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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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는 아주 잘 어우러진 형태로 공존한다.

영원히 교차할 일이 없는 철길과도 같다. 우리는 그 양쪽에 바퀴를 얹고 달리고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가가 무당에게 점을 보거나, 현실을 초월해야 할 종교가가 세금을 안 내려고 머리를 쥐어짠다. 인텔리전트 빌딩을 지으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고사를 지낸다. 합리의 레일 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냉혈한이 되고, 불합리의 레일로 기울어지면 광신도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느 지점에선가 탈선하게 되어 있다.

…중략…

절대로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제1장 우연한 만남. p.88~89

 

 

 

이 책은 어쩌면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에 대한 이야기 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더 많은 인물과 사건과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 안에 있는 각자의 합리와 불합리에 대해 묻고 있는 것 같다.

너는 믿을래? 믿지 않을래?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이야기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건 지는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과학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여전히 우리 곁에는 이토록 많은데도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과 합리 쪽의 레일에 더 무게를 두고 달리고 있는 모양이니까.

누군가 내게

귀신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초능력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역시나 글쎄.

신의 존재는? ... 그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게 아닐까??

역시나 YES or NO의 명확한 답을 내어 놓기가 어렵다.

그렇다는 건 내 안에 믿지 않는 마음만큼 믿고 싶은 마음도 공존하는 모양이다.

진짜 내가 현실 속에서 신지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 이야기를 과연 믿어 줄 수 있었을까?

 

 

 

 

 

사람은 이따금 그렇게 치명적으로 무책임 아니, 낙관적이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제1장 우연한 만남 _ p.33

 

 

이야기는 바로 그 치명적인 무책임, 혹은 낙관론에서 시작된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 물에 잠긴 도로의 맨홀 뚜껑을 열어 놓은 사람이 있다.

차가 물에 잠기지 않기를 원해 한 일이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낙관했던 그 일은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 고양이를 찾으러 아이가 그 도로 위를 걷다 맨홀에 빠져 죽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자신의 이익, 혹은 많은 사람을 위한다 믿었던 선의는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아이는 죽었고, 범인은 맨홀 뚜껑을 열어놓은 누군가였다.

그날 밤, 기자인 고사카는 어쩌다 보니 바로 그 길을 지나게 된다.

태풍이 일으킨 비바람을 뚫고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소년을 우연히 만나, 그의 차에 함께 태우고 도쿄로 가던 중이었다.

뚜껑이 열린 맨홀, 노란색 아이 우산, 그리고 실종된 아이.

경찰이 출동하고 날이 밝았지만 아이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고, 맨홀 뚜껑을 열어둔 무책임한 사람을 찾을 수도 없다.

그때 신지가 고사카에게 고백한다.

범인을 알고 있다고.

자기는 볼 수 있다고.

우산이 기억하고 있는 순간을, 맨홀 뚜껑에 남겨진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

당신의 기억도 읽을 수 있다고.

 

 

신지가 거기서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그의 기척, 체온, 숨결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했다. 나중에 이때의 일을 떠올리며 어울리는 말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런 표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신지는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가, 내가 있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좌표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제1장 우연한 만남 p. 63~64

 

 

 

자신의 존재를 믿게 하려고 직접 고사카의 기억을 읽어내 말하는 신지.

그런 신지를 완벽히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고사카.

범인을 찾아 나서지만 신지의 어린 경솔함에 일은 틀어져 버리고, 결국 그렇게 어중간한 믿음을 가진 채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믿었던 어느 날 고사카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소년, 나오야.

그는 신지가 했던 모든 말들을 부정한다.

모두 거짓이라고, 초능력에 심취한 어린아이의 집요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신지를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진심이라고 느껴졌던 신지의 말과 하나하나 근거를 대며 신지의 말들을 부정하는 나오야의 말 중 고사카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과연 초능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제대로 믿지도, 완벽히 외면하지도 못한 채 그들에게 끌리는 고사카는 과연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될까?

 

 

 

 

끊임없이 밀려오는 속마음, 속마음, 속마음의 홍수. 거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컨트롤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감정까지 자제해야 한다. 속된 말로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이가 말이나 태도로 표현하지 않는 한 주위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전부 들린다면? 듣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듣지 않아야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과연 그 호기심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까? 그리고 상대방의 진심을 알게 되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제2장 파문 p.144~145

 

 

 

일본 순정 만화 중에 'Only you'라는 작품이 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만화 중 하나인데 남자 주인공이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이다.

그 초능력이 그에게는 재앙이었다.

접촉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밀려 들어온다.

다정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기만 한 속마음을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추하고 탐욕스럽고 이중적인 인간의 마음을 읽을 때마다 그는 역겨움에 몸서리 치곤한다.

상대방이 감추고 있는 비밀, 알고 싶지 않은 마음속의 어둠들을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그는 삶은 너무 불행했다.

웃고 있지만 사실은 비난하는 마음을 숨긴 사람들.

좋은 사람인 체 하지만 사실은 검은 탐욕으로 들끓는 마음은 감춘 사람들.

그런 속마음들을 다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은 초능력자에게도 없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도 결국에는 상처받고 마는 것이다.

신지와 나오야를 보면서 나는 그 만화 속 주인공의 고통을 다시 한 번 더 떠올렸다.

스토리는 다르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몰래 훔쳐볼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이고 끌리는 일 일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 그 속내가 궁금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랴.

하지만 속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런 속마음을 듣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듣게 된다는 것, 그 사람의 감추고 싶은 기억들을 강제로 열어젖히는 일은 얼마나 무례하고 고통스러운가.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너무 두려운 일일 것이다.

고사카의 말처럼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일이 결코 축복일 수 없다.

신지가 내 곁에 있다면, 나는 그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그가 읽게 될 나의 시간들이 두려워서 나는 그에게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신지는 내내 외로울 테다.

닿을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채로.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다.

꼭 초능력자 일 필요도 없다.

단지 나와 다름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해받고 싶어 하는 그들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해주고 있는가.

존재의 이유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들을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을 대하는 다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름'을 '미지'의 영역으로 몰아넣고 배척하거나 혐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기를.

결국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

(고사카의 그 마지막 대사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자기 자신 안에 용을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신비한 모습의 용을 말이죠. 그 용은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함부로 움직이고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하죠."

… 중략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용을 믿고, 기도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요? 부디 나를 지켜주세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를, 내게 무서운 재앙이 닥치지 않게 되기를, 하면서요. 그리고 일단 그 용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게 고작이죠, 하지만 역시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가 없는 거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제5장 어둠 속에서 p.469~470

 

 

 

우리 안에는 또 어떤 우리가 잠들어 있을까.

깊은 잠에 빠진 그 용이 깨어나게 될 순간은 또 어떤 때일까.

나의 용은 어떤 모습으로 깨어나 나를 휘젓게 될까.

이미 병들거나 나약해져 있는 건 아닐까.

 

당신의 용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잠들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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