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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상대적으로 제한된 소비생활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더 풍요롭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소비할수록 우리는 더 결핍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_ p.034
언제나 여름인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
그곳에는 넘치는 자연이 있다.
쏟아지는 별과 까마득한 밤하늘과 아름다운 석양과 부드러운 바다.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열대의 자연에서 풍요롭게 열리는 과일들.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넘치게 허락하는 만큼 문명의 혜택은 느리다.
종종 혹은 자주 정전이 되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이 아닌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것만을 살 수 있는 곳.
인터넷 비용은 비싸고, 무엇이든 천천히 느리게 채워지고 소비되는 곳.
문명으로부터의 어떠한 결핍이 바로 보라보라섬의 진짜 매력이라고 믿는 부부가 그곳에 살고 있다.
정전이 되면 초를 켜고, 냉동식품을 꺼내서 먹어치우고, 캄캄한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실컷 포식하며 그들은 보라보라섬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다.

나는 그런 섬의 생활을 이미 알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뚜렷이 지니고 있는 한국의 어떤 섬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섬 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무료하고, 따분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
섬이라는 제한적 공간에서의 불편과 문명의 결핍으로부터의 아쉬움을 몸소 겪으며 살았다.
인터넷과 택배의 눈부신 성장으로 인해 이제는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섬에서도 예전 같은 불편은 거의 사라졌지만 내가 살던 그 옛날엔 딱 보라보라섬에서의 생활 같았다.
기후가 달라서 열대의 느긋함은 없었을지 몰라도, 섬 생활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닮은 모습을 지닌 것 같다.
특히나 여름 내내 바다에 둥둥 떠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밭에서나 자라던 싱싱한 채소와 곡식들도.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던 바다 위로 지는 석양,
바다와 하늘과 구름과 땅을 모두 아름답게 적시던 그 빛깔.
이국의 보라보라 하늘과 우리나라의 하늘은 또 다른 색감을 지니고 있을 테지만, 읽으면서 내내 나는 이국의 어떤 나라의 바다와 내가 자랐던 작은 섬의 바다를 함께 떠올렸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래서 이국적이면서도, 어릴 적 향수를 함께 불러일으켰다.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내 모습이 낯설다. 막상 한집에 살았을 때는 그렇게 당연하게 여겼으면서, 사소한 일로 미워하고 지겨워했으면서. 가족이란 정말 뭘까. 사랑하고 미워하는, 힘 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약이고 병인 사람들.
_ p.269
멀어져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까이에선 도저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멀리 물어선 후에야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가족인 것 같다.
때로는 그 무게에 눌려 숨이 막히다가 어떤 날에는 나를 세상에 발 딛게 해주는 무게에 감사하기도 한다.
짐 같고 보물 같고, 병 같고 약 같은 그런 존재.
너무 가까워서 때로는 더 큰 상처가 되고, 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만, 멀어지면 가장 따뜻한 이불이었고,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게도 가족은 그런 존재였었다.
'할머니'라고 쓰고, 제일 처음 써진 단어는 '미안해'였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른이 되고 나서 나는 한 번도 할머니가 필요한 적이 없었다. 아마 할머니는 어른이 된 내가 필요했을 텐데,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려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달아나고 싶었고, 끝내는 성공했다. 그래놓고 사과를 하면 안 되는 거였다. 할머니가 용서해줄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용서했으니까. 늘 그랬으니까.
_ p.194~195
나는 '엄마'라고 쓰고, '미안해'라고 쓴다.
엄마가 아프고부터는 늘 그랬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늘 그렇다.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만큼 어른이 아니었던 나는 엄마를 잃고, 뒤늦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어른이 된 내가 필요했을 엄마에게서 나는 도망친 것만 같다.
자꾸 그런 마음이 들어서, 자꾸 마음이 아리다.
그럼에도 자꾸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은, 엄마가 용서해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늘 그랬으니까.
매번 자식들을 용서했으니까.
그리고 자식이란 존재는 늘 이기적이니까.
책을 읽다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마음이 일렁였다.
