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렸는데도 상하의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 원래 구름이 많이 끼거나 비가 올듯 싶은 날은 일부러라도 밝은 옷을 입곤 하는데 오늘은 그냥 내키는대로 골라든 옷이 모두 검정색이었다. 창 밖을 보니 온통 잿빛이었지만 그냥 처음 고른 옷들을 그대로 입고 출근을 했다. 바깥 날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직 쌀쌀했고 외투를 가지러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귀찮은 마음에 그만두었다. 출근길, 동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산등성이와 그 아래 다소곳이 자리잡은 학교를 번갈아 바라보며 걸을 때, 빛나는 햇살 때문에 눈을 감은 듯 만 듯 한 채, 이마부터 손 언저리까지 따듯하고 상쾌한 아침 기운이 나를 어루만진다는 느낌으로 한껏 나른함을 즐길 때. 시작부터 좋은 날이 바로 그런 날이다. 조금 여유 있게 일어난 덕분에 아침밥을 든든히 먹은 다음 밝은 색 옷을 단정히 차려 입고 집을 나선 뒤 온몸으로 햇살을 받으며 다리를 건너고 타박타박 내 걸음 소리를 즐기며 교문으로 들어서는 그런 아침. 한껏 따스하고 여유로운. 오늘은 그런 아침이 미치도록 그리운 안 그런 아침이었다. 검은 옷은 어둡다 못해 왠지 무겁게까지 느껴졌고 걸을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구두코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윤기를 잃고 창백해 보이는지 참으로 생기 없는 출근길이었다.

커피를 끓인 후 와타나베 준이치의 '마뜨레스 애인'이란 책을 들고 자습 감독에 들어갔다. 이제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싱글 여성의 이야기. 드라마에서 재탕 삼탕 우려먹고 있는 뻔한 이야기. 그래도 어쨌든 이 책은 92년도에 나왔고 그 당시라면 아마 신선하다는 평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 도서관 진열장 맨 구석에 노랗게 바랜 채로 꽂혀 있던 책이었는데 장정일의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후 두번째 쇼킹한 발견이었다. 누가 주문해서 들여놓은 책들일까. 아이들용은 아닌데. 궁금증을 자아내는. 내가 교실에 들어서면 반 아이들은 꼬박꼬박 한 두가지 정도의 농담을 건넨다. 대개는 유치하기 짝이 없고 시시껄렁한 것들이지만 오늘같은 아침엔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쨌을까, 싶을만큼 그런 농담과 애교들이 다행스럽고 고맙기까지 했다. 엊저녁에 문자를 보냈는데 왜 답장을 안해주시냐는 K. 귀찮게 하는 남자들이 많아서 밤엔 핸폰 꺼놔. 샘, 중간고사 잘 보면 뭐해 주실 거에요? 음, 당근 선물을 줘야지. 뭔데욤?? 졸업할 때까지...... 일요일엔 학교 나오지 마라. 이쯤 되면 아이들은 마구 야유를 보내며 보던 책 덮은 채로 드러눕고 책상을 엎는 시늉을 하고 의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등 교실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다. 아이들은 매사 그런 식으로 웃고 떠든다. 유치하고 하나마나한 농담들. 너나 나나 다같이 실없어지고 유치해지는 과정. 그러나 서로 아무런 적의도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음이 터지는 그 순간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이따금씩 꺼내먹는 땅콩과도 같은 것이다. 없으면 허전하고 떨어지면 아쉬운 바삭함과 고소함. 아침은 그렇게 웃으며 넘겼다.

오전과 오후 내내 임정희와 김연우 노래를 틀어놓았다. 날씨마냥 비를 부르는 음색이었다. 커피를 두 잔이나 더 마시며 다음주 연구수업에 사용할 플래쉬 카드를 만들고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다. 몸이 좀 피곤한 탓일까. 생각해보면 해야 할 것도 있고 미리 해두면 좋은 것들도 눈에 보이는데 어쩐지 제대로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이런 날도 오랜만이었다. 할 것이 있으면 얼른 해버리고 가능한 한 많은 여유 시간을 확보하는 게 내 스타일인데 오늘은 하릴없이 온종일 느러져서는 뭘 했다고 말하기도 힘든, 그렇다고 한껏 여유를 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이상한 하루를 보냈다. 퇴근 무렵, 우체국이 어딨냐고 물어오는 원어민 샘에게 어디인지 확실히 모르기도 했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설명하기 귀찮아서 종이에 Woo Che Guk 이라고 써줬더랬다. 그는 우~체~국~이라고 크게 한 번 읽더니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하며 2m의 몸을 흔들거리며 사라졌더랬다. 뭣이 대단히 감사하다는 건지 원. 일주일의 절반은 그와 함께 수업에 들어가고 같은 학교에서 지낸지 이제 곧 일 년째인데도 나는 그를 좀처럼 좋아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를 두려워하고 우리나라 사람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그는 어쩌면 순진하고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사명감을 갖고 그에게 우리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잘대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가 뭔가에 대해 안절부절하고 의심하고 미심쩍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 마디 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GO HOME. 그것도 냉정하고 싸가지 없는 톤으로.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쉬다가 누군가의 홈페이지에서 어떤 글을 읽고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출근길에 울뻔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수도 있지. 힘든 일이 있으면. 닥쳐오는 하루가 버겁다면. 나는 현재 힘든 일도 없고 닥쳐오는 하루는 버겁다고 말하면 그건 오버다. 그런데도 그 사람의 출근길 정경과 이따르는 심정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우는 건 남도 싫지만 우는 건 나 자신도 싫다. 왠 빌어먹을 신파란 말이냣. 그런데도 오늘은 그런 기분이 든다. 김구라나 남궁연 같은 남자 어른, 또는 이금희나 오미희 같은 여자 어른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그런 기분. 엄마도 일찍 잠이 들고 주변은 한없이 조용한데 내 마음만이 끈질기게 심란하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거지. 두 시간 즈음 남았다. 잿빛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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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4-2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렸는데도 상하의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
프란체스카를 생각했다면 조금은 유쾌하지 않았을까.....잠시 잡생각을 하고 갑니다.

깐따삐야 2006-04-27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학교에서 제 별명이 '여자 노홍철'과 '프란체스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