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이상한 나라 - 꾸준한 행복과 자존감을 찾아가는 심리 여행
송형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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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지나오며 나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했었다.
누구보다 격렬하게, 뜨겁게, 나 스스로를 알고자 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것을 잘 하는지... 나는 참 열심히도 탐색하고 고민하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치열한 시간들을 지나고 나서, 스스로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자만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하고, 만나는 사람들이 다양해지고, 삶의 리듬이 바뀌면서 나라는 사람 또한 내내 끝없이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가 보다.
나도 모르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해두고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했음을 요즘 몸소 느끼고 있다.
내가 알던 나와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나를 만난다.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놀라게 되고, 스스로의 행동에 생경함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 내가 낯선 타인 같다.

내게는 다시 나를 탐험할 기회가 필요했다.
다시 내 안을 들여다보며 내가 놓치고 있었던 나와 대면해야만 했다.
끝없이 늘어지고, 한없이 게을러지고, 자주 우울해지는 요즘의 나.
무엇에도 제대로 마음을 빼앗기지 못하는, 열정이 소멸되어 버린 내가 나조차도 무겁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끝없는 자책과 버려지지 않는 슬픔 같은 것들이 나를 자꾸만 한없이 가라앉게 만든다.
오로지 슬픔 때문이었나, 그것마저 속임수처럼 느껴지려고 한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떤 '나'가 나를 이렇게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기어코 찾아내어 만나야만 했다.
어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오늘에 멈춰있지 않고,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나라는 이상한 나라'라는 이 책이 내게 탐험서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내 속을 들여다보고,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치유의 시간이 되어 주기를 기대했다.

이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1부가 인상적이었다.
'나 들여다보기 연습'이라는 명제로 쓰인 이 장은 나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한 연습을 이야기한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려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본능이 너무나도 커서, 이를 거스르고 자기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참 쉽지가 않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했네'라고 깨닫더라도, 불과 며칠 후에 ' 그 생각조차 나의 위선이었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끝없이 자기를 불편하게 하며 재분석하는 것만이 객관화라는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p. 056~057

 

 

1장 나를 푸는 공식에서 설명하는 방법은 나를 제 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자기방어기제가 발동하고야 마는 수많은 상황들에서 좀 더 정확히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한 걸음이 아니라 열 걸음쯤은 떨어져 나를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나'가 아니라 타인이라고 가정하고 나를 바라볼 때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조금은 낯설고 낯 뜨거운, 몰랐던 '나'가 그곳에 있다.

이 장을 읽으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시선이지만,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를 가져야겠구나 생각하고는 했다.
나는 내면은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지만 누군가를 볼 때는 투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상대의 행동을 확대 해석하기도 싫고, 단점을 찾아내 싫은 감정을 가지고 싶지도 않다.
적당히 모른 체, 적당히 묵인하면서, 블러 효과를 듬뿍 덧씌워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곤 한다.
부러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예민한 사람은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기 쉽고, 반대로 상대의 자그마한 말이나 감정 변화에도 상처받기 쉬우니까 스스로를 보호하는 나름의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상대에게 너그러워지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착하지도 않으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무뎌지기 위해서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 어쩔 수 없는 나의 내면의 예민함이 완전히 뭉툭해지진 못했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뭉툭하고 무던해졌다.
한데 이제는 그 뭉툭한 시선이 종종 문제가 되곤 한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다 보니, 실제로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그저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애초에 심플할 수가 없는 복잡한 관계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여자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낭패를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은 대체로 복잡한 동물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여자는 더더욱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결을 가진 집단이기에 그 속에서 완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시선이 되려 필요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다는 그 사람의 행동을, 말끝에 남은 침묵을 제대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나를 푸는 공식'에서 제시해주는 나를 타인으로 인식하며 바라보는 방법들 중에는 그 사람의 말 너머의 숨겨진 진심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것도 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말 너머의 진심을 해석하지 않으려는, 타인을 바라보는 흐려진 나의 시선에 대한 고민이 일었다.
일례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는 한마디 말에 수많은 사족이 딸려 있다고 의심하곤 한다.
그 속에 숨겨지는 진심이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고심하고 고심하다가 결국엔 왜곡과 왜곡을 거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고서야 해석을 마치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별 뜻 없던 말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무기로 변신해서 상대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되려 시어머니의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곤 했었는데, 돌려서 은근히 한 말들을(그게 나쁜 말이든 좋은 말이든) 내가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심플해지고 단순해지려고 무던히 노력한 결과가 무심하고 남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나를 자꾸 옮겨가고 있다.
그 사람이 말속에 숨긴 진짜 의미, 행동에서 내보이는 감정들을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보고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뾰족한 것도 남을 찌를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뭉툭한 것 또한 좋은 것 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오히려 그것에 대한 반대 동기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많아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실은 어릴 때 자신의 왜소함을 감추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은 경우도 있고, 돈에 매우 열중하지만 그 이유가 어릴 때의 가난에 기인하는 경우도 있다. 과도한 집착이 그의 빈곤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다.
_ p.085

