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 소은

개봉에 맞추어 영화를 보게 되면 대개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나 '아일랜드'와 같은 흥미나 오락 위주의 액션물을 고르게 된다. 실제로 가끔 그런 영화들을 보고 싶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지인들과 함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고르다 보면 관람 도중에 마음을 징하게 건드릴 법한 내용의 영화는 부러 피하게 된다. 영화가 끝난 후 왠지 멋쩍어짐과 동시에 내 눈빛 속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가 추억을 되짚는 모습이나 흔들리는 마음의 결을 다독이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도 신나는 오후를 꿀꿀하게 망쳐버릴 흔해빠진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의 미모라든가 이완 맥그리거의 건재함에 대한 약간 오버 섞인 감탄, 그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대부분의 영화를 개봉이 한참 지난 이후에 혼자 DVD로 빌려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그랬고 이 영화 '동감'이 그랬다. 비록 따끈따끈한 맛은 떨어지지만 가슴 속에 차곡차곡 묵혀 두었던 영화들을 하나 둘 씩 꺼내어서 다시 이야기하는 기쁨이 또 새롭다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다.

1979년에 살고 있는 여대생 소은(김하늘 분)은 선배(박용우 분)와의 닿을듯 말듯한 짝사랑의 설레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고물 무선기 하나를 얻게 되고 개기월식이 진행되던 날 밤, 무선기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에게 교신해 온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인(유지태 분)이라는 남학생. 그들은 시계탑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사실 2000년의 서울에 살고 있는 인과 과거 속에 살고 있는 소은은 어긋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는 믿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인 후 무선기를 통해 사랑에 대해, 우정에 대해, 세상에 대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그처럼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소통하며 공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또 다시 믿기 힘든 인연의 줄로 자신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똑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딱 한 번 서로와 마주친 채 스쳐 지나간다.

나 개인적으로는 배우 김하늘을 좋아한다. 한국 영화계엔 종횡무진 폭 넓은 연기력을 선보이는 전도연이나 닳지 않는 진주처럼 빛나는 자태를 드러내는 이영애가 있고 귀여운 마스크로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뭇 남성팬을 사로잡는 시원시원한 미모의 전지현도 있지만 나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복길이같은 말투로 권상우를 혼냈다 다독였다 하는 그녀,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귀엽고 깜찍한 내숭으로 한 가족을 사로잡던 그녀, 그리고 '바이 준'이나 '동감'에서의 솔직한 눈매를 지닌 청순한 모습의 그녀를 아주 좋아한다. 그것은 김하늘 그녀이기에 가능했던 역할과 이미지였다. 배우 나름으로 노력해서 바뀌는 이미지도 있으나 타고난 이미지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배우 김하늘이 무리한 연기 변신을 시도하지 않고 찬찬히 자신의 색깔에 맞는 역할과 연기를 해내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역시 이 영화 '동감'에서도 그녀는 촌스러움과 청순함의 경계에 서서 70년대 여대생의 이미지를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나 사랑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2000년대에 사는 남학생과 70년대에 사는 여대생이 서로 공감할 수는 있으나 이어질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헤어지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실제의 삶 속에서 굳이 긴 시간차를 설정해 놓지 않더라도 지금 이 사람을 좀더 늦게 만났더라면, 지금 이 사람을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런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은 당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녀는 나를 무척 따르며 좋아했고 나도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공부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고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어서 약속같은 걸 할 수가 없었다."고. 잠시 회상에 잠기셨던 교수님은 바로 웃으시면서 "사랑의 문제를 떠나서 결혼 적령기에 만난 사람이 확률적으로 내 운명의 상대가 되고 마는거지. 운명은 타이밍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강의실에 있던 CC들을 보시면서 "그래도 너희 나이 때에는 쟤들처럼 연애도 열심히 해보긴 해봐야 하는거다."라고 하셨던 기억도 난다. 그 때 아리송하게나마 타이밍이란 말을 이해했고 공감했다. 그 때 나는 무엇에든지 열정적으로 빠져들만한 나이였기에 도리어 산다는 게 힘이 부치기만 했고 자꾸 나이를 먹고 빨리 늙어서 모든 것에 초연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 자신의 어설픔과 성급함 때문에 주변의 많은 것을 놓쳐버리고 소중한 인연들을 싹둑싹둑 잘라내곤 했던 시절이었다. 당최 뭐가 뭔지 분간이 안되던 시절, 다 때가 되면 운명의 그 상대가 나타난다는 말에만 귀가 반짝하던 귀여운 나이였다. 운명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의 유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채로 말이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고 사는 편이 낫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영화 속에서 소은은 인을 통해 우연히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게 됨으로써, 그녀를 설레이게 하고 행복하게 했던 짝사랑의 환희는 일순간 물거품이 되고 그녀를 웃게 해주었던 우정에 대해서도 더 이상 정직할 수가 없게 된다. 소은이 결과에 상관 없이 미래의 인연의 향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면 기대와 가능성 속에서 그녀는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삶의 행복이 하루하루의 만족과 미래에 거는 희망에 있는 거라면 그녀는 행복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 더불어 놓쳐버린 인연에 매달린 그녀는 언젠가 한 번 쯤은 나타났을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타이밍까지 놓쳐 버린 셈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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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1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1-01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othing special~ 여느 때와 다름 없었습니다. 님이 어떻게 보내셨는지는 방금 페이퍼를 읽고 와서 대충 알겠네요. 저도 그와 비슷했어요.
밥 많이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