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사람도, 바람도, 구름도 모두가 천천히 흘러간다. 아침엔 티라노사우르스 모양의 구름이 층을 지어 조용히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첫 출근 후 보름 남짓 지났다. 아침마다 열 한 명의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을 돌고 하루에 두 번 정도 만난다. 아이들이 별관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수업 외의 시간은 대개 고요하다. 영어교과실에는 철 지난 사전, 스토리북, 영화 dvd들이 빼곡하고 이 공간을 거쳐 가신 선생님들의 흔적과 종종 마주친다. 수업 시간, 모기약은 필수이며 청량한 바람은 서비스다. 일대일로 지도할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고 역동적인 그룹 활동은 불가하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아이들은 사는 곳을 닮아 있다. 반짝반짝 하다기보다는 어쩐지 그윽하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 꼬박꼬박 수업을 하고 쉬는 시간마저 저당 잡힌 채 빼곡한 일정을 숨 가쁘게 소화하며 지내다가 이런 여유를 만나니 처음엔 좀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던 대로 하자. 시골 아이들이라고 해서 단어를 덜 외워도 좋다거나 진도를 천천히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처음엔 버거워 해도 나중에는 잘 따라온다. 다만, 여유가 있으니 칭찬도 고루고루 해줄 수 있고 모든 질문에 성의껏 답해줄 수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장점을, 좋은 점을 최대한 보기로 한다.
영달이는 다행히 할머니와 잘 지내고 있다. 수업을 마치면 할머니 손을 잡고 돌아와 마늘도 찧고, 고스톱도 치고, 종이접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엄마, 아빠가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아빠와 함께 우쿨렐레도 연주하고... 나름 알찬 생활을 하고 있다. 학원에는 보내지 않았다. 나중엔 원하지 않아도 보낼 수밖에 없는 때가 올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엄마가 우리 곁에 더 오래, 건강하게 계셔 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학교 오는 길 저 너머로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개나리 움트는 봄이 막 시작될 무렵 이모와 마주앉아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제 이모를 떠나보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오열하는 엄마를 달랠 여력도 없이 영정사진 속에서 가을하늘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이모를 보니 나 역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밤에 잠이 들었다가 잠시 깨었을 때, 이모의 목소리가 방울소리처럼 귓전에 계속 울리는 것 같아 정신이 맑아졌다. 대학 기숙사로 떠날 때 이모가 사주신 이불로 4년을 지냈다. 임용고시 2차 시험이 있던 날, 밤새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고 이모는 택시비를 갖고 이른 아침부터 달려오셨다. 영달이가 태어났을 땐 조리원에 오셔서 우리 가족의 앞날을 응원해주셨다. 우리 엄마도 해줄 수 있는 일을 이모니까, 이모라서 해주신 것이다.
어느 소설 제목처럼 이제 나에게 남은 하루하루는 작별의 날들 뿐인가 보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니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어떤 어른들은 애도의 시간을 보낼 틈도 없이 다시 담담한 얼굴로 일상으로 복귀하던데 나란 사람은 기억과 한 몸처럼 부벼대며 거의 못 헤어 나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 벌써부터 두렵고 막막하다. 연습도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이별의 순간들. 이 곳으로 들어와 고요하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 더 깊어지고, 조금 더 담대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