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윤대녕 지음 / 중앙일보사 / 1997년 3월
품절


요 몇 년 사이에 나는 극도의 소심증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나는 내 처지에 대해서 별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산다는 것이 하나의 견딤, 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무엇에 대해서건 불만을 갖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란 걸 알게 마련이다. 인생이란 애초부터 바둑판의 돌멩이처럼 제 행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아무리 기를 써고 덤벼도 좁디좁은 제 위치의 소극적인 영역, 그러니까 그 한계의 부동성을 깨닫게 되고 만다. 설혹 용케 바둑판을 벗어난다 해도 떨어지게 되는 곳은 저 신호등조차 없는 고속도로 한복판 같은 곳이다. 어쨌든 사람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견뎌야 한다. -26쪽

"저 한결 좋아진 것 같아요, 그치 않아요? 피돌기도 제법 느슨해지고 어제 막 결혼한 여자처럼 안정감이 느껴진다구요."
"그러니까 서둘러 결혼하라니까. 혼자서 마음을 조율하며 살기엔 이미 나이가 차버린 거야. 평형 감각을 잃지 않고 살려면 우선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해."
"아무튼 괜찮은 밤였어요. 오늘부턴 가계부를 써야지 싶어요."
"가계부?"
"왜 그렇게 놀래요? 규모있게, 빈틈없이 살고 싶단 얘기에요. 충동 구매 따윈 하지 않구요."
"충동 구맨 또 뭐야."
"그쪽에 관한 한은 충동 구매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는 얘기에요."
"난 노예시장 출신이 아닌데."
"실은 방문 판매였어요."-161쪽

불행한 자와 함께 있으면 불행해지게 마련이다.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불행한 자는 행복한 자를 그냥 두지 못하는 법이다. 상대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한시도 자기 불행을 견디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내, 승미에게서 나는 여태껏 그걸 보아왔다. 나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랑하는 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제는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상처란, 어쩌면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욱 고통받게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 자신도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모양이다. -168쪽

"이기심이란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란 거예요. 이쪽을 얼마간 희생하면서 어설프게 상대를 생각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기심이 나아요. 우선 상대를 위해서 말예요.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해요?"-184쪽

"왜 사람만이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절대 시간을 잃어버린 탓이야. 물고기나 새들은 저마다 몸 속에 시계를 가지고 있어. 지구의 공전 주기에 따른 시계 말이야. 그 시계는 틀리는 법이 없잖아. 일정 주기가 되면 정확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찾아오곤 하잖아. 이쪽에서 새들이 날아가면 지구 저편에서는 새들이 날아오고, 강에서 물고기들이 떠나가면 바다에서는 물고기들이 돌아오듯이 말이야. 그런데 유독 사람만이 상대적으로 시간을 느껴." -197쪽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는 문득문득 무한이란 말을 생각해.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 무한의 전면이 보여. 벌레 구멍을 발견하게 되면 저기 은하수를 지나 무한의 후면으로 날아가 보고 싶어."
유진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섬뜩하기조차 했다.
"세계는 너무 단조롭고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어. 우리는 좁은 성냥갑 속에서 단 한 번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 성냥개비와도 같은 존재들이야. 어쩌면 죽음이 앞당겨질수록 그만큼 오래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누군가의 말처럼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자는 없어."
"황도십이궁. 하늘을 일주하는 열두 개의 성좌. 태양이 이 십이궁을 도는 데 꼭 일 년이 걸린다고 해. 태양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계판이야. 시계판을 벗어나야만 무한의 후면으로 날아갈 수 있어."
"밤하늘은 죽음을 불러들이는 화사한 함정이야."-200쪽

"학생도 차츰 알게 될 거예요.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뭔지. 그게 점점 쓸쓸해져 가는 과정이란 것도 말예요. 학생 나이 때는 모든 게 명암처럼 뚜렷하고 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나이가 들다보면 자꾸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겨 거기 휩쓸리게 돼요. 그러다 보면 내가 아주 작은 존재라는 사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그걸 깨달아 가는 게 또한 살아가는 일이란 것도 말예요. 하지만 그애는 영영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누가 가지고 놀다 얼결에 놓쳐버린 풍선 같은 애란 말이죠." -204쪽

내가 바라보는 것은 늘 전면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에 의해, 과거에 의지하여, 과거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삶에 있어서 뒤가 없는 앞이란 있을 수가 없다. 과거가 없는 인간은 늘 실종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가끔 과거라는 보금자리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늘 시간의 줄에 매달려 살아왔다. 과거 없이 산다고 해서 뭐 큰 지장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살다보면 때로 음주 운전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심검문을 받게 될 때 내가 무면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는 심정 이해하실는지. 과거란 그렇듯 자신에 관한 일종의 면허증과도 같은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과거는 다만 시간의 쓰레기일 뿐이라고 말들 한다. 그렇게 외면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외면할 과거가 나에겐 없다는 것이다. 현재에 속해 있으려면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두 배의 속도를 내야 한다. 때로는 가속도가 필요하다. 무면허니까. 캄캄한 뒷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꿈속에서도 미친 듯이 질주해야 한다. -240쪽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간에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아무리 무덤 속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나 기쁨, 혹은 슬픔이나 괴로움처럼 어쩌다 끊어지고 이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 완전히 동일한 나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적용되고 똑같은 속도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깊이 사색하며 살아가는 거다. 시간은 모든 것에 평등하다. 나는 오늘 이 절대적 평등을 믿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련다. 살아가며 느끼게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 용서되지 않은 시간, 이 추운 겨울의 막막함, 혼자라는 두려움, 혹은 서툰 사랑 하나하나까지도, 이 모든 것을 뜨겁게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야지.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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