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아내로부터 3만 킬로미터씩 멀어진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사랑과 야망에 관한 우주 오디세이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는 혜성 하나가 태양계로 진입하면서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이 특이한 현상을 '초프라'라고 이름 짓고, 세계 각국은 저마다 지구로부터 4개월 떨어진 곳에서 있는 이 먼지 입자를 분석해 우주를 연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인구 천만의 작은 나라 체코에도 기회가 온다.
마침내, 체코의 외딴 마을에서 조부모와 함께 살아가던 야쿠프가 세계의 이목이 쏠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이 위험하고 고독한 여정은 그가 꿈꾸던 영웅이 되는 길이자,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데 일조했던 아버지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기회를 잡으려면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아내 렌카를 떠나야 한다. 야쿠프는 아버지 때문에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고 영웅이 되겠따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당분간 렌카와 헤어지기로 결심하는데....

 

 

자, 책 뒤표지의 소개 글을 읽어 보자.
다들 우주 SF 소설을 상상하게 되지 않는가?
물론 과학적 재미를 극대화한 글보다는 심리를 크게 다룬 것 같은 느낌을 받긴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마션'처럼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겨진 남자의 이야기가 주일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글의 핵심은 책 표지 아랫부분에 적힌 저 두 문장에 더 가깝다.



역사, 사회비평, 풍자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
아서 클라크와 밀란 쿤데라를 우주에서 읽는 듯하다.
-<라이브러리 저널>

그렇다.
나도 모르게 밀란 쿤데라를 떠올렸다.
연애소설의 탈을 쓴 철학서.
사랑이 주 테마인 듯 보여도 결국엔 우리들 내면의 자아 대해 말하는 소설.
스토리를 이해했다고 해도 그 책을 완벽히 읽었는지 모호해지는 소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내게는 그렇다.

이 책은 굳이 비교를 하자면 밀란 쿤데라의 글보다는 조금 더 소프트하다.
좀 더 친절하고, 비교적 친밀하게 속내를 드러내준다.
그럼에도 결국 이 소설 또한 SF의 탈을 쓴 철학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완벽한 속죄를 위해 아버지의 죄로부터, 체코로부터, 지구로부터, 우주까지 도망쳐야 했던 주인공은 그래서 전 세계의 영웅이 되어 과연 그 원죄로부터 완벽히 벗어날 수 있었던가.
무성 영화 같은 무중력의 우주 공간을 떠다니며 완벽한 안도를 얻었던가.
온갖 중력의 힘을 버티며 살아내야 하는 지구에서 그는 '영웅'으로 자유로워졌을까, '죽음'으로 자유로워졌을까, 아니면 어떤 자유에도 결국 가닿지 못했을까.
책을 읽으면서도 읽는 내내 자꾸만 머릿속에 그런 질문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덕분에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었던 것만큼 오랜 시간과 많은 사유들이 나를 침범했다.

그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조차 모호하다.
우주에서도 지구에서도 그의 이야기들은 어쩐지 몽롱한 구석이 존재한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읽은 나까지 몽롱하게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독자가 얻을 것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밝히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모호한 모든 순간, 모든 공간에서 그가 과연 구원받았는지, 그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지,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보는 데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내가 사는 도시를 알고 싶은, 도시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싶은 뜻밖의 충동을 느낀다. 도시 사람들이 모두 의지에 반해 모이게 되는, 인간들이 사는 거대한 도시라면 어디에나 있는 후유증과도 같은 공간에서 도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충동. 도시의 모순이 서로 만나 전혀 새로운 생물권을 만들어 내는, 누구나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생존 기술을 터득해야 하는 장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벤체슬라브 광장으로 간다.
p. 214~215

 

 

이 책이 밀란 쿤데라의 글을 닮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체코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특히 두 작품 모두 '프라하의 봄'이나 '벨벳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간 속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체코를 모른다.
그들의 역사도 사상도 삶의 모습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프라하는 그저 드라마 속 아름다운 배경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 아름다운 배경이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지고, 보존되어 왔는지 전혀 모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배경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
가보지 못한 나라의 낯선 역사 속에서 나는 내내 그저 낯설어했었다.
주인공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를, 역사를, 배경을 이해해야 했지만 내게는 너무도 낯선 언어였을 뿐이었다.

