 있죠. 분명 그럴 거예요. 그건 삶을 얻은 대가예요.
P.132_ 3장. 진짜 미칠 것 같을 때에는
페미니즘적인 시선과 생각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들을 다시금 생각하고 돌아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녀들은 짐작해서 말하지 않는다.
직접 겪고 구르고 상처받으면서 얻어낸 깨달음들을 전해준다.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하게 삶을 통과하며 울고 웃은 기록이기에 그녀들의 조언은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솔직하고 당당한 그녀들의 이야기에 '진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나요? 그리고 그 태도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P.73 _ 2장. 지만 아는 년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해고 있나.
너무 험하게 쓰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두고 있지는 않은가.
남이 나를 상처 내도록 내버려 두고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지난 상처에 얽매여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한자리에서 오래도록 울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나를 다그치고 혼내고 엄하게 다루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누구보다 다정하게 안고 속삭이며 스스로를 사랑해 주어야 하는 때도 있다.
알면서도 매번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참 부끄럽다.
그래서 그녀가 건넨 질문 앞에 움찔했다.
오늘 나는 나를 어떻게 대했는가.
그로 인해 내 삶은 어떤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로 인해 당신의 삶은 온전해지고 있는가.
스스로를 홀대하지 않는 내일이 되기를 빌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