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교 근처에 가고 방학이 되니 Y 생각이 났다. 그 때도 겨울이었을거다. 자취방으로 놀러간 나에게 마른 김가루를 얹은 뜨겁고 고소한 라면을 끓여줬던 것이. 한 쪽 벽면을 그득히 채우고 있던 책들과 목욕탕의 비누 냄새가 기억날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Y를 볼 수 없다. 졸업을 한 뒤로 생활에 쫓겨 Y와의 연락을 잊고 지냈고 언제든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났다.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고. 예전에 쓰던 다이어리나 일기장의 귀퉁이에는 Y의 흔적이 남아있다. 색감이나 재질이 독특한 종이에 비스듬히 써 내려간 메모들.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이 든다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넌 나보다 더 했지.

Y를 처음 본 것은 새내기 시절 교양국어 시간이었다. 작가를 하나씩 정해서 조별로 발표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교육학과 대표로 눈에 띄게 작은 여자 아이가 교단에 섰다. 까만 단발머리에 느릿느릿 정감 있는 경상도 사투리,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독특했다. 어디서 봤던 사람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한 편, 세상에 저런 케릭터를 가진 여자아이도 드물거야 싶은 독특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일견 평범한듯 하면서도 특이했고 특이한듯 하면서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나는 단번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후로 우리는 같은 단과대학 내에서 생활했기에 마주치면 눈웃음으로 인사를 나눴고 같은 기숙사 내에서 생활했기에 밥을 먹다가, 기숙사를 오가다가 간혹 마주치면 안녕~ 하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새내기 시절엔 대개 그렇듯, 본격적으로 말을 건네기엔 뭔가로 둘 다 분주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우리가 결정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학기가 되어 동아리 생활을 시작한 나는 괴물같은 선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동아리 생활의 열혈분자가 되어 있었다. 그 날도 어김 없이 동아리방에서 네눔을 쥑이네, 네년을 살리네 하고 있던 중 동아리 문이 빠꼼히 열리면서 익숙한 표정의 쬐그만 여자 아이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Y잖아?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고 서로가 모르는 사이 똑같이 2학기부터 동아리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부터 Y와 나의 활약상은 바야흐로 화려하게 펼쳐진다. 늘상 칙칙+암울+꾸리꾸리+사막사막 했던 동아리는 Y와 나, 그리고 여전히 연락이 닿고 있는 자칭, 빨강 머리 앤 H의 합작으로 완죤 개그 동아리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한 터프했던 총무 언니는 계속 그런 식이면 술을 잔뜩 먹여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도 했으나 우리는 몰라요~ 좋아라~ 하면서 겁나 놀고 겁나 까불고 겁나 웃었다. 우울한 자태로 쇼파에 파묻혀 있던 선배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Y가 췄던 창밖을 보라, 안무는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적시면 생각나곤 한다. 몹시도 그립게. 정말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킥킥킥, 웃음이 삐져나오던 호시절 중의 호시절이었다.

그렇듯 철모르게 즐겁기만 했던 우리도 2학년이 되고 슬슬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껴가는 시기가 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조차 창문에 모래알 비벼대는 소리처럼 짜증났던 시기,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아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언제든 네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던 선배에게 건방진 눈으로 왜요? 라고 물었던 나는 나중에 동아리에 대한 향수병까지 앓게 되지만 당시에는 어느 곳에든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버겁고 귀찮고 신경질 나기만 했다. 나는 혼자서 무한히 자유롭고 싶었다. 뒤늦게 시작된 사춘기였다. 한편 나의 탈퇴로 잠시 갈등하던 Y는 그녀가 열망하던 것이 있었기에 계속 남기로 했고 동아리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웃고 같이 울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변하고 그녀도 변하고 있었지만 그건 각자의 변화일 뿐 우리의 관계에 변화라곤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돌연 휴학을 결심한 내가 복학을 해서 학교로 돌아왔을 때 Y는 마치 멸종 위기에 놓인 새처럼 수줍고 두렵게 변해 있었다. 사람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었고 자취방에 혼자 틀어박혀선 밥도 해먹지 않고 과자만 사다먹으며 단편소설들을 쓰고 있었다. 복학을 한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덮어둔 채 열심히 학과 공부에 매진했고 간혹 신변에 생긴 얘깃거리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Y를 방문하곤 했다. 그녀도 가끔 써모은 단편소설들과 먹을거리를 사들고 내가 사는 자취방을 방문해서 밤이 늦도록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다 가곤 했었다. 밥을 잘 안해먹는 그녀를 위해, 마치 밥을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자취를 하던 나는 반찬을 만들어서 주었고 그녀는 반찬이 있으면 뭐해, 밥을 안해먹는데, 라면서 번번히 거절하곤 했다. 안쓰러웠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을 그냥 가끔만 만나는 것이었고 그녀의 소설들을 읽고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그냥 두었다. 나처럼 시험을 준비하고 평범하게 살길 바랬으나 Y의 고집은 그녀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랬다. 너도 시간이 좀더 지나면 우리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될거야. 사는 거 별거 있더냐.

그러나 Y는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 쿵닥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가 어느 날 Y를 떠올렸고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을 땐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학과에 전화를 했을 땐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겨우 예전에 살던 자취방 주소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메일을 보내면 반송되어 돌아왔다. 전화번호도 바뀌고 그녀가 보냈던 편지 겉봉에는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일하고 싶은 곳이 있다고 간간히 이야기했던 그 곳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Y는 아무런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서울에 가고 싶다 했으니 남동생을 돌봐주면서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과라도 다니고 있을런지 기대도 해보지만 혹, 어디로 시집 가서 조용히 살고 있는지 소설을 쓰러 먼 곳으로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문득문득 Y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도 나를 기억해 줄 지 모르겠다. 이렇게 뻔한 생활인으로 변해 있는 나를 보면 무슨 말을 할지도 궁금하다. 나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사라진 것이 많이 놀랍다거나 원망스럽지는 않다.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숨어 있길 좋아하는 그녀였으니까. 나는 예외가 되리란 생각은 오해였던 것 같다. 누구나 혼자이고 싶은 시간이 있다. 그것은 짧을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Y가 어딘가에서 건강히 잘 살아가고 있길 빈다. 그녀와 함께 했던 기쁨들, 슬픔들, 실수와 몽상으로 점철된 시간들, 우리는 왜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고 착하고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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