 

 

나는 도대체 왜 책을 이토록 넘치게 사 모으는 것일까.
왜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몇 배는 빠른 것일까.
책이 쌓여 갈수록, 안 읽은 책이 늘어 날 수록, 나는 자꾸만 고민하게 된다.
지적 허영심이 강해서라는 게 보편적인 논리인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내겐 그닥 지적 허영심이랄 게 없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우주보다 더 많다는 걸 어디서도 숨기지 않고, 누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샘나지도 않으며, 기어코 아는 척을 해야만 하는 성격도 아니다.
대부분 상대의 이야기나 설명에 '아~ 그런 거였군요'하며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내 역할이니까.
심지어 평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책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도 않는다.

그래서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이라는 게 책 쇼핑 중독이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하거나, 슬플 때 본능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책을 사는 것이다.
사는 행위 자체로 위안을 얻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의 결핍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이 책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나의 어떤 빈곤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일까.
어릴 적 책을 너무 좋아했던 나는 친구들의 책장을 부러워하곤 했었다.
그때의 책에 대한 결핍이 지금 이렇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크게 아픈 것은 아닌데 항상 "몸이 안 좋다"라는 말을 달고 다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가족에 대한 불만이 모두 "몸이 안 좋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인데,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족들은 모두 내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행여 가족 중 누군가가 치료를 하자고 하면 "의사들은 내 병을 몰라"라고 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으며, 운동이나 금주를 권하면 "내가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운동을 하고 술을 끊겠냐"라고 한다. 이들은 "몸이 안 좋다"는 말을 이용해 적당히 가족에게 의존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사실, 내 얘기).
_ p.126

 

 

책을 읽다가 뜨끔했다.
하하.
'몸이 안 좋다'는 나의 전매특허 대사다.
한 달의 절반 이상은 늘 몸이 안 좋다. ( 그렇다고 딱히 심각한 질병이 있지도 않다 )
실제로 호르몬의 영향으로 정말 컨디션이 엉망진창인 사람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게 의존하고 싶고 편하게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2차 이득'을 노린 '환자 역할'은 아니었을까.
심리적 요인으로도 몸이 실제로 아파오는 나란 사람은 굉장히 의존적인 사람인가 보다.
딱히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몸이 안 좋다'라는 말로 상대를 휘두르고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깔려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도 모르던 나의 민낯의 한 부분은 아닐는지.

 

 

 

 

2부 '나라는 이상한 나라로'에서는 내 속에 살고 있는 다양한 나에 대해서 말한다.
다중인격이 겉으로 표출되어 보이는 소수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 속에는 다양한 감정과 그만큼 다양한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 속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와 늙은 노인과 한없이 예민한 자아와 분노에 가득 찬 자아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인정하고 다독이며 가장 지혜로운 자아가 중심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끝없이 스스로를 관찰하고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영화 <배트맨>에서 배트맨이 자기가 제일 무서워하는 박쥐인간으로 변신해 두려움을 없앴듯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평소보다 훨씬 더 당당해졌다면 그 모습은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_ p.169

 

 

방어기제 중 '적대적 동일시' '적대자와의 동일시'라는 것이 있다.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적대시했거나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동일시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 강하고 잔인한 적과 싸우려면 나도 그렇게 되어야 하며, 상대가 괴물이라면 나도 괴물이 되어야 한다."

…<중략>… 평등을 주장하던 사람이 자기 의견과 맞지 않으면 심각한 차별적 발언을 한다든가, 사회 정의에 집착하던 사람이 개인 생활에서는 가족을 괴롭히는 가해자인 것도 비슷한 경우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이 이기적인 권력욕과 피해 의식에서 출발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권력 행사에 관심 많은 사람은 무슨 이유로든 권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_ p.228~229

 

