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연수에서 친한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 빼고 다 행복해.”라는 말을 거의 외치듯 말해서 좀 놀랐다. 막상 커튼 열고 보면 걱정 하나 없는 집이 어딨겠냐고 뻔한 말을 건넸지만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 흩어져버렸다. 그 선생님의 건강한 아들딸과 걸출한 미남 남편을 떠올려봤다. 아들은 중3 마지막 해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다. 말하기 수행평가 때, 몇몇 아이들이 이순신 장군이나 워렌 버핏 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어머니라고 말했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너무 모른다.

 

 

  세상이 거대한 침묵처럼 느껴진다. 질문을 던지면 안개가 내려앉는 기분이다. 어떤 부재는 부재함으로써 더욱 또렷해진다. 나태주 시인이 언젠가 유튜브에 출연해 가장 힘든 감정이 ‘그리움’이라고 얘기했던 생각이 난다. 격하게 공감했다. 어떤 감정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무게가 가벼워질지, 혹은 더 무거워질지는...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일상을 산다. 그리움조차 루틴이 된다. 생각나면 생각을 하고, 그 와중에 밥을 먹고, 치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간직 중인 반찬들을 보면서 그리워하다가, 수업 시간에 가정법을 가르치며 만약 내가 ~했다면 달라졌을까,를 상상하고 남편이 윤도현의 사랑two를 안도현의 사랑two라고 해서 구박하다가는... 이 사사로운 에피소드들을 공유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 문득 침통해진다.

 

 

  다사다난한 연애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르트르 곁에 남았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자신 사이에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바람이 통하듯 투명한 관계라는 것이 그처럼 희귀하다. 말로 해소할 수는 있어도 말로 해갈까지 가능한 사이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다. 말은 끊임없는 오해와 갈등을 불러오고 주식시장에서나 사용하던 ‘손절’이란 말이 횡행하며 인간시장이 되지 않았던가.

 

 

  여전히 책과 책 읽기를 사랑하는 나는 죽은 이들과의 대화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긁고 긁히다가, 안온하고 고요한 책의 세계로 침잠하곤 한다. 그럼에도, 가을하늘처럼 쨍하던 그 목소리가 그립다. 그 목소리의 물성이 사무치게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 가슴 깊이 꽂히던 얼음송곳 같던 그 말들에, 그 사랑에, 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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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들을 꺼내어서 활자로 풀어놓고 싶은데 언젠가부터 그것이 잘 되지가 않는다.

페이스트리 같던 마음의 결이 틈 없이 단단한, 뻔한 맛의 쿠키가 되어버린 것 같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알약 한 알의 작용이라기엔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핑계 같다.

 

아직 정리가 덜 되어서일까.

아니다. 쓰면서 정리해 나가곤 했었다.

정리할 수 없어서일까.

아니다. 그 정리할 수 없음이 곧 글이 되곤 했었다.

 

나 대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영화를 보고,

나 대신 내 슬픔을 읽어주는 활자를 읽는다.

분명 공감과 위로와 진실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오늘도 읽는데,

이제는 쓰고 싶다. 이렇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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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수줍고 차분한 목소리. 누구니? 선생님, 저 ○○이에요. 아, 그래그래. S구나. 잘 있었어? 오랜만이다. 이제 네가 몇 학년이지? 선생님, 저 고3이에요...

 

그렇다. 코로나의 정점을 지나던 즈음, 전근 온 지금 이 학교에서 처음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이 그새 고3이 되었다. 몸집보다 조금씩 큰 교복을 입고 동그마니 앉아 있던 귀여운 중학교 새내기들이 대입 수시 원서 마감 중인 것이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시시때때로 전원 귀가조치 방송이 나오던 그 무렵에도, 우리는 마니또를 하고 벼룩시장을 열고 연극을 하고 소소한 기념일들을 자축하며 성실히 친해졌다. 마스크를 쓴 채, 서로의 입모양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눈빛으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새 학교에서의 첫해를 무탈히 보냈었다.

 

그 사이 세월은 흘러 올해 이 학교에서의 마지막 근무다. 햇수만으로 보면 사실 지난해 떠났어야 맞지만 나에게, 내 주변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S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움과 회한, 속절없음이 복잡하게 스친다.

 

주님의 뜻과 달리 견제와 경쟁이 난무하는 미션스쿨에서 S는 나름 괜찮은 성적으로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에 원서를 넣은 상태였다. 소위 우주상향은 아닌 듯한데도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숏컷에 무쌍, 스팽글이 달린 까만 점퍼... 손재주가 좋아서 각종 행사 때마다 재능발휘를 하던 깜찍하고 개성 넘치던 소녀였는데, 그 유니크한 당당함을 좋아했는데, 대학 입시 앞에서는 그저 여느 여고생들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얼마나 두렵고 쓸쓸했으면 수년 전 담임을 소환했을까 싶어 빨래를 개다 말고 내가 가진 모든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영어 시간에 관계대명사보다는 관계 맺기에 더 열중했던 그 시기가 아스라할 지경이지만, 마스크가 헐거워질 때까지 즐겁게 썰을 풀던 때가 있긴 했나 싶을 만큼 우리의 대화는 성적, 대입, 망해가는 교육 현실 등으로 우울하게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고1인 내 딸을 위해 참고할 만한 정보는 없을까 싶어 S가 제공하는 정보에 귀 기울이는 나 자신을 보라...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중3 아이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라고, 정말 많이 준비해서 와야 한다고 조언하는 S는 이미 내 기억 속, 장난스런 눈빛을 반짝이던 그 사춘기 소녀가 아니었다. 저는 똑같은 건 싫어요, 라고 말하던 그 당찬 아이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여전히 문과라서 황송하고 의치한약수반도체에 열광하는 아이들에게 행복은 연봉 순이 아니라고 설파하곤 하지만, 이미 세상 다 산듯한 얼굴로 나를 생경하게 바라보는 중학생들도 적지 않다.

 

나는 S에게 거의 다 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입시의 끝을 뜻하는지, 이 시절의 끝을 뜻하는지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다. 똑같은 것은 싫다던 네가 어느새 남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때의 네가 사라진 것은 아닐 거라고. 대학 간판이나 연봉이나 스펙으로 설명되지 않는 너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은 조금만 더 가자. 그리고 다 가고 나면 잠시 멈춰 서서, 그때의 너를 다시 만나면 좋겠다. 마스크 너머로 눈빛을 주고받던 그해의 아이들과, 아직도 세상이 정해놓은 답을 믿지 못하는 나와, 어쩌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S에게. We’re almost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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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한 편의 시로부터 - 마흔한 명의 시인이 들려주는 내 인생의 시
김기택.조용미 외 지음, 이종민 엮음 / 태학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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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로 혼잡한 세상 속에서 지그시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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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세트 - 전2권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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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끝내 살아남았다. 세상이 그녀를 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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