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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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권리만큼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명징하고 엄정한 소세키식 개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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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도서관 - 천천히 오래도록 책과 공부를 탐한 한국의 지성 23인, 그 앎과 삶의 여정
장동석 지음 / 현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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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지성인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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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 해봤니?

비오는 날 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흔한 이별노래들론 표현이 안 돼.

너를 잃어버린 내 느낌은

그런데 들으면 왜 눈물이 날까.

 

거실 바닥을 닦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에 잠시 회상에 잠겼다. R.ef의 이별공식. 지금도 내 입술은 자연스럽게 흥얼흥얼. 권투선수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체육 선생님은 실기 시험으로 스포츠댄스? 에어로빅? 어쨌든 5분가량의 체조를 짜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친구 몇몇은 우선 배경음악부터 고르자 했고 나와 HFM라디오 덕후였던 덕분에 이런저런 노래들을 좀 아는 편이었다. 적당히 리듬감도 있으면서 후지지도 않는 이별공식으로 낙점. 안무를 짜는 과정에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며 삐지기도 했지만 틈만 나면 팔다리를 휘두르며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연습한 결과 우리 조는 를 받았다. 체육선생님은 구성지게 잘 짰다면서 조회 시간에 단상에서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셨고 우리는 그 또래 여자아이들답게 꺄악, 어후, 도리도리, 요란법석 거절을 했다. 사실 나는 이제와 고백하건데 비 오는 체육시간을 기다리던 소녀였다. 뛰는 게 싫어서, 쥐뿔도 없는 권투선수 출신 체육선생님의 인생사가 듣고 싶어서. 단단하고 까무잡잡한 차돌멩이 같던 선생님의 입에서 팡세의 주옥같은 명언들이 막힘없이 흘러나올 때, 작지만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시골중학교의 나른해 빠진 다른 선생님들에게서 볼 수 없는 정열과 의지가 번뜩일 때, 남몰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 것도 같다. 이제는 이름 석자도 잊었지만 영화 코코에서 이야기하듯 내가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한, 그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좀 더 나중에 선생님이 주로 결손 가정 아이들로 이루어진 권투부를 꾸려 지역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역시 선생님답다, 싶었다. 겸손한 인터뷰 내용도 여전했다. 나는 체육을 싫어하는 학생이었고, 공이나 던져주고 사라지는 몇몇 체육 선생님들에게 실망한 참이었고, 선생님 눈에 사랑스런 학생으로 보여질만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R.ef의 노래처럼 아련하고 따듯한 향수에 젖는다. 화창한 날에는 게으른 소녀들이 조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도록 열렬히 뛰어다니고 비오는 날에는 나를 생각하는 갈대로 만들어주셨던 선생님. 제 직업에서 사기를 치는 너절한 인간들을 볼 때, 그리 될까 경각심이 들 때, 선생님의 한결 같던 직업정신을 떠올리면 풀려버린 사지와 척추가 꼿꼿이 다시 서는 느낌이다.

 

영화 남한산성을 뒤늦게 찾아보며 남편은 내게 그랬다. 당신은 김상헌 같은 사람이고 나는 최명길 같은 사람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에 견줄만하냐고 서로를 실컷 비웃어준 다음 맞다고, 잘 봤다고, 나는 스스로 뱃가죽을 가르는 한이 있어도 항복은 못한다고, 그러니까 까불지 말라고 응수했다. 남편은 철없는 애송이 보듯 나를 향해 코웃음을 친 다음 자신의 얍삽한 기회주의가 나라를 구할만한 융통성이라도 되는 듯 거만을 떨었다. 나는 일평생 저런 사람들을 존경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저런 사람들 덕택에 생명과 자리를 유지하고 사는 것 같은 불쾌미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같으나 그 가치가 다를 때 우리는 얼마만큼 타인을 존중할 수 있을까. 한 줄기의 강이 가로막는 가소로운 정의여!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 체육선생님의 인생 도서. 팡세의 명언이다. 일찍이 R.ef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이, 새로운 사람을 사귈 필요도 없이, 그 허망한 욕심들은 접어두고 과거의 페이지들을 숙독하여 그 깨달음을 실천할 수 있다면 현자가 되고도 남겠다.

 

모두가 다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할 필요는 없는 거라 생각을 해.

저마다 감정은 각자 다 다른 거니까.

각자 나름대로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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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하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으면 좋았겠지만 몇 분 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단련 또는 제련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교실에서는 학교폭력이라든가 인권침해 같은 분란이 일어나기도 쉽지 않다. 나라는 사람은 아이들에게 상처도 입지만 기운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은 잠시 뿐. 좁은 교무실에서 보고 싶지 않아도 눈앞에 있고 알고 싶지 않아도 터득이 되는 불화의 정치를 보고 있자니 명치 통증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학기 소감을 물어오는 다정하신 선생님께는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한껏 순화된 표현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부재중일 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곰곰이 떠올리자면 짠하게 밀려오는 뭉클함 같은 것이 있다. 반면교사라 하지 않던가.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인데 나 역시 오래 머물면 그들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한 환경은 나를 열정적인 독서가로 만들어 주었다. 에머슨부터 논어까지, 무릎을 치며 읽어 내려간 구절이 얼마나 많던가. 에둘러 말하는 인간학인 문학과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인간학들에 관심이 갔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독서에 몰두하다 보니 얻은 것이라고는 인간에 대한 엄청난 통찰은커녕 견비통과 위장병뿐이지만 습관적으로 모든 것에 원인 제시,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는 나는 마치 신이 나를 일부러 이곳에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꾸준하고 치밀하게 상대를 읽고, 이해하고, 미워하거나 좋아하고, 잽 또는 어퍼컷을 시도했다가는 뭐하는 짓인가. 혹시 내 인생이 트루먼쇼인가. 당혹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게 밝다, 솔직하다, 깔끔하다, 등 긍정적 수식어를 붙여주며 나를 파악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들이 나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적나라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면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는 것 같은 혼란과 짜증에 경악해버리겠지.