이 책 속에도 같은 시간의 역사가 깔려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같은 시간을 이야기하는 이 책 속의 체코의 역사는 낯설지가 않다.
실제 사건에 대한 정보나 이해는 여전히 없다시피 한 상태이지만,
체코가 견뎌온 시간들에 자꾸만 한국의 지나간 시간들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를 되찾으려고 그렇게 많은 목숨들이 사라져갔고, 그렇게 다시 찾은 나라에서 다시 만난 독재 정권의 만행들.
그 속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죽어간 아까운 목숨들.

다른 나라 다른 역사 속에서도 우리들은 다 같은 꿈을 꾸었던가.
억압 속에서도 기어코 자유를 갈망하고,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가.

 

 

남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으며 술집에 가서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뭔가 말을 잘못 해서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쓸 것인지 아니면 집에 돌아가 채널이 하나뿐인 텔레비전과 한 가지 사상만으로 쓰여진 책들이 들어찬 책장, 침묵을 끊을 수 없는 연장들과 마주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p. 112

 

사회주의 독재 체제 속에서 체코의 억눌린 국민들의 모습들이,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의 만행에 희생된 우리 선조들을 생각나게 했다.
체코를 모르니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정서를 먼저 끄집어 내게 되는 모양이다.
이 책 덕분에 체코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검색도 해보고, 체코의 지난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투마와 자이츠를, 방에 앉아서 세계의 미래를 주무르는 모든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팻말을 들고 어슬렁거리면서 체제와 맞서는, 변화를 바란다는, 희망을 찾는다는 구호를 외쳤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나는 밤이 되면 우리나라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이 지구 전체에 울려 퍼지고, 스스로 길을 잃은 사람들의 착취와 욕심을 떨쳐냈던 벨벳혁명 때처럼 인파가 수천 명으로 불어나기를 바랐다. 끊임없는 혼란을 없애기로 결심한 사람들, 신발을 신고 손에 팻말을 들고 텔레비전을 조금 들여다보는 대신 자갈이 깔린 도로 주변에서 행진하기로 마음먹은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가 혁명의 움직임이자 빅뱅을 야기하는 하나의 알갱이였다. 이 세상의 운명을 이런 사람들 손에 맡겨야 한다고 확신했다.
p.391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촛불 집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건 국민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끊임없이 잘못을 지적하고, 스스로 길을 잃은 사람들을 꾸짖어 제대로 된 길을 찾아주는 것 또한 우리의 일인 것이다.
잘못을 알고 뉘우치고 스스로 바른길을 찾아 움직이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 삶의 안녕을 위해, 안전한 나라를 위해, 모두의 미래를 위해 건네준 권력이 자꾸만 허투루 쓰여질때 씁쓸해진다.

지금 이곳에서 안녕히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죽음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체코의 오늘이, 대한민국의 오늘이,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는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사랑으로 넘어가 보자.
무엇이 야쿠프를 하나뿐인 아내를 홀로 두고 기어코 우주로 날아가게 만들었는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내 생각엔 브랜디 때문인 것 같았는데, 브랜디 덕분에 나는 박사에게 아버지에 관해서, 우리 가족의 저주에 관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 그 자체가 되고 싶은 욕망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 가문의 이름을 다시 호의적으로 돌리고픈 욕망에 관해서 말할 뻔했다. …중략…
열심히 노력했지만 미치지 못한 것과, 비보이 박사가 경고한 대로 너무 지나친 사람이 되어 야망으로 인생을 망치는 것의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하벨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정말 불행했을까?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존경했다. 그런 점 어딘가에 행복은 반드시 존재했다. p.212~213

 

 

벨벳혁명을 기점으로 공산당의 비밀경찰이었던 아버지는 온 국민이 처단해야 할 악이 되었다.
그리고 야쿠프는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부모님이 죽고도 그는 아버지의 원죄를 뒤집어쓴 채 삶을 살아야만 했다.
손가락질 받고 욕을 먹어야 했다.
아버지 때문에 삶을 망쳐버린 '신발 사내'의 등장은 야쿠프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그는 벗어나야 했다.
아버지의 악행의 그림자로부터 빛으로 나오기를 소망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림자를 떼어내고 싶었다.
우주에 가야만 했다..
모두가 영웅으로 그를 우러러 보고, 죽음을 무릅쓰고 얻어올 우주 먼지의 샘플이 그를 모든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를 허락할 것이다.
그것은 그로써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미래였다.
지금 당장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원죄에서 벗어나는 것, 좋은 사람으로 남겨지는 것, 모든 사람이 우러르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은 그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이런 상황은 정확히 그 사람이 기대하던 거야. 트라우마의 부활에다 두려움의 인격화라니, 이 빌어먹을 자식." p.68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는 듯 보이는 시간 속에서 우주로 날아간 야쿠프.
그는 외로움과 조우한다.
아내는 그를 떠나버렸다.
드넓은 우주에서 작은 얀후스호 안에 그저 혼자가 된 야쿠프.
그는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환상을 경험한다.
우주의 적막, 무중력의 세계 속에서 낯선 존재와 마주친다.
그와 우주의 시간을 함께 했던 존재는 실제였을까, 야쿠프의 또 다른 자아였을까.
환상이라기엔 너무 선명하고, 실재한다기엔 너무 거짓말 같은 존재.
그를 하누시라고 명명한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걱정이나 두려움과는 다른, 이상한 감정이었다. 내 가슴은 항상 아스팔트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묵직했다. 지금 나는 때를 기다리는 시체였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워지면 몸은 성가신 영혼 없이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고대한다. 사람의 몸이란 이렇게 간단하다. 맥박이 뛰고 분비하고 삐걱거리면서 한 박자, 두 박자씩 한 시간 또 한 시간을 채워간다. 몸은 노동자이며 영혼은 탄압을 일삼았다.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키자. 아버지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p.186

