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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좋은 날
모리시타 노리코 지음, 이유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다도란 그런 '삶의 방식'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인간은 고난과 역경을 마주한다 해도 그 상황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비가 내리면 "오늘은 날씨가 안 좋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안 좋은 날씨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비 오는 날을 이런 식으로 맛볼 수 있다면 어떤 날도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좋은 날이.
매일매일 좋은 날 _ p.256

스무 살의 봄, 그녀는 엄마의 권유로 '다도'를 배우기로 한다.
낡고 케케묵은 일본의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다도는 처음부터 이해되지 않은 까다로운 요구들로 그녀를 옭아맨다.
행동 하나하나에 엄청난 제약이 뒤따랐고, '왜'인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과 이런 규범에 얽매여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다도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걷는 걸음의 수, 물을 따르는 높이, 물을 뜨는 깊이, 다기의 위치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정해진 틀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다도는 너무 어렵고 힘든 작업이었다.
그다음 동작을 외우지도 못하게 하고, 그저 몸이 익히게 하는 다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숙한 몸의 기억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다도는 늘 머릿속에 생각을 꽉 채우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난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온전히 '여기'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p. 170
온전히 지금에 집중하는 일.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완벽히 몰입하는 일.
지금에 머무는 일이 우리는 그렇게도 힘이 든다.
이미 지나버린 어제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내일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자꾸만 오늘을 소비하고 있다.
다도를 하는 내내 그녀는 '여기'에 집중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어제와 내일을 잊고, 방금 지나버린 시간을 버리고, 오로지 지금 눈앞에 있는 차의 시간에 집중하는 일.
계절이 지나는 순간,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온몸으로 오롯하게 느끼는 일.
생각을 멈추고 오로지 감각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일.
그것이 다도였다.
결코 멈춰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자,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하는 거야.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을 하도록 해.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집중하는 거야."
매일매일 좋은날 _ p.076
다도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었다.
계절을 차 안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차를 타는 것을 칭하는 '데마에'는 계절에 따라 달라졌다.
다완도 역시 계절에 따라, 절기에 따라 달랐다.
차를 담아두는 그릇은 진한 차와 연한 차에 따라 이름이 다르고,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글을 바꿔가며 거는 족자 또한 계절과 절기를 통과했다.
무엇 하나 지금 이 시간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차를 만드는 모든 과정,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 그리고 오늘의 날씨와 지금의 계절.
그 모든 것이 '다도'라는 이름으로 '지금 이 순간'을 깊게 향유하게 했다.
나는 언제나 과거를 후회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 봤자 지난날로 돌아갈 수도 미래를 앞서 나가 준비할 수도 없는데.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지금을 즐기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할 때, 인간은 자신이 가로막는 것 없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매일매일 좋은 날 _ p. 256

그러나 차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제한이 없다. 3년이 걸려 깨닫든 20년이 걸려 깨닫든 본인의 자유다. 깨달을 때가 오면 깨닫게 된다. 성숙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사람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빨리 이해했다고 해서 좋은 평가를 받지도 않는다. 이해가 늦더라도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만의 깊이가 탄생한다.
어떤 답이 옳고 틀리다거나,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다. '눈은 하얗다'도 '눈은 까맣다'도 '눈은 내리지 않는다'도 모두 정답이었다. 사람은 모두 다른 존재니까 정답도 다 다르다.
차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p.266
그녀는 무려 40년 동안 꾸준히 다도를 계속해 오고 있다.
(책은 25년까지의 다도 인생이 담겨있지만, 현재까지 여전히 다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수많았던 삶의 순간들 속에서 꾸준히 멈추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차곡차곡 쌓아온 그녀의 다도 인생.
이십 대의 뜻 모를 불안과 삼십 대의 밥벌이의 피곤함과 사십 대의 고뇌를 함께 해주었던 다도의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그녀는 사랑을 잃기도 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도 했다.
가족을 잃는 상실을 겪으며 깊이 울어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계절을 꾸준히 돌고 돌아 봄이 오고, 봄의 데마에가 시작되고는 했다.
일주일에 하루씩 다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겪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
그것들은 차의 시간이 삶의 시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계절을 그대로 겪어내고, 길고 긴 시간을 이어져오며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다도.
그녀의 담담한 깨달음들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가 너무 복잡하게, 너무 질척거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일러주는 것만 같다.
생각을 멈추고 지금에 집중하며 계절을 느끼라고, 그녀가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나도 한참을
오늘의 계절을 바라보고 있다.