어떤 상황에서건 내가 두려워하고 싫어했던 모습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카피해서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움찔해지고 만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어떤 행동을 사실은 내가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부끄러운가.
책 속의 극단적인 예시가 아니더라도 실제로 소소하게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카피하고는 한다.
상대의 날카로운 말투가 매번 싫었는데 나도 모르게 똑같은 말투로 대꾸하고 있다든지, 지나치게 제멋대로라서 피곤하다고 느낀 사람의 행동을 내가 하고 있다든지, 상대의 어떤 행동이 창피했는데 생각해보니 내게도 있는 모습이라든지.
생각해보면 그런 순간들은 너무도 많다.
특히나 나처럼 주위 사람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사람은 더하다.
의식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는 하니까.
가까운 사람을 닮아 간다는 것.
왠지 친근하고 다정하게 느껴지지만, 그 행동이나 말투가 좋은 것이었을 때나 긍정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 같다.
상대의 단점을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다면 인지하게 된 순간 멈춰 서도록 노력해야겠다.
친구를 잘 사귀라는 옛말이 이런 순간에도 적용이 되다니.
나이 들수록 생각이 고정되어 가는 것은 서글픈 일이나, 나이 들수록 옛 어른 말씀이 그른 게 없다 싶어지는 순간 또한 자꾸만 만나게 된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면, 최대한 좋은 행동을 카피하도록 노력해보아야겠다.

 

 

 

 

 

3부 '마음의 영토를 한 뼘 더 넓히려면'에서는 부모가 끼치는 영향과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꼬리에 꼬리는 무는 질문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심리서라고 하면 조금 더 복잡하거나 어려워 읽다가 재미를 놓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가독성이 무척 좋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가 말하는 질문법에 따라 혼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거나, 스스로를 관찰해보고, 나에 대한 의문을 품느라고 책을 읽다가 여러 번 덮어놓고는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독성이 좋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쉽고 가깝게 심리서가 길잡이가 되어 준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좀 덜 힘겨운 여정이 되지 않을까?
좀 더 다양한 심리서들을 읽고 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끝없이 '나'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성장해야 한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내내 울고만 있는 나를 다독여주고 위로해주어야겠다.
시야의 폭이 좁아 내 감정에만 치중한 어린아이에게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줘야겠고, 지쳐서 쓰러져 있는 나에게는 무엇이 너를 지치게 했는지 묻고 들어줘야겠다.
내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나를 찾아서 여행을 떠나자.
이런 '나 들여다보기'가 지금 멈춰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라는 이상한 나라로 지금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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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아내로부터 3만 킬로미터씩 멀어진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사랑과 야망에 관한 우주 오디세이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는 혜성 하나가 태양계로 진입하면서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이 특이한 현상을 '초프라'라고 이름 짓고, 세계 각국은 저마다 지구로부터 4개월 떨어진 곳에서 있는 이 먼지 입자를 분석해 우주를 연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인구 천만의 작은 나라 체코에도 기회가 온다.
마침내, 체코의 외딴 마을에서 조부모와 함께 살아가던 야쿠프가 세계의 이목이 쏠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이 위험하고 고독한 여정은 그가 꿈꾸던 영웅이 되는 길이자,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데 일조했던 아버지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기회를 잡으려면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아내 렌카를 떠나야 한다. 야쿠프는 아버지 때문에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고 영웅이 되겠따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당분간 렌카와 헤어지기로 결심하는데....

 

 

자, 책 뒤표지의 소개 글을 읽어 보자.
다들 우주 SF 소설을 상상하게 되지 않는가?
물론 과학적 재미를 극대화한 글보다는 심리를 크게 다룬 것 같은 느낌을 받긴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마션'처럼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겨진 남자의 이야기가 주일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글의 핵심은 책 표지 아랫부분에 적힌 저 두 문장에 더 가깝다.



역사, 사회비평, 풍자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
아서 클라크와 밀란 쿤데라를 우주에서 읽는 듯하다.
-<라이브러리 저널>

그렇다.
나도 모르게 밀란 쿤데라를 떠올렸다.
연애소설의 탈을 쓴 철학서.
사랑이 주 테마인 듯 보여도 결국엔 우리들 내면의 자아 대해 말하는 소설.
스토리를 이해했다고 해도 그 책을 완벽히 읽었는지 모호해지는 소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내게는 그렇다.