바다 건너 멀리멀리에 살아서 볼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마치 죽음으로 떠나버린 엄마와 나의 관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질 수 없다는 것,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참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내가 만든 가족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같은 것이, 내가 떠나온 가족으로부터 남겨지는 것 같다.

어느 새벽, 자려고 누워 있는 내게 남편이 '친구 스위치'를 켜달라고 했다. 우리 부부의 작은 약속이었다. 한 사람이 요청하면, 아내나 남편의 역할은 모두 내려놓고 친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친구란 대화를 하는 동안 절대 객관적으로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집중해서 들어주고, 격하게 공감해주며, 무조건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A가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힘들게 해"라는 말에 평상시라면 "너도 잘못한 부분이 있네"라든지 "이렇게 해봐"와 같은 판단과 조언이 가능하다. 그런데 친구 스위치를 켜게 되면 할 수 있는 말은 "저런, A가 똥(실제로는 더 심한 말을 한다)이네. 너무 힘들었겠다. 걔가 너한테 그러면 안 되지"와 같은 추임새들뿐이랄까.
_ p.042~043
지금 내게 가장 간절한 것은 바로 "친구 스위치"다.
제발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되잖아", "이렇게 해", "내가 봤을 땐 말야~" 같은 말들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내가 그들에게 원한 것은 해결책이나 충고,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그저 '속상했겠다'라는 위로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나는 분명 누군가의 '속상함'에 '공감'하며 '괜찮냐고', '많이 속상하겠다'고 대꾸를 하는데, 어째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자기식의 잣대로 재단하고 결정해서 내 감정까지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객관적이고 현명한 사람이고 싶은 그 사람의 욕구는 다른 곳에서 충족하면 좋겠다.
나의 위로는 그렇게 달게 삼켜놓고, 뱉어내는 건 죄다 현명함을 가장한 날카로운 악의뿐이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상대방의 상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막말에 가까운 악의들)
나는 그저 '위로'하고 '공감'할 줄 아는 그런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위로를 바라는 사람에게 자기식대로의 행동 패턴을 강요하고, 단정 지어 옳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지쳤다.
그것이 가까운 사이라면 더더욱.
'친구 스위치'
부부 사이에만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너무 쉽게 남의 상처에 칼질을 하는 사람들의 무수한 혀에 '친구 스위치'를 달아주고 싶다.
정말 위로가 필요한 날, 제발, 닥치고, 위로만 해주는 사람이 ... 우리에겐 간절하니까.
충고도 조언도 모두 좋다.
하지만 그런 건 누군가 상처받은 날에 상처 위에 뿌리는 소금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거 아닌가.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는 품, 그런 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
남편과 나도 '친구 스위치'를 서로에게 달아줘야겠다.
조언이 필요한 날도 있지만, 살다 보면 위로가 필요한 날들이 더 많으니까.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라는 말이 무책임이 아니라 묵묵함으로 들리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스칼렛의 대사가 희망을 노래하는 것처럼, 이 말도 내게는 희망의 언어로 들린다.
내일 일은 모르겠지만, 오늘은 열심히 제대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로 들리니까 말이다.
내일 일은 대부분의 사람이 다 모른다.
그럼에도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느라 오늘 하루를 허비해버리는 일이 너무 많다.
나 또한 가끔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오늘 하루를 소진해버리고 만다.
어떤 내일이 와도, 오늘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내일은 그냥 내일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오늘을 묵묵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삶은 그런 것이다.
내일에 무엇이 담겨있든, 오늘에 온전히 집중하며, 오늘의 행복을 누리는 삶.
보라보라에서 건져올린 행복은 바로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는 삶이 아닐까 싶다.
지금에 온전히 머무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바다에 떠 있는 상태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처음이었다. 내가 지구를 이루는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인, 그것도 아주 작은 존재라는 걸 보라보라섬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물론 이 모든 것, 그러니까 섬, 바다, 만타레이 같은 자연은 그럴 의도가 없다. 아름다울 때 아름다우려는 의도가 없고, 모든 것을 앗아갈 때도 앗아가려는 의도가 없다. 그저 그곳에 늘 있다.
_ p.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