 

 

우주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야쿠프.
그는 살고 싶었을까, 죽고 싶었을까.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던 그는 정말로 살아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던 건지, 아니면 죽음으로라도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더 간절히 바랐던 건지 알 수가 없다.
그토록 집착하고야 말았던 것들을 야쿠프는 놓았을까?

 

 

그림 속에 우리의 모든 삶이 존재했다. 떠나겠다는 나의 선택. 렌카보다 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나의 선택. 나는 먼지를 선택했고, 우주를 선택했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의 여행을 선택했고, 사람들 머리 위에서 살기를 선택했고, 더 높은 곳에서의 임무를 선택했고, 상징을 선택했고, 구원을 움켜잡기를 선택했다.
나는 렌카를 선택하지 않았다.
p.355

 

 

야쿠프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구원은 움켜잡았니?
그래서 행복해졌니?
그래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어?
먼지를 선택해서, 우주를 선택해서, 어딘지 모를 곳으로의 여행을 선택해서, 사람들 머리 위에 살게 되어서, 더 높은 곳의 임무를 선택해서, 영웅이 되어서..... 그래서 네가 얻은 건 무엇이니?

렌카를 버리고 선택한 삶이 네가 진짜로 원하던 그 삶이 맞아?

마당 쪽으로 열린 창문 밖으로 신발을 내던졌다. 신발은 돌벽을 따라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다가 마찬가지로 망각이라는 필연을 마주하고는 산산조각이 나서 풀밭 흙 위에 뒤집어졌다. 마침내 신발에서 불행이 빠져나가고 목적이 사라졌다.
p. 387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중력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마침내 신발에서 불행이 빠져나갔다.

그래서 행복이 돌아왔을까?
불행이 빠져나간 적막 속에는 무엇이 남겨졌을까.
홀가분함이었을까.
끝을 모를 허무는 아니었을까.

 

 

 

 

우주 속 작은 행성 지구,
그 행성에서 고작 몇 평의 땅에 세 들어 사는 우리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드넓은 우주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까.
우주의 광활한 시간을 감히 짐작조차 못하는, 고작 100년 정도의 삶을 살다가는 존재들.
그 시간을 모아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지구를 전부라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들.
우주에선 그저 먼지 한 톨보다 더 작고 하찮은 존재인 것을.

지구에서 이토록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들의 존재가 우스워졌다.
내가 아는 곳은 이곳, 지구에서도 작고 작은 나라 한국, 거기에서도 또 작은 하나의 도시, 내가 발 딛고 선 곳에서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삶을 살아간다.
고작 전생이나 후생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생의 긴 꼬리를 이어보기도 하면서.
지구의 대기를 뚫고 더 머나먼 곳으로 나아가 진짜 우주, 상상할 수도 없이 넓고 넓은 세계는 알지도 못한 채,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며 살고 있다.

우주에는 오로지 생과 사, 그 두 가지만이 존재한다.
탄생과 소멸.
그 속에서 우리의 쓸모없는 욕심들, 무기력한 희망 같은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많은 생의 의미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는 무거운 의미들이 숨통을 조여온다.


숨을 쉬고 싶을 때, 모든 무거운 것들로부터 가벼워지고 싶을 때, 생의 의미가 지나치게 숨이 막힐 때,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우주로 날아간 남자를 만나보자.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는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잃어보아야 가치를 알 수 있다.
p. 41 / p.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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