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새해의 첫 번째 출근 도장을 내가 찍게 되었다. 이번주부터 영어 캠프가 시작되면서 근무조로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행정실에서는 케익과 촛불, 샴페인, 폭죽과 함께한 조촐한 시무식도 있었다. 작년, 아니 재작년 이맘 때엔 그 해의 마지막 근무자로 종무식에 참여했던 기억이 났다. 오늘 날짜로 주사님 한 분이 새로 오셨는데 그 분이 새로 오신 분인 줄도 모르고 뻘쭘하니 슬쩍 눈빛만 마주쳤다가 나중에 소개 받고 민망해서리 일부러 냐하핫, 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방학 이후로 너무 오래 은둔했나 보다. 

업무 처리로 학교에 나오신 몇몇 선생님들과 새해 인사를 교환하고 캠프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챙기고 배치고사 때문에 일부러 나를 보러 온 C와 함께 독해 문제를 풀었다. 방학인데 어디 놀러가지도 못하고 다시 시험 준비에 매달리고 있는 C를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은 대개 여러가지로 안쓰럽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다들 나름대로 피곤하고 고달픈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원어민 샘은 캠프가 끝나면 곧 고향인 호주에 다녀올 예정이라면서 관사로 도착할 우편물들과 신문 때문에 걱정이라는 말을 했다. 관사가 비어 있는 사실을 알면 우체국 직원들이 알아서 학교로 가져오니 걱정하지 말라고, 신문은 신문보급소에 전화 한 통 넣어주면 되니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켰지만 그는 여전히 안심을 못한 눈치였다. 지난번에는 인터넷 카드 결재에 대한 의심으로 일주일 넘게 나를 괴롭히더니만 이번엔 또 우편물이다. 예전에 있던 캐나다 출신의 원어민 샘과는 사뭇 다르다. 호주 사람들이 본래 의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한국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적어서 그만큼 믿지 못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인도에 가서 지갑을 조심하라는 주의사항과 같은 충고를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은 건지 아무튼 알 수가 없다. 나에게서 빌려간 물품들이나 내가 계산한 점심값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면서 하여간 자기 것은 되게 챙긴다. 들고갈 사람도 물론 없겠지만 매일매일 오는 영자신문 쯤 누가 나 대신 보면 좀 어때.

출석부 정리도 하고 서류철도 정리하면서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없어서 학교가 평화롭고(?) 조용한 것만 빼면 말이다. 집에서는 입에 거미줄 치도록 침묵하고 들어앉아 있다가 이따금씩 노홍철마냥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며 식구들에게 허튼 소리나 하던 나인데, 오늘은 간만에 일상으로 복귀하여 공개 방송용 화법을 구사했다. 제주도엔 잘 다녀오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방학 잘 보내세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얘들아, 교실은 이 쪽이란다... 흐흐. 왠지 재미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란 사람이 이러한 일상에 대해 남몰래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나날의 시간, 그 시간이 주는 공백을 채워 줄 너무나 당연한 일상 같은 것 말이다. 방학 내내 너무 많이 놀다보면 갑자기 방학 숙제가 하고 싶고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것 같은 기분. 그러나 역시 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오래 지쳐 있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띵가띵가 잠적하고 싶은 기분이 들겠지? 간사하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나란 인간.

오랜만에 각 층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수고했더니 노곤하고나. 캠프 때문에 주말에 한 번 더 나가야 하는데 원어민 샘이 다음 번엔 또 뭘 가지고 칭얼거릴지. 자신이 남의 것을 안 가져가면 다른 사람도 안 가져갈 것이라고 믿어보면 안되나?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하고 정직한데 말야. 제발 너나 잘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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