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그때의 하루는 '겨우'라는 부사만 넘쳐났다. 겨우겨우 일어나고, 겨우겨우 밥을 먹고, 겨우겨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가고, 겨우겨우 일을 하고, 겨우겨우 잠들었다. 대구의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알렉스 카츠의 인터뷰 기사도 겨우겨우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하려다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청년 같은 그 뒷모습을 보고 내가 얼마나 '겨우'라는 늪에 빠져 있는지 깨달았다.

_ P.89~90

 

 

지금의 나를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든다면, 이 문장처럼 '겨우겨우' 무언가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겨우겨우'와 비슷한 뜻이지만 어쩐지 더 위태롭게 느껴지는 '간신히'에 가깝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어느 순간 내가 이미 '간신히'의 늪에 빠져있다는 걸 또 '간신히' 발견하게 되었고,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가라앉을 뿐임을 깨달았다.

간신히 일어나고, 간신히 밥을 하고, 간신히 아이들을 돌보고, 간신히 하루를 보내고, 정말 간신히 잠드는 삶.

반쯤 잠든 채 길을 걷는 느낌이랄까.

선명하도록 맑은 정신으로 삶을 바라보고 싶지만 자꾸만 꾸벅꾸벅 조는 일상의 반복.

 

'겨우겨우', '간신히' 무언가를 하는 삶에서 미치도록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그 늪을 벗어나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이미 너무 많은 힘을 소비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힘을 빼고 다시 천천히 떠오르기 위해, 손을 뻗어 무엇이라도 부여잡고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도 간신히 책을 읽는다.

 

 

 

마흔은 괜찮지 않았다. 다 뿌리내린 줄 알았는데 그 뿌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깨닫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삼십대를 지나면서 이제야 자리를 잡았나 했는데 마흔이 되니까 이십대처럼 다시 위태로워졌다. 마흔은 그런 나이였다. 다시 흔들리는 나이.

_ P.5

 

 

십대와 이십대를 겪으며 나이 들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 단단해지고, 현명해지고, 분명해지리라 기대했었다.

멍청이 같고 두부처럼 무르고 속빈 수수깡 같던, 젊음 말고는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시절.

약한 바람에도 갈 길을 잃고, 작은 돌멩이에도 툭툭 꺾이고 무너져 버리던 그때에 가장 기대했던 나이가 바로 마흔이었다.

마흔이 되면 무어라도 되어있을 줄 알았다.

명확하고 선명한 삶이 나를 흔들림 없이 걷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곧 마흔이 되는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바보 같고 줏대 없으며 연약하다.

 

나는 지금까지 무얼 하며 살았나 허탈해지던 마음에 그녀가 말을 건넨다.

 

마흔은 그런 나이라고.

다시 흔들리는 나이라고.

연약한 나의 뿌리를 깨닫는 나이라고.

 

 

내게 마흔은 삶의 후광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인생이라는 무대 전체를 비추던 조명이 딸깍, 딸깍 하나씩 사라져가는 때. 조금씩 어두워지고 적당히 흐릿해졌다.

…<중략>…

마흔 이후의 삶은 조명이 꺼지고 암전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마흔을 지나는 길은 단 하나의 핀 조명이 남는 일이었다. 불필요한 요소들이 사라지고 비로소 나 자신에게 몰입하게 되는 때였다.

_ P.7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왔다.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그 모든 곳에 내렸던 나의 뿌리들이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진짜 나만의 땅에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많은 것들에 휘둘리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

마흔쯤 되면 이제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느라 나를 소비하는 일은 그만둬도 되지 않을까.

너무 많은 것들이 나를 함부로 헝클어트리도록 내버려 두었던가 보다.

하나씩 어둠 속에 잠겨들고 나면 오롯이 내가 보이는 시간이 찾아온단다.

마흔에 마주치는 나만의 시간.

오롯이 나를 비추는 조명 속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일.

 

나는 그녀 덕분에 조금 덜 흔들리며 마흔을 맞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벌써 마흔인데 이룬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시간들이 내게 쏟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하나는 미리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흔에 나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여전히 불안과 걱정과 고민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다 보면 몰랐던 나를 뒤늦게 발견하기도 하겠지.

내 안엔 나도 모르는 내가 여전히 많으니까.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마흔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이미 내 맘을 잡아채버렸지만, 딱히 마흔을 위한 위로라고 규정지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흔들림을 느끼는 때라면 그게 어떤 나이라고 해도 우리들에겐 손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삶은 우리를 끝없이 뒤흔든다.

때로는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우리를 스쳐지나 가지만, 가끔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태풍의 힘으로 우리를 내동댕이 치기도 한다.

