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
코니 팔멘 지음, 이계숙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11월
장바구니담기


"왜 집착을 하면 안되는 거에요?"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이유는, 엄마 설명에 따르자면, 무엇인가 죽거나 망가지거나 사라져버린 것으로 인해 내가 불필요한 괴로움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그렇게 가슴 아파할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엄마가 덧붙였다.-23쪽

그런 약점은 탐욕이라는 자양분을 먹으며 자라난다. 탐욕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든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진실 탐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점이다. -35쪽

그렇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서 무조건 좋은 점수를 받으려 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것을 잘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대체 전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산수 과목에서 어떻게 최고 점수인 1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좋아하지도 않는 과목에서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는 건 명백히 세상을 속이는 짓이다. 차라리 마이너스 3점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도 아하, 이애는 산수를 싫어하는구나, 그래서 점수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알 것 아닌가?-110쪽

나는 엄마를 졸라 수도 없이 내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반복해 듣곤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아주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를 그토록 고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간절히 소망하곤 한다. 제발 다시 한번 태어났으면, 이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너무 춥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은 5월 어느 날, 어느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고 다시 세상에 나왔으면 하고 말이다. 내 탄생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당시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 사랑하는 아이를 혹시 잃게 될까 봐 헛소리까지 했다는 부분이었다.
-125쪽

내가 알기로는 어른이란,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적당히 체념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좀 우스운 일이다. -145쪽

삶이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유일하게 참된 지식과 유일하게 진실된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잘못된 장소에 보관하고 있는 까닭에 제대로 읽을 수도 없다. -159쪽

엄마 말에 따르면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성공적인 인생을 이끌어갈 확률이 크다. 남자는 반드시 여자가 필요하지만, 여자는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인생의 반려자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게 된 홀아비며 과부들이 꽤 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한 달도 채 못 되어 파삭 쪼그라든다. 그와 달리 남편을 잃고 혼자된 여자는 날이 갈수록 환하게 피어올라 마침내 자기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170쪽

'딜레마'라는 것은 철저히 인간적이다. 동물은 결코 딜레마에 빠지지 않는다.-213쪽

심장과 머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인식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감동스럽고, 사랑이 보다 큰 통찰력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걸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 통찰력이 근육과 두뇌 사이의 결합을 끊어버렸고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독립성을 심장에 부여하고, 거기에 더하여 온갖 미사여구로 아름답게 치장한 다음 여자들만의 전용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바로 그 점을 즐거워할 수 없다.-258쪽

파라다이스는, 그곳을 떠나는 순간, 혹은 그곳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에만 존재한다. 지옥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의 공간에서 파라다이스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파라다이스는 언제나 피안에 존재하는 법이다. 파라다이스는 그곳에서 영원하며 그곳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완성과 현실은 결코 오래 지속되거나 공존하는 법이 없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주 잠깐 동안뿐이다. 그 둘은 서로를 파괴한다.-279쪽

강의에 몰두해 있다가도 문득문득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하루 종일 강의실을 옮겨다니며 공부하는 이 순간처럼 만족스럽고 자주적인 시간은 없을 것이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로지 더 알고 싶다는 끝없는 지적 허기를 달래는 일에만 몰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286쪽

나에게 가장 자신 있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은 그 두 학문의 세계관을 연결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철학자들이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과 심리학자들이 감성이라고 부르는 그 두가지를 나란히 놓고 이해하고 싶었다.-296쪽

"넌 집착이 심해. 누구라도 너한테서 그런 걸 느낄 거야. 이제 한번쯤 너와 거리를 두고 싶어."
아라가 말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될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이상적인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할 때, 서로에게 속하는 것 같은 행동을 취할 때, 그리고 상대방에게 어떤 기분 상태인지를 드러내지 않을 때 가능한 거야. 자신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를 드러내는 것은 친밀감의 다른 표현이거든."
-300쪽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이것은 사랑의 재능을 드러내는 순간에, 그러니까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만 생겨나는 의미다.
그것은 헌신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의존, 자제, 자유로운 선택, 인식 그리고 신뢰와 더 많은 관계가 있으며, 끔찍하게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324쪽

"나를 불신하지 않고는 날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내가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테니까."-337쪽

인간은 가장 인간적인 것을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거든.
화폐의 유통과 마찬가지로, 네가 가치를 인정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합의가 전제될 때 비로소 유효한 거야. 인간이 탐닉 때문에 치러야 하는 가장 큰 대가는, 자기 망상에 빠질 때마다 이 의미심장한 결합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지.-36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