이 책은 굳이 비교를 하자면 밀란 쿤데라의 글보다는 조금 더 소프트하다.
좀 더 친절하고, 비교적 친밀하게 속내를 드러내준다.
그럼에도 결국 이 소설 또한 SF의 탈을 쓴 철학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완벽한 속죄를 위해 아버지의 죄로부터, 체코로부터, 지구로부터, 우주까지 도망쳐야 했던 주인공은 그래서 전 세계의 영웅이 되어 과연 그 원죄로부터 완벽히 벗어날 수 있었던가.
무성 영화 같은 무중력의 우주 공간을 떠다니며 완벽한 안도를 얻었던가.
온갖 중력의 힘을 버티며 살아내야 하는 지구에서 그는 '영웅'으로 자유로워졌을까, '죽음'으로 자유로워졌을까, 아니면 어떤 자유에도 결국 가닿지 못했을까.
책을 읽으면서도 읽는 내내 자꾸만 머릿속에 그런 질문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덕분에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었던 것만큼 오랜 시간과 많은 사유들이 나를 침범했다.

그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조차 모호하다.
우주에서도 지구에서도 그의 이야기들은 어쩐지 몽롱한 구석이 존재한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읽은 나까지 몽롱하게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독자가 얻을 것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밝히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모호한 모든 순간, 모든 공간에서 그가 과연 구원받았는지,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지,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보는 데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내가 사는 도시를 알고 싶은, 도시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싶은 뜻밖의 충동을 느낀다. 도시 사람들이 모두 의지에 반해 모이게 되는, 인간들이 사는 거대한 도시라면 어디에나 있는 후유증과도 같은 공간에서 도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충동. 도시의 모순이 서로 만나 전혀 새로운 생물권을 만들어 내는, 누구나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생존 기술을 터득해야 하는 장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벤체슬라브 광장으로 간다.
p. 214~215

 

 

이 책이 밀란 쿤데라의 글을 닮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체코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특히 두 작품 모두 '프라하의 봄'이나 '벨벳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간 속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체코를 모른다.
그들의 역사도 사상도 삶의 모습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프라하는 그저 드라마 속 아름다운 배경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 아름다운 배경이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지고, 보존되어 왔는지 전혀 모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배경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
가보지 못한 나라의 낯선 역사 속에서 나는 내내 그저 낯설어했었다.
주인공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를, 역사를, 배경을 이해해야 했지만 내게는 너무도 낯선 언어였을 뿐이었다.

이 책 속에도 같은 시간의 역사가 깔려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같은 시간을 이야기하는 이 책 속의 체코의 역사는 낯설지가 않다.
실제 사건에 대한 정보나 이해는 여전히 없다시피 한 상태이지만,
체코가 견뎌온 시간들에 자꾸만 한국의 지나간 시간들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를 되찾으려고 그렇게 많은 목숨들이 사라져갔고, 그렇게 다시 찾은 나라에서 다시 만난 독재 정권의 만행들.
그 속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죽어간 아까운 목숨들.

다른 나라 다른 역사 속에서도 우리들은 다 같은 꿈을 꾸었던가.
억압 속에서도 기어코 자유를 갈망하고,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가.

 

 

남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으며 술집에 가서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뭔가 말을 잘못 해서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쓸 것인지 아니면 집에 돌아가 채널이 하나뿐인 텔레비전과 한 가지 사상만으로 쓰여진 책들이 들어찬 책장, 침묵을 끊을 수 없는 연장들과 마주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p. 112

 

사회주의 독재 체제 속에서 체코의 억눌린 국민들의 모습들이,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의 만행에 희생된 우리 선조들을 생각나게 했다.
체코를 모르니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정서를 먼저 끄집어 내게 되는 모양이다.
이 책 덕분에 체코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검색도 해보고, 체코의 지난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투마와 자이츠를, 방에 앉아서 세계의 미래를 주무르는 모든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팻말을 들고 어슬렁거리면서 체제와 맞서는, 변화를 바란다는, 희망을 찾는다는 구호를 외쳤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나는 밤이 되면 우리나라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이 지구 전체에 울려 퍼지고, 스스로 길을 잃은 사람들의 착취와 욕심을 떨쳐냈던 벨벳혁명 때처럼 인파가 수천 명으로 불어나기를 바랐다. 끊임없는 혼란을 없애기로 결심한 사람들, 신발을 신고 손에 팻말을 들고 텔레비전을 조금 들여다보는 대신 자갈이 깔린 도로 주변에서 행진하기로 마음먹은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혁명의 움직임이자 빅뱅을 야기하는 하나의 알갱이였다. 이 세상의 운명을 이런 사람들 손에 맡겨야 한다고 확신했다.
p.391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촛불 집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건 국민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끊임없이 잘못을 지적하고, 스스로 길을 잃은 사람들을 꾸짖어 제대로 된 길을 찾아주는 것 또한 우리의 일인 것이다.
잘못을 알고 뉘우치고 스스로 바른길을 찾아 움직이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 삶의 안녕을 위해, 안전한 나라를 위해, 모두의 미래를 위해 건네준 권력이 자꾸만 허투루 쓰여질때 씁쓸해진다.

