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자유 사계절 1318 문고 11
채지민 지음 / 사계절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집에 돌아와서도 오빠의 편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내겐 오빠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오빠가 사용했던 붓 하나를 하영이 몰래 내 방으로 가지고 온 게 전부였다. 결과적으로 훔친 것이지만, 하느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거라 믿었다. 어쩌면 내가 내 호흡에 겨워 힘들어하지 않도록 착한 악마를 보내시어 내가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 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 p. 141

주인공 수빈이를 보면서 학창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아마 찾아보면 그 시절 일기장 어딘가에 남겨놓았을, 이제는 누군가의 글을 통해서나 영상을 통해서가 아니면 속속들이 떠올리기 힘들어진, 미세하고 불투명한 청소년기의 감성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만약 지금 당장 책을 쓴다면 어쩌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내 글의 주인공은 침착하고 조숙한 수빈이에 비하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처럼 훨씬 더 수다스럽고 산만하면서도 불안정할 것이긴 하다.

학창시절의 나는 어떤 생각에 골몰했다가도 후다닥 그 생각을 바꿔버리고, 끝없는 자신감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큰 소리를 치다가도 금세 사소한 이유로 풀이 죽은 채 심각하게 자살을 떠올려 보기도 하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런 아이였으니까.

책 속에서 수빈이는, 사업에만 헌신하느라 다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아버지, 생활고로 희노애락의 표현이 사라져버린 어머니, 말을 더듬는 언니, 당최 속을 내비치지 않는 오빠, 앞으로 태어날 동생까지, 가장 가까운 관계지만 사실은 애증과 몰이해의 틀을 벗어나기 힘든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를 조숙이 아니라 조로(早老)라 평하며 숙녀로 성장해간다.

개인차야 있겠지만 남달리 감성의 촉수가 발달한 청춘이 으레 그러하듯, 수빈 역시 군중 속의 외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전인격적인 존재로 소통할 소울메이트를 강렬히 원하게 된다.  

그리고 여고생이 된 그녀 앞에 선물처럼 등장한 세 사람. 친구 하영, 세계사 선생님, 그리고 하영의 오빠.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세계 이곳저곳에서 머물다 온 하영은 세련된 사고방식과 여유 넘치는 따듯함으로 수빈에게 다가오고 수빈은 아무에게도 열어보이지 않았던 마음의 문을 연다.

단순히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역사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해 보게 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자아의 본질에 눈뜨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는 법에 대해 일러주는 세계사 선생님 또한 훌륭한 멘토로서 수빈을 이끈다.

그리고 수빈의 첫사랑의 대상이 되는 하영의 오빠. 고백 한 번 제대로 못한 짝사랑으로 그친 후 곧 이별해야 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밖에 없는 어설픈 첫사랑은 수빈이 어른으로 자라는 데 빠져서는 안될, 반드시 거치고 가야 할 소중한 성장통인 것이다.

수빈에게 어둠만을 드리우는 것처럼 보였던 가족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성실히 해내는 모습을 보며 고마움을 느끼고, 결국 멀게만 느껴졌던 돌아가신 아버지마저 이해하게 되었을 때, 수빈은 대학생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목전에 둔 어엿한 스무살로 성숙해 있었다.

그리고는 지금 네가 살며 지내는 그 시간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거나 추억을 간직하지 못한 채로 성장하게 된다면, 정말 오랫동안 마음이 아플 거라고...... - p. 171 낯선 독자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스무살인 수빈보다 좀더 많은 과거가 있다.

이사를 함께 다닌 일기장들과 편지들 속에, 누군가로부터 선물받은 잉크가 다 떨어진 만년필이라든가 날짜와 서점 이름이 적힌 낡은 책의 속지, 좋아하던 유행가와 팝송을 녹음한 공테입 속에, 조각난 기억들이 소리 없이 잠자고 있다.

언젠가 서랍 속의 그들을 불러내서 기록되거나 증거로 남지 않은 내 머릿속의 영상들과 조합하여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은 소망이 있다.

과거의 가난,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심신의 공허감은 서정주 시인이 읊은 것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여름 무등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는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시절의 살결까진 되찾지 못하더라도 그 시절의 마음씨로 돌아가 나의 과거에게 말걸어 보고 싶은 바람, 언젠가는 꼭 그 바람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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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7-27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오랜만이네요. 좋은 책 많이 읽으면서 건강하고 즐거운 여름 보내자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