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교향악 펭귄클래식 39
앙드레 지드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 동네에서 무심천을 건너면 바로 이웃 동네로 이어진다. 그곳엔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있고 도로 오른편으로 즐비한 노점상과 비교적 작지 않은 규모의 서점이 있다. 생각보다 바람이 너무 차서 영달이에게 미안해 하면서도 호떡과 도넛 등을 파는 노점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결국 책 두권에 호떡을 보태어서 귀가했다.   

  요즘 동시에 읽고 있는 책이 세 권이다. <올리브 키터리지>, <장 크리스토프 1>, <커피하우스 가십, 뉴욕>. 그런데 지금은 그날 서점에서 들고 나온 <전원 교향악>의 리뷰를 쓰고 있다. 내 일과는 너무나, 정말 너무나 규칙적이지만 수중에 들어온 책들로 나는 방황과 일탈과 행패를 즐긴다. 그러니까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사랑하기도 하고, 조금 맛보곤 집어던지거나 처박아 놓기도 하고, 종종 사야 할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집어들고 나오며 약간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도 호떡과 함께 예정없이 집어든 책인데 알라딘 보관함에 넣어두곤 언제든 내키면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다. 중학교 시절 과학 선생님을 좋아해서 나는 과학에 소질이 있는 모양이라고 착각하며 지낸 적이 있는데 그맘 때 처음 읽었던 책이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의 작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좁은 문>에 감흥하기에는 내 마음의 문이 너무 좁아 큰 기대가 없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이 작품만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십대 시절은 물론 이번에 다시 읽고도 그랬고 아마 마흔, 쉰, 예순에 또 읽는다 해도 그럴 것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가난한 노파가 죽자 마을의 목사는 노파가 기르던 눈 먼 소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장님인데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소녀를 목사는 길 잃은 양이라 여기고 정성을 다해 성장을 돕는다. 마침내 소녀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이며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지만 그녀가 시력을 회복했을 때 암흑 속의 진실이 빛과 함께 드러나며 비극에 이른다.   

  사람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이성은 끊임없이 마음과 맞붙어 싸워서 자주 그 마음을 제압하곤 한다(p.17). 목사의 처음 마음은 길 잃은 자를 인도하는 목사이자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음이 분명하다. 더욱이 스스로 공을 들인 창조물에 애착을 갖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목사 아내의 불길한 예감에서 엿보이듯 그 애착은 마냥 순수하기 어렵다. 오로지 나를 통해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아름다운 소녀가 나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해보자. 목사는 끝없는 기만으로 소녀를 향한 욕망을 제압하고 합리화 하지만 그는 목사이기 이전에 한 남자고, 인간이다.  

  소설의 백미는 목사가 미처 알아차리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자기기만에 대응하여 벌어지는 갖가지 관계와 대화들이다. 그의 아내는 수수께끼 같은 말로 사랑에 빠진 목사를 비판하고 아들 자크는 제르트뤼드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목사는 아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아들 자크를 비난하고 만류한다. 목사는 스스로를 솔직한 사람이라 규정하고 있지만 본인의 감정에 대해서는 눈 감고 있는데다 더욱이 진실을 얘기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앞세워 교조적인 포즈로 일관한다.  

  만일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으리라(p.79). 그렇듯 온통 행복과 소망의 빛으로 찬란했던 제르트뤼드가 시력을 찾았을 때 그녀는 목사가 읽어주지 않았던 성경 구절을 알게 된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p.106). 눈을 뜸과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의 사랑에서 '죄'를 보게 되고 더욱이 사랑했던 대상이 목사가 아니라 자크였음을 깨닫는다. 모든 것을 보게 된 제르트뤼드에게 남은 선택은 한 가지 뿐. 만일 그들이 그들의 불행을 모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p.29). 친구 마르탱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역자 해설 부분에는 앙드레 지드가 비평가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그(목사)를 통해 나는 내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 하기보다는, 그 윤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너그럽든 너그럽지 않든 언제나 깨어 있는 비판 정신에 의해 엄격하게 감시받지 않을 경우, 내 자신의 견해가 봉착할 수 있는 위험을 묘사했습니다. 필수적인 그 비판 정신이 목사에게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습니다(p.121). 독자로서, 인간으로서 나는 목사의 사랑을 이해하지만 지드의 말처럼 성경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스스로를 기만하고 합리화하는 태도는 눈살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동정과 비웃음만 자아낸다. 그러나 항상 깨어 있는 비판 정신으로 스스로를 엄격하게 감시하며 사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더욱이 신앙이나 핏줄보다 앞선 사랑의 불가사의한 위력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    

  과학 선생님을 좋아하는 소녀였던 시절엔 이 책을 순수하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쯤으로 읽었던 것 같다. 그때는 <독일인의 사랑>이라든가 <봄의 폭풍우> 같은 작품에 홀딱 반하던 촉촉한 감성녀였으니 그랬겠지만 지금 다시 읽은 <전원 교향악>은 백 페이지 남짓한 할랑한 분량임에도 짙고 거세고 묵직한 그림자를 내 가슴 속에 드리우는 것 같다. 아무리 먼 나라, 먼 시절의 이야기여도 고전의 힘과 멋이란 이런 데에 있고 내가 끌리는 책에서 가면을 벗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추하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 과정이 없다면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터. 원래 사려던 것은 호떡도 아니고 이 책도 아니었지만 호떡과 함께 이 책을 산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합리화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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