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너라는 계절 - 한가람 에세이
한가람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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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랑하다 죽을 수도 있는 건가요.

사랑할 때 그 뜨거운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온통 너라는 계절』 _ 가득 차긴 했지만 전부는 아니었음을. p.263

 

 

 

 

내게도 그런 계절이 있었다.

온통 '너'뿐이었던 계절.

'너'말고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던 계절.

'너'로 인해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결국 혹독한 겨울도 견뎌야만 했던 시간.

당신의 지난 계절을 보면서, 나 또한 지나버린 계절들을 떠올리고는 했다.

나도 당신처럼 매번 데일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죽을 것처럼 절망스럽게 이별을 했다.

어쩌자고 내게 사랑은 매번 그렇게 뜨겁기만 했는지, 늘 사랑은 깊은 화흔을 남겼고, 늘 나는 사랑하는 일이 버겁고 아팠었다.

나무에 진 옹이처럼 곳곳에 남겨진 사랑의 흉터들은 이제는 나의 고유의 무늬가 되어버렸다.

그런 옹이가 있어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고 …… 믿고 싶다.

나무가 죽어 가구가 되고, 탁자가 되고, 기둥이 되어도, 옹이를 가져 더 아름다운 무엇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

 

 

 

너는 나의 여름이었지. 너무 덥고 짜증이 났었는데 도무지 잊히지 않는. 내 생애 그런 여름은 오직 너뿐이었어. 더 이상 내 계절에 여름은 없어. 없어졌어. 네가 나의 유일한 여름. 헤어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던 나의 유일한 여름.

『온통 너라는 계절』 _ 여름의 미스터리. p109.

 

 

그녀의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함께 걸으며, 나 또한 나의 10대를, 20대를, 30대를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있는 사랑의 흔적들.

지나버린 시간에 봉인당한 채 잊혀지고 있는 사랑의 시간들.

때로는 상처로, 때로는 추억으로, 때로는 망각으로 남겨진 지난 사랑의 조각들을 이어 붙어놓은 그녀의 이야기는 그래서 무심히 마음을 툭, 치고 지나곤 했다.

그녀가 건드려 놓은 마음결에서 툭툭 떨어지던 어떤 날의 나, 혹은 너, 아니면 그때의 우리.

이미 지나버린 사랑의 이름들.

그녀 덕분에 알았다.

그때의 죽을 것 같았던 상처들이 제법 잘 아물었다는 사실을.

무서워서 기억하는 것조차 꺼리던 사랑의 시간들이 이제는 나를 상처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내게는 이제 정말 그 시간들이 잊혀진 계절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더 이상 사랑은 내게 언제 끝나버릴지 모를 두려움이 아니라, 끝까지 손을 잡아 줄 믿음직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너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한 기분이 든 적이 있었다.

갑자기 너무 슬퍼서 울음을 터트린 적도,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마음 한쪽이 찜찜했던 적도 있었다.

그게 다 균열.

너와 나의 마음 사이에 생기는 아주 작은 틈.

『온통 너라는 계절』 _ 틈. p142

 

나도 사랑을 할 때 참 예민한 사람이었나 보다.

설명할 수 없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그 틈을 기가 막히게 느끼고는 했다.

그래서 그녀처럼 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엉엉 울어버리고는 했다.

이 사랑이 끝날 것만 같아서, 기어코 이별은 정해져있는 것만 같아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는 했다.

그것은 불안.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안.

나만 느끼는, 나에게만 전해지는 불안.

그녀가 말하는 그 균열을, 그 미세한 틈을, 나는 너무 예민하게 문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미세한 틈이 메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당신의 바다에

당신의 쓰레기통에

당신의 책상 구석에

벌써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당신의 새로운 여자친구 앞에서

쓱 찢어버린 추억이 되어버렸는지

 

『온통 너라는 계절』 _ 당신이라서 모두 가능했다. p201

 

 

그녀가 잡아당긴 그리움에는 많은 것들이 묻어 있었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표정, 그날의 감정,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혹은 애틋함.

지나버린 것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남는다.

어떤 한 장면으로, 냄새로, 표정으로, 그날의 진실보다 그날의 감정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시간은 기어코 감정을 밑바닥까지 소진하게 만들고, 뜨거웠던 사랑의 기억조차도 희미해져 버린다.

가끔은 그렇게 점멸하듯 희미하게 깜빡이는 기억들이 더 아름답고 애틋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지나버린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사랑은 그래서 더 애틋하고 가엽다.

그런 사랑의 기억들이 우리를 쓸쓸하게 만든다.

그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감정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문득 그렇게 먼지가 수북이 쌓인 오래된 기억들을

한참, 바라보곤 한다.

 

 

 

그녀는 조금 부끄러워했다.

환한 대낮에 드러난 민낯의 민망함이랄까.

애써 감춰뒀던 여드름 자국이라든지, 감쪽같이 속였던 반쪽짜리 눈썹이랄지, 눈 밑의 거무죽죽한 다크서클 같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켜버린 부끄러움.

그녀의 솔직한 글들은 그녀에겐 바로 그 민낯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왕이면 예쁘게 화장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을거다.

좋은 사람으로, 좀 더 멋진 사람으로, 될 수 있는 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우리는 기억되고 싶어 하니까.

낯선 이들에게 민낯을 드러내는 일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의 실수를 사과하는 일도, 나의 모자람을 인정하는 일도, 나의 서투름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일도 모두 참 어려운 일이다.

'지나간 사랑'에는 늘 그런 부족함과 낯 뜨거움이 후회와 미련만큼이나 많이도 담겨있다.

그럼에도 그 지나간 사랑의 민낯을 기꺼이 보여주는 그녀의 글.

그녀가 감추지 않고 드러낸 그 민낯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사랑의 민낯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게, 그 사랑의 기억이라는 게, 늘 아름답지만은 않으니까.

때로는 실수와 상처와 눈물을 간신히 기워놓은 누더기 같을 때가 더 많으니까.

가끔은 아름답게 빛나다가도, 서럽고, 가슴 아프고, 진절머리 날 때가 훨씬 많으니까.

사랑이라는 게,

이미 끝나버린 사랑이라는 게

결국, 그런 것일 테니.

 

 

 

 

 

그녀는 나와 닮았다.

모든 사랑이 다 같았을 리 없지만, 그녀의 감정의 색은 나의 색과 몹시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들이 기특하고 안쓰럽다.

내 지난 사랑이 기특하고 안쓰러운 것처럼.

나도 매일 사랑했고, 매일 실수했다.

매번 상처받았고, 매번 울었다.

어쩌면 그렇게 잘 넘어졌는지, 사랑의 '영원' 앞에서 늘 넘어지고 말았다.

내일을 꿈꿨지만 내 사랑엔 내일이 허락된 적이 없었다.

늘 안간힘을 쓰면서 사랑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사랑에 '최선'은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사랑을 했다.

상처받으면서도, 내내 울면서도,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내가 제일 잘한 건,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

그녀처럼 나도 늘 끈질기게 누군가를 좋아했다.

나 또한 그런 시간들을 건너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랑에 상처받지 않는다.

사랑으로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 사랑 때문에 울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다.

아직은 여전히 사랑 때문에 울 것만 같은 그녀에게도

생의 끝에서도 손을 잡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이 찾아오기를 기도해본다.

어쩌면 이미 그런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을, 온통 너라는 계절.

그 계절의 페이지를 다시 한번 넘겨보게 만드는 책.

“아프지 말라고 종이 위에 문질러댄 위로”라는 그녀의 에세이가 지난 사랑에 상처받은 많은 이들의 가슴 또한 다정히 문질러 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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