지금 이곳에서 안녕히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죽음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체코의 오늘이, 대한민국의 오늘이,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는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사랑으로 넘어가 보자.
무엇이 야쿠프를 하나뿐인 아내를 홀로 두고 기어코 우주로 날아가게 만들었는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내 생각엔 브랜디 때문인 것 같았는데, 브랜디 덕분에 나는 박사에게 아버지에 관해서, 우리 가족의 저주에 관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 그 자체가 되고 싶은 욕망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 가문의 이름을 다시 호의적으로 돌리고픈 욕망에 관해서 말할 뻔했다. …중략…
열심히 노력했지만 미치지 못한 것과, 비보이 박사가 경고한 대로 너무 지나친 사람이 되어 야망으로 인생을 망치는 것의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하벨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정말 불행했을까?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존경했다. 그런 점 어딘가에 행복은 반드시 존재했다. p.212~213

 

 

벨벳혁명을 기점으로 공산당의 비밀경찰이었던 아버지는 온 국민이 처단해야 할 악이 되었다.
그리고 야쿠프는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부모님이 죽고도 그는 아버지의 원죄를 뒤집어쓴 채 삶을 살아야만 했다.
손가락질 받고 욕을 먹어야 했다.
아버지 때문에 삶을 망쳐버린 '신발 사내'의 등장은 야쿠프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그는 벗어나야 했다.
아버지의 악행의 그림자로부터 빛으로 나오기를 소망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림자를 떼어내고 싶었다.
우주에 가야만 했다..
모두가 영웅으로 그를 우러러 보고, 죽음을 무릅쓰고 얻어올 우주 먼지의 샘플이 그를 모든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를 허락할 것이다.
그것은 그로써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미래였다.
지금 당장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원죄에서 벗어나는 것, 좋은 사람으로 남겨지는 것, 모든 사람이 우러르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은 그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이런 상황은 정확히 그 사람이 기대하던 거야. 트라우마의 부활에다 두려움의 인격화라니, 이 빌어먹을 자식." p.68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는 듯 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주로 날아간 야쿠프.
그는 외로움과 조우한다.
아내는 그를 떠나버렸다.
드넓은 우주에서 작은 얀후스호 안에 그저 혼자가 된 야쿠프.
그는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환상을 경험한다.
우주의 적막, 무중력의 세계 속에서 낯선 존재와 마주친다.
그와 우주의 시간을 함께 했던 존재는 실제였을까, 야쿠프의 또 다른 자아였을까.
환상이라기엔 너무 선명하고, 실재한다기엔 너무 거짓말 같은 존재.
그를 하누시라고 명명한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걱정이나 두려움과는 다른, 이상한 감정이었다. 내 가슴은 항상 아스팔트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묵직했다. 지금 나는 때를 기다리는 시체였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워지면 몸은 성가신 영혼 없이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고대한다. 사람의 몸이란 이렇게 간단하다. 맥박이 뛰고 분비하고 삐걱거리면서 한 박자, 두 박자씩 한 시간 또 한 시간을 채워간다. 몸은 노동자이며 영혼은 탄압을 일삼았다.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키자. 아버지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p.186

 

 

우주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야쿠프.
그는 살고 싶었을까, 죽고 싶었을까.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던 그는 정말로 살아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던 건지, 아니면 죽음으로라도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더 간절히 바랐던 건지 알 수가 없다.
그토록 집착하고야 말았던 것들을 야쿠프는 놓았을까?

 

 

그림 속에 우리의 모든 삶이 존재했다. 떠나겠다는 나의 선택. 렌카보다 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나의 선택. 나는 먼지를 선택했고, 우주를 선택했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의 여행을 선택했고, 사람들 머리 위에서 살기를 선택했고, 더 높은 곳에서의 임무를 선택했고, 상징을 선택했고, 구원을 움켜잡기를 선택했다.
나는 렌카를 선택하지 않았다.
p.355

 

 

야쿠프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구원은 움켜잡았니?
그래서 행복해졌니?
그래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어?
먼지를 선택해서, 우주를 선택해서, 어딘지 모를 곳으로의 여행을 선택해서, 사람들 머리 위에 살게 되어서, 더 높은 곳의 임무를 선택해서, 영웅이 되어서..... 그래서 네가 얻은 건 무엇이니?

렌카를 버리고 선택한 삶이 네가 진짜로 원하던 그 삶이 맞아?