살면서 넘어지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내 잘못으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밀쳐서 넘어트리기도 한다.

가끔은 삶이 직접 손을 뻗어 우리를 넘어트린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지만 지쳐버린 몸과 마음이 한없이 무거울 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그녀는 산책을 한다.

반려견 하이와 함께 매일 동네를 걷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가장 깊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식물이 아닐까 싶다.

싹을 틔우고, 잎을 올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간의 흐름.

그 흐름 속에 계절이 있다.

그녀는 매일매일 산책을 하며 식물을 만나고, 그 식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계절을 배운다.

 

그녀가 그렇게 깨닫게 된 계절의 의미.

식물의 이름과 담긴 뜻을 통해 더 넓게 보고 깊게 느끼는 그녀의 시선이 다정하면서도 따뜻했다.

 

부끄러운 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종종 이기적이고 못된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감추고 싶은 순간의 얼굴들도 말갛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식물의 말간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본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녀가 드러낸 숨기고 싶은 얼굴들마저도 전혀 못나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미 그녀의 얼굴이 식물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봄 풀처럼 보드랍다.

 

 

 

개미와 꿀벌의 도움을 받다가 더 이상 꿀벌이 오지 않으면 스스로 수분 과정 없이 스스로 씨앗을 맺어 생을 연장시킨다. 자가수분, 자가수정. 누구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해낸다. 악조건에 적응하다 보니 이게 가능해졌단다. 처음부터 앙다물고 살아남은 건 아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아무리 해도 어려우면 누구에게 기대기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스스로 해낸다.

올 봄에도 어쨌든 제비꽃은 피었다. 좁은 틈에서 애를 쓰면서도.

_P.36

 

 

 

 

너무 좋거나 너무 슬프거나 너무 화나거나 너무 재미있거나

너무 벅차서 끓는 점을 지나쳐버리기 일쑤인 감정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해 결국 넘치고 졸아들어버린 시간.

삶은 그래서 항상 짜다.

소금기가 있는 땅에서 자란다는 염생식물 갯까치수염.

짜디 짠 인생에도 예쁜 꽃이 필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갯바위의 하얀 꽃

_ P.111

 

 

 

 

'위로'

소란스럽거나 화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조용하고 묵묵하고 다정할수록 더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

 

그녀의 위로는 조금도 소란스럽지 않고, 강하거나 직설적이지도 않다.

식물을 바라보며 떠올린 생각들이 강경하고 딱딱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주 보고, 오래 보고, 깊이 보는 것들은 결국 동화되어 간다.

그녀가 식물을 바라본 시간들이 그녀의 안에 차곡차곡 쌓여 그녀의 내면을 보드랍게 만들어 주었나 보다.

보드라운 위로가 너무 좋아서, 나뭇잎을 쓰다듬듯 책을 쓰다듬어 본다.

 

힘들 때 나는 초록이 많은 곳으로 간다.

그녀에겐 가평이 이방의 도시이겠지만, 내게는 풀보다 아파트가 더 많은 도심이 이방의 세계다.

온통 바다와 풀과 나무와 흙이 있던 곳에서 나고 자란 나는 초록의 위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회색 도심이 더 혹독하다. 그래서 자꾸만 초록으로 손을 뻗는다.

그녀는 회색 도심에서 벗어나 초록의 나라로 가 뿌리를 내렸다.

분명 건강하고 튼튼한 나무가 될 것이다.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리느라 여전히 고통스러운 나도 이방의 이곳에서 기어코 살아가기 위해 애쓰기로 한다.

보도블록의 아주 좁은 틈 사이로도 아름다운 보랏빛 꽃을 틔우는 제비꽃처럼.

나도 작지만 아름다운 연한 보랏빛 꽃을 피워 올리기 위해 애써야겠다.

 

그녀의 초록 일상이 조금은 부럽지만, 여리고 연약해 보이는 식물들이 어느 곳에서든 싹을 틔우고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기에 나도 이곳에서 삶을 버텨본다.

 

 

 

 

'해와 달과 바다, 숲과 노을과 안개에 대해. 비열하거나 비겁하지 않은 삶에 대해. 받아들임과 놓아버림에 대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생에 갖춰야 할 예의에 대해.' 이야기 나눌 줄 아는 작가.

'세상에 아무런 해 없이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가.

 

그 초록의 길들을 같이 걸으며 산책하고 싶다.

계절이 바뀌는 미세한 색감을 함께 발견하고, 계절의 소리를 듣고 음미하며, 계절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우리가 지금 걷는 계절은 삶의 어디쯤인지를 가늠해보며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러다가 다정히, 애쓰는 인생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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