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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캄보디아 프놈펜에는 호텔 '원더랜드'가 있다.
호텔 원더랜드에는 절대 춤 따위 추지 않을 것 같은 고복희사장이 있다.
그녀는 어쩐지 좀 이상한 사람이다.
늘 딱딱하게 높임말을 사용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원리원칙만을 고수한다.
좋게 말하면 올곧고 반듯한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고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운영하는 호텔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는 없다.
그래서일까? 손님은 점점 줄어들고, 이러다 호텔이 망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때 하나뿐인 직원 린이 '한 달 살기'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제안한다.
고복희에게는 어림도 없어 보이는 이 제안은 결국 받아들여진다.
호텔을 유지하려면 손님이 필요하니까.
한 달 살기를 신청하고 한국에서 오게 된 이상한 손님 박지우.
그녀는 고복희의 눈에 너무 한심하고 이상한 손님이다.
앙코르와트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프롬펜으로 숙소를 잡은 모자란 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빈둥빈둥 호텔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한심한 애.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젊은 여자.
그렇게 고복희와 박지우, 그리고 린의 한 달 살기가 시작된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만 하며 산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니까요.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나아가 당신의 도덕성을 시험하려 들 거예요. 부당한 상황에 밀어놓고 옳지 않은 선택을 하게끔 유도하겠죠. 좌절하는 당신을 조롱하고 헐뜯을지도 몰라요."상관없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니까.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걸로 족하다.
P.205
정확한 원칙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나는 고복희보다는 차라리 박지우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저 흐르는 대로 상황에 맞춰 적당히 대처하며 살아간다.
확고하고 올곧은 원칙이나 정확한 삶의 방향을 나침반 삼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것을 상상해 본적도 없다.
늘 삶의 거센 바람 앞에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아슬아슬함으로 삶을 간신히 견디며 살아왔다.
그런 내게 고복희는 신세계에 가깝다.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
그녀의 딱딱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고,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이 그녀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늘 곧다.
사람을 바라볼 때도 뒤틀리지 않는다.
그녀만의 원칙이 존재하지만 그것에 흔한 편견은 없다.
그냥 상대를 그대로 바라봐 준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꾸만 누군가를 구부러진 시선으로 바라보곤 한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가지게 된 편견과 의심과 짐작을 멋대로 주물러 내 방식대로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짐작이라는 게 참 무서운 영역이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나는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던 상대를,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완벽히 다른 시선으로 재단하고 있는 순간을 마주할 때 당혹스럽다.
저 사람의 말이, 저 사람의 행동 어디가 그런 결론에 이르게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끙끙 대곤 한다.
다른 사람들의 짐작과 짐작이 만나 말도 안 되는 전혀 다른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스트라이크로 정직하게 받아들인 내가 잘못된 건지, 변화구를 제대로 읽어낸 그들의 해석이 잘못된 건지 알 길이 없다.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심지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우리들은 이렇게도 다르다.
그런 점에서 고복희 무심함은 되려 멋져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는 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는 법이 없다.
그게 무관심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상대방의 삶을 제대로 존중하는 법이 아닌가 싶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고복희는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장영수는 그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을 할 뿐이었다. 타인의 소중한 것을 부러뜨릴 자격은 없다. 그건 그녀의 삶의 원칙이었다.
_ P.196
이 문장은 그녀가 후회를 말하는 문장과 닿아있지만, 나는 이 문장을 읽다가 울컥했다.'타인의 소중한 것을 부러뜨릴 자격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참 쉽게도 부러뜨리고 산다.
그것이 때로는 너무도 사랑하는 내 아이의 꿈일 때도 있고, 누군가의 신념일 때도 있고, 한 사람의 삶 그 자체일 때도 있다.
그것을 폭력이라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채 아주 쉽게 입 밖으로 뱉어낸다.
그렇게 부러진 내 소중한 것들은 결국 시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자존심, 자존감, 사랑, 믿음, 신념, 꿈....
타인에 대한 예의가 없는 우리들은 서로의 소중한 것들을 손쉽게 부러뜨리며 관계를 이어간다.
아파도 웃으면서, 인간관계라는 건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믿으면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의 신념을 지켜준 고복희.
그 원칙을 지킴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삶의 원칙이 몹시도 마음에 든다.
괴짜 같은 겉모습이 아니라, 딱딱한 말투가 아니라, 모든 삶을 소중히 여기는 그녀의 보드라운 마음, 그것이 고복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한 사람, 장영수.
춤추는 고복희를 만들기 위해 몹시도 애썼던, 다정한 사람.
그 사람을 잃고 그녀는 프롬펜에 왔다.


한국에서 백수로 지내던 박지우.
그녀는 남들의 빛나는 삶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여행을 통해 한순간이라도 빛나는 삶을 보여주고 싶어서 프롬펜에 왔다.
앙코르와트를 꿈꾸며 도착한 프롬펜은 앙코르와트와 너무 많이 떨어진 곳에 존재했다.
