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와 수기야마

대학 2학년 때인가. 어느 봄날 저녁 매우 소란한 합동 강의실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학내 영화 동아리에서 무료 관람을 홍보했고 늘 붙어다니던 친구 하나가 나를 그리로 이끈 것이었다. 친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실컷 웃자 했다. 정말로 영화를 관람하던 내내 꽤 넓었던 합동 강의실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영화에는 아주 웃기는 인물이 등장한다. 걸을 때마다 관절이 고장난 사람처럼 반듯하게 각을 맞추어 이동하던 사람인데 아마도 주인공 수기야마의 직장 동료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사람들은 그 사람이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웃어댔고 나도 따라 웃어댔다. 그 사람이 정말 웃겼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땐 그렇게 시끄럽게 웃으면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저 사진 속 중년의 사내에게 공감했고 사교댄스를 배워볼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볼 때만큼은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잊고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던 수기야마와 잠시 한 마음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정한 가족과 예쁜 이층집을 가진 샐러리맨 수기야마(야쿠쇼 고지 분)는 누가 보아도 성실한 가장이자 모범적인 직장인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엇비슷하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그는 마음의 헛헛증을 느끼고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올려다본 사교댄스 교습소의 창가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마이 - 구사가미 다미요 분)을 발견하게 되고 그녀의 알듯 모를듯한 미묘함에 이끌려 수기야마는 급기야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렇듯 대단치 않은 호기심으로 시작한 사교댄스는 밋밋하던 그의 일상에 활기와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고 춤을 배우고 추는 과정 속에서 수기야마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남편의 변화를 의심하던 그의 아내도 사교댄스 경연장에서 댄스에 열중하는 수기야마의 모습을 보고 그 동안 자신이 잘 안다고 믿었던 남편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슬럼프에 빠져 있던 마이에게도 수기야마의 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젊고 예쁜 여자가 아니라 젊고 예쁜 여자가 가르쳐 주는 춤과 바람이 난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신선하면서도 유쾌했다. 어딘가 억눌려 있고 지쳐 보였던 그가 눈빛에 가득 의지를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복잡한 스텝을 배워가는 모습은 때로 장렬하기까지 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상 만사를 잊는 낚싯꾼들처럼, 화투장을 돌리며 온갖 시름을 잊는 노름꾼들처럼, 수기야마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스텝을 밟으면서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는 춤꾼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각자 일상에서 벗어나 흠뻑 취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랬다.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마실 물이 아니라 생에 대한 갈증이라고. 무엇인가를 원하는 갈증이 없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무료하고 적적한가.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빡빡한 일상을 더 잘 견디게 하는 에너지가 되고 활력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들 하나씩 혹은 더 많이 사랑할 대상을 갖고 있거나 찾고 있다. 그리고 낚시와 노름과 춤 속에서 인생을 배우듯이 무엇인가에 빠진 사람들은 단순히 병적으로 중독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더 잘 사는 방법에 대한 진리를 깨우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름다운 일상을 위해 더 많이 미치고 싶다. 더 강하게, 더 뜨겁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