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섭과 소희
몽환적이면서도 나른한 루시드 폴의 음악과 잘 어울렸던 이 영화는 매우 어둡고 우울했던 배경과 스토리 이면에 두 배우의 반짝거리는 젊음으로 빛이 나던 영화로 기억한다. 영화 속에서 재섭(김태우 분)은 정말 이도저도 뜻대로 안 풀린 채 상처와 불만을 가득 안으로 머금은, 결국 모든 것에 무심해지다 못해 초탈해진 듯한 학원 강사의 얼굴 그대로였다. 소희(김민정 분) 역시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 받지 못한 채 외로움에 치를 떠는, 그것을 반항이나 당돌함으로 한껏 위장하여 내보일 수 밖에 없는 여리고 섬세한 여고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감독은 배우를 잘 골랐다. 옆으로 가방을 매고 서 있는 재섭의 구부정한 어깨와 말은 안해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소희의 크고 맑은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보습 학원의 국어 강사인 재섭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소통하지 않은 채 오직 길거리의 창녀들과만 몸을 나눈다. 그는 그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따분하고 외로운 일상이다. 그런 일상 속으로 소희라는 한 소녀가 뛰어든다. 공부도 잘하고 부유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소희에게 그런 것들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녀는 이해 받지 못함에 괴로워하며 원조교제를 하는 등 자기 스스로를 막 다룬다. 재섭은 이러한 소희에게서 알듯 모를듯한 동질감을 느끼며 점점 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고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서로의 삶에 대해 수수께끼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그러나 임신과 낙태, 어린 여고생이 겪기엔 너무 큰 일들을 겪어버린 소희는 어느 날 부터인가 학원에 나오지 않고 재섭은 소희가 사라진 무료한 일상 속에서 계속 그녀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소희를 다시 만나고 재섭은 소희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이 영화를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에게 말을 걸다, 라고 읽었다. 아직 스무살이 되지 않은 소녀와 아직 사회 속에 완벽히 편입되지 못한 청년은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삶 속의 위선과 구차함을 마주한 이들은 어설프게라도 연기를 하며 살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이 본래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고(박인환-'목마와 숙녀'에서 인용) 저마다 한 통속이 되어 서로의 비위를 맞춰 주며 통속적으로 굴러가는 것임을, 이들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이 택한 것은 왕따 놀이. 사회라는 공간 내에서 연기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바보가 되거나 왕따가 되어야 한다. 바보는 간혹 동정이라도 받지만 왕따는 혼자 고상 떤다고 뒷담화에나 오르락 내리락 하기 일쑤다. 때론 한 번 더 뒤집어서 본래는 왕따가 되기 좋을 스타일인데 바보 연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큰 날개를 숨기고 일부러 뒤뚱거리며 걷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웃고 즐거워한다. 그의 정신은 고고하게 창공을 날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육신이 질퍽한 지상에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 씁쓸한 괴리감을 웃음과 농담으로 채운다.
그래서 재섭과 소희의 왕따 놀이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나는 이들이 작은 동네만 오락가락하는 버스 말고 기차나 비행기도 타 보았으면 좋겠다. 컵라면만 먹지 말고 대파를 송송 띄운 맛있는 라면도 먹어보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씩 정해서 천장 보며 욕해 보기, 그런 놀이도 하면서 놀았음 좋겠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 보고 말 없이 이해하는 soul-mate를 찾았으니 이제 두 사람이 할 일은 안으로 더 안으로 파고드는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같이 해보는 것이다. 지금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슬픔이나 괴로움,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스무살이 되고 서른살이 되면 뭔가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도 별 게 없고 삶은 자꾸만 더 구차해진다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싱싱한 채 살아 있고 더욱이 그리운 그 사람과 함께라면 그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두 사람이 이 영화처럼 솔직하고 간결하고 담백하게 살길 바란다. 때때로 젊다는 게 너무 힘이 드는 나를 포함한 모든 청춘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