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휘, 제인 마치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인데 개봉 당시엔 내가 미성년이었던 관계로 이 영화를 좀더 나중에서야 보게 되었다. 언론마다 청순미와 퇴폐미를 겸비한 소녀 배우의 탄생 어쩌니 해가면서 대서특필했던 기억도 난다. 사실 이 영화 이후 '컬러 오브 나이트'에 브루스 윌리스와 함께 출연했던 제인 마치는 섹시 스타로 지나치게 과장되고 부풀려져 다소 우스꽝스런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연인'에서의 그녀는 스스로도 인지할 수 없을만큼의 열정을 내면에 가득 품은, 조숙하고 아름다운 사춘기 소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반면에 나는 배우 양가휘의 매력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양가휘에게 반했다는 사람도 여럿 보았지만 연기력이나 배우로서의 능력을 떠나서 일단 내 취향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1920년대 말 프랑스 점령 치하에 있는 베트남 사이공. 이 곳에 프랑스 소녀(제인 마치 분)와 거의 구제불능이라고 볼 수 있는 그녀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절망에 빠져 있고 오빠는 아편에 찌들어 있으며 동생은 우울에 빠져 지낸다.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있으며 소녀는 가족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에서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배의 난간에서 세련된 중국인 청년(양가휘 분)과 마주치게 되고 이들은 이내 운명같은 사랑에 빠져든다. 지역의 최대 부호의 아들인 청년은 그의 침실로 소녀를 이끌고 약 일 년 반 동안 그들의 밀애가 지속된다. 처음에 이러한 관계에 대해 소녀를 타박하던 가족들도 청년이 부자라는 사실에 모두 잠잠해지고, 반면에 청년은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하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두려움에 소녀와 이별하고 중국인 처녀와 결혼한다. 사이공을 떠나 프랑스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소녀, 부두 한 귀퉁이에서는 청년의 승용차가 숨어서 소녀를 말 없이 배웅한다. 그리고 배가 사이공 항구를 벗어나면서부터 소녀는 어디서부터 솟아나오는지 모를 눈물을 펑펑 터뜨린다. 늙어서 작가가 된 소녀가 중국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다시 회상을 마감하는 나레이션으로 끝이 난다.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유학까지 마치고 온 남부러울 것 없는 중국인 청년은 낡고 촌스런 옷차림 속에 가려져 있는 프랑스 소녀의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아직 때묻을 새 없었던 순수를 알아본다. 그는 모든 걸 다 가졌기에 오히려 권태로웠고 반면에 소녀는 낯선 이국 땅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아무런 희망도 없었기에 권태로웠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이끌렸고 비록 다른 이유에서일지라도 둘 다 외롭고 무료한 처지였음을 공감한다. 그들은 그들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섹스에 탐닉하고 서로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너무 가진 것이 많은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릴 용기가 없었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녀는 청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섹스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두 사람은 마치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처럼 담담하게 헤어진다.

과연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사랑의 완성이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사랑에 완성이란 것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엇을 보았든, 서로의 닮은 면을 보았든 아니면 서로의 다른 점에 이끌렸든, 언제 어디에서건 사랑은 부지불식간에 싹틀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부르는 소리에 따라가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되거나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지 않는 한에서라면 말이다. 영화에서 소녀는 청년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보고 난 후 실망감과 역겨움에 자신에게 더 잔인하게 구는 청년의 마음에 대해서도 한 마디 원망 없이 그녀는 그를 받아들였다. 청년은 소녀에게 더욱 강하게 집착했지만 소녀는 청년을 더욱 강하게 사랑했다. 더 많이 사랑한 쪽은 소녀다. 이별의 시점이 왔을 때 떠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과 사랑의 깊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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