마당 쪽으로 열린 창문 밖으로 신발을 내던졌다. 신발은 돌벽을 따라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다가 마찬가지로 망각이라는 필연을 마주하고는 산산조각이 나서 풀밭 흙 위에 뒤집어졌다. 마침내 신발에서 불행이 빠져나가고 목적이 사라졌다.
p. 387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중력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마침내 신발에서 불행이 빠져나갔다.

그래서 행복이 돌아왔을까?
불행이 빠져나간 적막 속에는 무엇이 남겨졌을까.
홀가분함이었을까.
끝을 모를 허무는 아니었을까.

 

 

 

 

우주 속 작은 행성 지구,
그 행성에서 고작 몇 평의 땅에 세 들어 사는 우리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드넓은 우주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까.
우주의 광활한 시간을 감히 짐작조차 못하는, 고작 100년 정도의 삶을 살다가는 존재들.
그 시간을 모아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지구를 전부라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들.
우주에선 그저 먼지 한 톨보다 더 작고 하찮은 존재인 것을.

지구에서 이토록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들의 존재가 우스워졌다.
내가 아는 곳은 이곳, 지구에서도 작고 작은 나라 한국, 거기에서도 또 작은 하나의 도시, 내가 발 딛고 선 곳에서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삶을 살아간다.
고작 전생이나 후생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생의 긴 꼬리를 이어보기도 하면서.
지구의 대기를 뚫고 더 머나먼 곳으로 나아가 진짜 우주, 상상할 수도 없이 넓고 넓은 세계는 알지도 못한 채,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며 살고 있다.

우주에는 오로지 생과 사, 그 두 가지만이 존재한다.
탄생과 소멸.
그 속에서 우리의 쓸모없는 욕심들, 무기력한 희망 같은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많은 생의 의미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는 무거운 의미들이 숨통을 조여온다.


숨을 쉬고 싶을 때, 모든 무거운 것들로부터 가벼워지고 싶을 때, 생의 의미가 지나치게 숨이 막힐 때,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우주로 날아간 남자를 만나보자.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는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잃어보아야 가치를 알 수 있다.
p. 41 / p.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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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마우스, 오늘부터 멋진 인생이 시작될 거야 - 작은 용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미키 마우스 원작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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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시리즈 푸우도 쉽고 단순하게 ...하지만 그래서 더 명료하고 분명하게 위로를 받는 지점이 있었는데 이번엔 미키로 돌아왔군요.ㅎ
그들이 전해주는 말도 말이지만 친근한 어린시절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기분에 더 반가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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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 허난설헌 시선집
나태주 옮김, 혜강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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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난설헌의 이야기가 한 권의 소설이 되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시가 한 권의 시집으로 묶였다.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 덕분에 이 책이 출간되었는지, 마침 출간 예정이었던 책이 드라마를 만나 좀 더 쉽게 독자를 만나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반갑다.
시대를 잘못 만나 서글픈 생을 마감해야 했던 한 여인의 삶을, 그녀의 시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으니 어떤 이유에서건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필 여자에게 너무도 가혹하기만 했던 시대를 만나, 넘치는 글재주가 되려 독이 되었던 그녀, 난설헌.


그녀의 시를 요즘의 언어로 나태주 시인이 편역했다.
거기에 일러스트레이터 혜강의 고운 그림이 더해져 운치를 살려준다.

 

 

 

시를 읽는 즐거움에 그림을 보는 재미를 더해주어 시집 읽는 일이 훨씬 더 행복했다.
때로는 예쁘고 고운 꽃그림을 보려고 시집을 꺼내도 좋을 듯하다.
시가 시 자체로도 빛나겠지만, 시를 닮은 고운 그림과 만나면 읽는 이의 눈도 마음도 더 즐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어쩜 이렇게 딱 맞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낸 건지, 출판사의 센스에 엄지 척.^^

 

 

 

 

그녀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짤막하게나마 알아볼 필요가 있을듯하다.
감사하게도 편역을 맡은 나태주 시인께서 발문에 그녀의 삶과 시에 대한 글을 몇 장에 걸쳐 적어두셨다.
2011년에 난설헌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도 그녀의 삶이 다뤄진 적이 있지만, '허난설헌'의 이름은 다 알면서 그녀의 삶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듯하다.
'글재주가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시댁에서 핍박을 받아 불행한 삶을 살다가 요절한 비운의 여인' 정도가 난설헌의 이름으로 떠오르는 단편적인 정보 아닐까.

그녀의 삶 속으로 한 발 더 들어서 보고 싶다면, 그녀가 남긴 글 속으로 한 발 내디뎌 보는 건 어떨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시를 쓰고, 어떤 마음들을 시에 남겨 두었는지, 그녀의 마음결을 따라 천천히 거닐어 본다.