 

그 사이 영달이는 내 주변 인물들의 이름을 다 외웠고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잘잘못을 대충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아직 나보다 말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찰과 침묵에 능하다는 면에서는 훨씬 강자임에 틀림없다. 아이 앞에서 책잡히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방학에도 쉬지 못하고 머리와 손발을 놀리는 나도 참 피곤한 인생이다. 상대의 가슴 한복판을 파고드는 독설은 나를 닮은 데다 남편의 서늘하기 짝이 없는 새침함까지 빼닮아서 당최 만만치가 않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가끔 머릿속에서 단단한 견고딕체로 둥둥 떠다니곤 한다. 면피할 수 없는 자리, 부모.

 

 

 

 

 

 

 

 

 

 

 

 

 

 

 

그리고 요즘 읽고 있는 책. 안개의 나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유명한 김광규 시인의 시선집이다. ‘크낙산의 마음’, ‘나무처럼 젊은이들도와 같은 시들은 너무 좋아서 옛 시집에서 찾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도 했는데 좋은 시들이 가득 담긴 양장본 시선집으로 나오니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선물과도 같다.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과묵하고 점잖은 교수님이셨을텐데 시들을 읽다 보면 갈등, 회한, 연민 등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다채로운 감정들이 읽힌다. 요즘의 어떤 시들 마냥 수다스럽지도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다. 지극히 평이하고 단순한 시어들인데 한 번 더 읽어보게 되고 곁에 두었다가 마음이 산란한 날, 위로나 수양 차원에서 읽어보고픈 시들이 많다. 누가 나를 보지 않아도 내가 나를 보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 아픈 나를 나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 시를 찾고 시를 읽게 되는 것 같다.

 

그 손

- 김 광 규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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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은 사람도, 바람도, 구름도 모두가 천천히 흘러간다. 아침엔 티라노사우르스 모양의 구름이 층을 지어 조용히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첫 출근 후 보름 남짓 지났다. 아침마다 열 한 명의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을 돌고 하루에 두 번 정도 만난다. 아이들이 별관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수업 외의 시간은 대개 고요하다. 영어교과실에는 철 지난 사전, 스토리북, 영화 dvd들이 빼곡하고 이 공간을 거쳐 가신 선생님들의 흔적과 종종 마주친다. 수업 시간, 모기약은 필수이며 청량한 바람은 서비스다. 일대일로 지도할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고 역동적인 그룹 활동은 불가하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아이들은 사는 곳을 닮아 있다. 반짝반짝 하다기보다는 어쩐지 그윽하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 꼬박꼬박 수업을 하고 쉬는 시간마저 저당 잡힌 채 빼곡한 일정을 숨 가쁘게 소화하며 지내다가 이런 여유를 만나니 처음엔 좀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던 대로 하자. 시골 아이들이라고 해서 단어를 덜 외워도 좋다거나 진도를 천천히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처음엔 버거워 해도 나중에는 잘 따라온다. 다만, 여유가 있으니 칭찬도 고루고루 해줄 수 있고 모든 질문에 성의껏 답해줄 수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장점을, 좋은 점을 최대한 보기로 한다.

 

   영달이는 다행히 할머니와 잘 지내고 있다. 수업을 마치면 할머니 손을 잡고 돌아와 마늘도 찧고, 고스톱도 치고, 종이접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엄마, 아빠가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아빠와 함께 우쿨렐레도 연주하고... 나름 알찬 생활을 하고 있다. 학원에는 보내지 않았다. 나중엔 원하지 않아도 보낼 수밖에 없는 때가 올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엄마가 우리 곁에 더 오래, 건강하게 계셔 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학교 오는 길 저 너머로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개나리 움트는 봄이 막 시작될 무렵 이모와 마주앉아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제 이모를 떠나보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오열하는 엄마를 달랠 여력도 없이 영정사진 속에서 가을하늘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이모를 보니 나 역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밤에 잠이 들었다가 잠시 깨었을 때, 이모의 목소리가 방울소리처럼 귓전에 계속 울리는 것 같아 정신이 맑아졌다. 대학 기숙사로 떠날 때 이모가 사주신 이불로 4년을 지냈다. 임용고시 2차 시험이 있던 날, 밤새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고 이모는 택시비를 갖고 이른 아침부터 달려오셨다. 영달이가 태어났을 땐 조리원에 오셔서 우리 가족의 앞날을 응원해주셨다. 우리 엄마도 해줄 수 있는 일을 이모니까, 이모라서 해주신 것이다.

 

   어느 소설 제목처럼 이제 나에게 남은 하루하루는 작별의 날들 뿐인가 보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니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어떤 어른들은 애도의 시간을 보낼 틈도 없이 다시 담담한 얼굴로 일상으로 복귀하던데 나란 사람은 기억과 한 몸처럼 부벼대며 거의 못 헤어 나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 벌써부터 두렵고 막막하다. 연습도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이별의 순간들. 이 곳으로 들어와 고요하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깊어지고, 조금 더 담대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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