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가 항상 신선하고 즐겁기만 하면 좋을텐데 높이 쌓아올렸다가 다시 무너뜨리는 블럭놀이처럼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다. 내 아이의 예쁨과 소중함. 말할 것도 없지만 어미로서의 본능과 역할 이외에 그냥 사람으로서의 또는 여자로서의 욕구와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누군가 정성껏 내려준 커피를 마시거나 모두 잠든 사이 집어드는 책 한 권. 친구와의 전화 통화. 그렇듯 소소한 행위만으로도 쉽게 해소가 될 때가 있지만 이도저도 마냥 답답하게만 느껴져서 그냥 하루 완벽하게 공치고 싶어지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일종의 불안감과 사명감이 단단히 나를 떠받쳐 밖으로 나가는 대신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곤 하는데 책읽기는 무색무취의 부담없는 친구처럼 나를 늘 위로하고 격려한다. 화장대 위에, 식탁 위에, 책상 위에 늘 책이 있다. 때로는 감옥에 갇힌 수인처럼 읽고 있다, 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담배, 누군가에게는 프로포폴, 나에게는 책인가.

 

 

 

 

 

 

 

 

 

 

 

 

 

 

그리고 이 책을 요즘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영화 <더 리더>에서 책을 읽어주는 마이클에 기대어 잠드는 한나의 모습이 있었던가. 엄마 품에서 옛날 이야기를 청하는 아이처럼 책 읽어주는 남자도 나의 로망 중의 하나인데 이 책은 그 욕구를 어느만치 해소시켜준다. 대학원 다닐 무렵 <맥베스>의 문장들을 장렬한 연극톤으로 낭독하며 열강을 펼치시는 교수님의 모습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전혀 다른 스타일로 매력이 있다. 하나하나의 문장들이 전문가의 역량을 선량하게 발휘하고 있으며 그 톤은 더없이 공정하고도 자상하다. 서평집이나 독서에세이에 쉽게 매료되면서도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었지? 싶을 때가 많았는데 이 책은  "독서가, 또는 잠재적 독서가를 위한 고전 즐겁게 읽기"라는 부재를 달아도 좋을만큼 너무 할랑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채로 독자의 주의를 끌며 다채로운 고전의 세계로 안내한다.

 

특히 <아주 사적인 독서>라는 제목과는 달리 고전을 가능한 한 여러가지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읽으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단순한 감상이나 비평의 차원이 아니라 소설의 탄생 배경부터 그 이후까지 전체적으로 조망한 다음 소설이 갖는 사회적, 심리적, 미학적 의의까지 짚어낸다. 그리고는 소설을 읽는 독자, 개인으로 컴백하여 등장인물과 나를 중첩시켜 대단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투시하게끔 돕는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여자를 청어와 송어로 비유하는 대사와 그 대사를 분석한 구절이 나오는데 과연! 이란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래! 송어는 해방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아주 지엽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고전은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텍스트-무한'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속속들이 깊이있고 흥미로운 만화경의 세계가 펼쳐진다.

 

봄방학 중 근무일. 오늘도 학교에 나와 쉬고 있다. 학기 중엔 큰 아이들 때문에, 방학 중엔 작은 내 아이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길게 쉴 수 없기에 짬짬이 쉬는 노하우를 터득해가고 있다. 그 와중에 한 챕터씩 야금야금 읽으며 만나는 고전 속 인물들이 나와 같고 나의 욕망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남몰래 한숨을 쉬기도 한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인간이 먼저인가. 제도가 먼저인가. 욕망과 이성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가. 자유는 과연 모든 가치에 우위하는 존재 조건인가. 환상을 좇게 하는 지식과 현실을 깨우쳐주는 지식은 완전히 다른가. 오로지 한 겹 차이인가... 이 책을 '읽고 있고' '읽어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많은 질문들로 내몰고 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로쟈의 <아주 사적인 독서>역시 서평의 고전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한번 다 읽고나서 다시 한번 더 읽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