 

 

 

 

여인의 수줍은 마음과 당돌한 고백이 담겨있어 깜짝 놀랐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좀 더 수동적이고, 질투를 드러내는 게 죄악인 걸로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참고 인내하는 게 익숙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던가 보다.
그 시대나 지금 시대나 여자들의 마음이란 똑같구나 싶어서 설핏 웃음도 난다.
칠거지악이 사라진 시대에 태어나, 솔직한 생각과 마음들을 꺼내놓고 살고 있다는데 감사함도 밀려온다.
시로 자신의 마음을 은근히 드러낸 난설헌의 센스 또한 품격이 느껴진다.
뭐랄까 좀 더 고급스런 투정이라고 할까, 은근한 고백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의 남편 성립이 조금만 덜 옹졸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서신을 남편과 주고받으며 얼마나 어여쁘게 살았을까 싶어서 안타까움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남자고 여자고 배우자를 잘 만나야 삶이 온전해지는 법인가 보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가 혼인 전 가장 다정히 지냈던 둘째 오라버니에 대한 그리움은 애잔하다.
둘째 오라버니 하곡은 난설헌의 스승이었고 시문의 동료였다고 한다.
중국에 다녀오는 길에 두보의 시집을 구해 여동생에게 선물해 줄 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하곡.
그런 오라버니가 귀양을 갔으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미어지고 슬펐을지 짐작해 볼 만하다.

비단, 오라버니에게 쓰인 시에서만 쓸쓸한 애잔함이 묻어나는 것은 아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지내며 지은 듯한 시는 더욱 쓸쓸하고 서글프다.
그런 시의 끝맺음에는 늘 눈물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결혼생활이 외롭고 힘들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안타까운 시들이 여럿이다.
그 슬픔들을 홀로 시로써 달랬을 그녀를 생각하면 안쓰러움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사랑받아 마땅한 이에게 내쳐지는 슬픔은 여자라면 누구라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난설헌의 그 안타깝고 안타까운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그녀의 마지막 시로 이 시집은 끝맺음 하고 있다.
그녀는 꿈에 본 풍경을 시로 짓고, 스물일곱의 꽃 같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녀가 더 오랜 세월 삶을 영위해갈 수 있었다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 다채로워지고 농후해졌을 그녀의 시가 얼마나 많았을지를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들은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다.
기어코 그녀의 재능을 죽여버린 그 시대가 원망스럽다.

짧은 생을 살다간 그녀의 시들이 당시의 중국으로 건너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대목에선 어쩐지 서글퍼졌다.
태어난 나라에서, 조선의 시인으로 더 사랑받지 못함이 분해서다.
여인의 글재주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에 대한 원망 때문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뛰어나면 안 되는 그 빌어먹을 시대 때문에, 기록에도 남지 못한 채 쓰러져 간 수많은 꽃 같은 목숨이 안타까워 한숨이 난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났고,
많고 많은 역사가 쓰여졌다.
그 속에서 우리나라는 얼마나 변했나.
남자보다 뛰어난 여자의 재능이 여자라는 이유로 저평가되는 시대는 정말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난설헌을 죽인 것은 조선일까, 한국일까.
여전히 어딘가에서 난설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이 서늘해진다.

 

 

 

 

책의 마지막에 한시 원문이 실려있다.

우리가 지나온 어느 시절에, 한문을 등한시하며 학교에서도 한문이 선택교과였던 때가 있었다.
하필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덕분에 나는 한문을 배우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 조우하게 된 한문은 나에게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초를 건너뛰고, 획 그리는 법도 모른 채 강제로 외워야 했던 한문은 그냥 그림마냥 따라 그리기 일쑤였다.
덕분에 지금도 한문 울렁증이 있다.
영어보다 한문이 더 싫고, 어렵고, 외우고 싶지도 않은 언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문을 모른다는 건, 얼마나 난감한 일인지.
시시때때로 굉장히 자주, 나는 바보가 되곤 했다.
한글의 절반은 한문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한글 표현의 많은 부분이 한문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글자가 한글이 아닌 한문 자체로 쓰여있는 경우엔 그냥 딱, 바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한시 원문이 궁금했었다.
분명 한문으로 쓰인 시일 텐데, 글자를 맞춰서 뜻을 고르고, 운율에 맞춰 적힌 시일 텐데, 그것은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감사하게도 한시 원문에도 한문과 한글이 같이 적혀있고,
더 감사하게도 시집에는 나태주 님의 편역으로 아예 한글 시로 탈바꿈한 시가 실려있으니
한문 무식자에게도 한시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어주었다.
물론 한시의 진짜 맛을 알아 원문을 읽으며 감탄하고 또 감탄할 수 있다면 참 좋았겠지만,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 나태주 시인의 편역으로 한시를 훔쳐 읽어 본다.