서울에 불국사가 없는 것처럼, 수도인 프롬펜에도 앙코르와트는 없었다.
완전히 망한 여행.
호텔 사장도 괴짜에, 한인 사회도 이상한 것 같고, 한국에 돌아가서 뭐 대단한 무용담을 들려줄 것도 없어 보인다.
인생이 잿빛이더니 이젠 여행마저 잿빛이다.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로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난 것인데, 한국에서의 백수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서 과연 무언가를 깨닫고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 어른들이 봤을 땐 제가 웃기겠죠. 나라 탓만 한다. 그런 생각이시겠죠? 그치만 저도 노력하거든요? 제 나름대로 하고 있다고요. 근데 다들 저만큼은 한단 말이에요. 모두가 빡세게 살아서 제가 빡세게 사는 건 티도 안 나요. 안 빡세게 사는 애들은 잘 사는 집 애들이에요. 빡세게 살 필요가 없는 거죠."
… 중략 …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P.093
청년실업률에 대한 뉴스가 이제는 너무 익숙한 시대다.
실업률이 높아질수록 그들이 느끼는 좌절감 또한 깊어지겠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십 대의 청춘들이 팔자 좋게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참 열심히 스펙을 쌓고 쌓는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이제는 그런 고 스펙자가 넘쳐난다.
너도 나도 다 잘났다. 똑똑한 애들도 노력하는 애들도 넘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밀려 낙오하는 젊음들이 점점 쌓여간다.
열심히 했지만, 결국 더 가진 사람들만이 더 나은 삶을 보장받는다.
그 가운데 상대적 박탈감과 패배감에 고개 숙인 청춘들.
더 쥐여줄 돈이 없는 부모는 그런 부모라서 마음이 아프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달렸는데도 번듯한 직장에 안착하지 못한 자식들은 면목이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소설은 결국 현실의 이야기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연달아 읽었던 두 소설 모두 치솟는 청년 실업 데이터에 치인 청춘들이 등장한다.
한국 사회가 지금 같이 아파해야 할 문제가 이것이라고 보여주는 것만 같다.
패배자가 아니라고, 사회가 자꾸만 그들에게 패배자의 이름표를 달아 놓으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노력하지 않아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한심해서 게을러서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들의 그동안의 노력을 우리는 알아줘야만 한다.
취업의 문턱에서 넘어졌다고 인생이 넘어진 것은 아니다.
스스로 느끼는 좌절감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청춘들에게 우리들의 한숨까지 얹을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스스로를 믿고 일어설 때까지의 휴식인지도 모르겠다.
박지우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세상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복희는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간이었고 나 역시 그녀의 방식으로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다. 생각을 교묘하게 흐리거나 장황한 문장에 숨는 일을 경계했다. 두꺼운 화장을 벗어던진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썩 마음에 든다.
P.264 _ 작가의 말 中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다들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실상 세상을 완벽히 알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한 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
다들 그냥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짐짓 아는체하는 것일 뿐.
허울좋은 똑똑한 척일 뿐인 것이다.
고복희가 되고 싶어서, 고복희 눈으로 보고 쓰기 위해서 정면을 마주하기로 한 작가의 노력이 와닿았다.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일은 참 쉬운 것 같아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외면하고 싶은 많은 것들, 그냥 슬쩍 흘려보고 싶은 순간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치기엔 두려운 것들로 세상은 가득하다.
그 속에서 곧은 시선을 유지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힘겨운 싸움이다.
그럼에도 허영을 벗어던지고, 나를 빛내줄 자본주의의 산물들을 내려놓고, 나아닌 다른 것들의 뒤로 숨지 않기로 한 작가의 문장은 고복희를 닮았다.
아름답게 빛나는 문장을 좋아하지만, 담백하고 담담한 문장 또한 좋다.
그런 문장들은 오랫동안 먹어온 쌀밥처럼 오늘 먹고, 내일 다시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작가가 거울 속에서 바라본 치장하지 않은 '민낯의 나'가 이 한 권의 책이었다면, 나는 그녀의 다음 책도 읽게 될 것 같다.

어릴 때 똑똑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밖에 없다.
P.156
우리는 어리석다.
지혜롭고 싶지만, 아직도 여전히 어리고 서툴기 때문에 기어코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만다.
세상의 말들에 너무 쉽게 휘둘리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걷기 위해 늘 종종거린다.
내가 하는 선택에 대한 확신은 자꾸만 작아지고,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느라 오늘을 허비한다.
나이를 먹어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던 믿음마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원칙을 올곧게 지켜나가는 고복희의 성실함이다.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곧게 정면을 응시하며, 비굴하지도 무례하지도 않게 삶을 영위하는 것.
남을 할퀴지 않고도, 헐뜯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리가 불안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고복희는 보여주고 있다.
괴짜 같고 무언가 이상해 보이는 고복희의 삶이야 말고 진정 떳떳하고 올바른 삶의 모습은 아닐까.
나에게도 고복희의 단단한 원칙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것을 기어코 지키는 의지가 가장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