먼 옛날 맡았던 바람과 물, 비의 냄새가 그때의 감정과 하나가 되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연기처럼 사라져간다. 과거의 수많은 내가 지금의 내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p. 156
사실 나는 차는 좋아하지만, 다도에 대해서는 완벽히 문외한인 사람이다.
무엇을 느끼고, 알면서 마시는 게 아니라, 그저 차가 좋아 종종 마시곤 한다.
그러니까 커피나 음료처럼 그저 기호식품인 것이다.
그런 내게 이 책은 전혀 다른 '차'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 번도 이토록 깊게 차를 생각하고,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내게 이 시간들은 봄을 알리는 봄비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모르던 새로운 세상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닫혔던 세상을 톡톡 두드려 깨워주는 다정한 봄비 같은 책.
특히나 저자가 비 오는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나 또한 그 방에서 비 오는 풍경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글이었지만 나는 오감으로 그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오래전 시골집에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시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빗속에 갇혀 앞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더 가깝게 느껴지는 그 느낌을 나는 안다. 그 친밀함을 알고 있다.
이 네모 반듯하고 촘촘한 고층 아파트에서는 도저히 느껴볼 수 없는 순간을 책을 통해 다시 또렷하게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책에는 수많은 계절의 모습이 담겨있는데, 그 계절의 모습과 냄새와 소리를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데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차를 마시며 그녀가 자연을 오감으로 느끼던 순간, 나는 그녀의 글을 통해 잊어버렸던 계절을 온몸으로 앓고 있었다.
만일 미리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람은 정말로 그 순간이 닥칠 때까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다. 결국 처음 느꼈던 감정 그대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비로소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결국 오랜 시간이 걸려 조금씩 그 슬픔에 익숙해져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_p.231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잃은 그녀의 상실의 고통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들이 사실은 그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담담한 그녀의 말들이 더 가슴에 맺히고 말았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말할 뿐인데도 어쩐지 굉장히 깊은 위로를 건네받은 느낌이 든다.
차와 다도와 삶과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뜻밖의 위로까지 덤으로 받고 말았다.
나에게는 정말 휴식 같은 책일 수밖에 없구나 싶어진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일본의 가옥과 다실, 다도의 도구들이 사진으로 나마 실려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원작에는 실려있지 않고, 한국판에만 사진이 실려있는 모양인데 편집자의 센스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일본의 문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는 모든게 낯설기만 한데, 상상의 한계에 부딪히지 않도록 놓아준 배려가 참 좋았다.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다도의 과정들을 꼭 눈으로 보고 싶어졌으니까 말이다.
마치 책마저 다도를 닮아 맑은 느낌이다.
다도를 하나도 모르는 나조차 다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도의 과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일이 무엇이 재미있겠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놀랍게도 그 모든 순간순간이 우리에게 쉼을 주고, 멈춤을 선물해 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생각을 멈추고 오늘의 계절에 집중하는 일이 아닐까.
바로 그 무의 상태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계절의 숨소리야말로 제대로 된 쉼이고 힐링일테니까.

인간에게는 아무리 이해하려 애를 써도 그때가 올 때까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닫는 순간이 오면 그 사실을 덮고 감출 수는 없게 된다.
처음 차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뭐 하나 짚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그것이 단계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왜 그렇게 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삶이 버겁고 힘들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를 잃었을 때, 차는 가르쳐 준다.
"긴 안목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라."
서문. p.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