그래도 괜히 한시 원문 또한 따라 읽어본다.
괜히 낱자의 뜻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 속에 적혀있을 난설헌의 마음을 좀 더 가까이 더듬어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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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엔 조그만 사랑이 반짝이누나
나태주 엮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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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시는 유명하기보다는 유용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시를 읽고 바라보는 시인이, 이 시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지친 마음에 위로와 축복과 기쁨이 될 만한 시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골랐다.

_ 책날개 엮은이 소개 중 발췌.

 

 

어릴 적에,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에 시를 참 많이 읽었었다.
감성이 넘치도록 터져 나오던 시절, 나도 시인이 될 거라는 엄청난 꿈을 꾸었었다.
이제는 오래되고 낡아 바스러져 흩어져 버린 소멸된 꿈.
나이가 들고 깊어지면 어쩌면 나도 시라는 것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시간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깊어지게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시를 읽고만 있다.

그 시절 나는
따뜻하고 다정한 시를 좋아했고, 허무하고 염세적인 시를 사랑했다.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성품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어있었고, 사춘기의 비딱함과 상실의 고통이 허무에 허덕이게 만들었었다.

극과 극을 달리던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시들이 한 권에 책 속에 다정히도 담겨있다.
조병화 시인의 시를 읽으며 세상에 미련이 없던 시절, 안도현 시인의 시를 읽으며 그래도 다정해져야겠다고 다시 세상으로 눈 돌리던 시절.
그 시절의 나와 조우한다.

 

 

 

 

 

이 책에는 여러 시인들의 시가 실려있다.
우리 귀에 익은 시인도 있고, 낯설게 읽히는 시인도 있다.
그 옛날의 시, 근대의 시, 현대의 시가 다정히도 얽혀있다.
허난설헌의 시대부터 한용운과 윤동주를 지나, 기형도와 백석을 거쳐, 정호승, 안도현, 장석주, 천양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들의 인사가 반갑기 그지없다.

학교에서 숨은 은유를 외워가며 배웠던 어렵기만 하던 시, 사춘기 시절에 한 번쯤은 누구나 노트에 필사 한 적이 있던 시, 연애시절 연인에게 보냈던 기억이 있을만한 시들을 다시 읽으며 아련하고 반갑고 행복했다.

이미 너무 유명한 시들과 처음 접해보는 낯선 시들의 어울림.
알고 있고, 많이도 읽고 또 읽었던 시들도 있었고, 처음 읽어보는 시인의 시 덕분에 그 시인의 다른 시집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너무 어렵고, 너무 복잡하고, 지나친 은유와 시적 언어로 가득 차 독해가 어려운 지경의 시를 슬쩍 피해, 누구나 읽고 공감하고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들이어서 더 가깝게 느껴졌다.
평소 시는 어렵고 난해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도 선뜻 선물할 수 있을 것 같은 시들의 묶음이라 누구에게 권해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어쩌다 보니 죄다 교과서로 배워서 어렵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다.

학교에서 뜯고 해부해서 시어 하나하나를 낱낱으로 배운 우리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이렇게 좋은 시들을 그저 읽고 즐기지 못했다.
더 비장하고 더 깊은 사유를 얹어 어렵게만 배웠다.
시라는 것은 그저 가슴으로 읽는 것.
시인의 의도를 내가 몰라도, 시는 그저 시인 채로 아름다운 것.

이제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실리는 시대에 산다.
그렇지만 여전히 시는 낱자로 뜯겨 무거운 의미를 짊어진 채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아이들에게 시를 그저 시인 채로 읽힐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나의 정해진 의미가 아니라 각자의 의미대로 해석하며 간직하게 하면 좋을 텐데.
아이들이 시를 사랑할 수 있게.

 

 

이 시집에는 나태주 시인의 신작 시들이 여러 편 담겨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풀꽃밖에 몰랐는데;; 덕분에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읽는 즐거움도 컸다.

엮은이의 의도대로 좀 더 쉽고 가깝게 시를 읽고 즐길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는 역시 필사하는 맛.
따라서 시를 적어보며 누구나 시인이 되어보기 좋은 계절, 가을.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우리 가슴에 일으키는 파장의 여운을 즐기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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