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은 남재일과의 인터뷰에서 언론사를 여러 군데 옮겨 다닌 연유에 대해 묻자, "개인적으로 직장을 떠나는 게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직장에서 불화가 생기면 구태여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내가 떠난다. 불화를 유지하고 불화인 상태로 있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라고 말했다.    

  이 명징한 대답을 놓고 한참을 생각했다. 김훈은 그가 쓰는 글처럼 군더더기나 부스러기 없이 정직한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일상에 만연되어 있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해법은 정녕 기만일까. 한 작가의 의견일 뿐인데 굳이 이 대목에 좌우되는 것을 보면 깊이있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늘 하고 있던 고민이었는가 보다.    

  스스로를 휴머니스트라 일컫는 자가 가게 종업원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고 실망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거대 관념의 추종자이거나 가치의 모사자일 뿐. 그가 말하는 그가 아니었다. 절연의 가장 큰 이유가 어쩌면 그것이었다는 것을 그 사람은 몰랐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실망 앞에서 나는 돌아섰다.      

  어떤 어른이 무질서한 상황과 맞닥뜨려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다, 살다보면 뭐가 옳은 건지 잘 모르게 된다, 고. 완벽히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일리 있다고 생각했고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중에 당신이 했던 그 말로 당신의 뻔뻔함을 합리화하는 것을 보고 정수리 꼭대기까지 혈압 상승. 아무리 좋은 말도 저열한 사람한테 가면 똥막대기 수준으로 변질되는구나.  

  나는 김훈처럼은 될 수 없고 그처럼 살 까닭도 없다. 그는 젊고 곧은, 영원한 청년 같은 면이 있는데 그것은 고독한 작업을 택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일 터. 간혹 눈 감고 귀 닫은 채 은근슬쩍 넘어가야 하는 일이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나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엄청난 기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연중에 내 속엔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는가 보다. 본래 은근슬쩍, 두루뭉술이 잘 안 되는 사람인데 시키는 대로 하려다 보니 포즈도 엉성할 뿐더러 마음의 다크서클이 심장에 빙글빙글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나 보다.  

  나는 괴로울 때마다 송곳처럼 삐죽이 튀어나오는 왜, 라는 질문을 묵살하고 또 묵살해왔다. 종업원을 홀대한다고 절연했던 사례는 벌써 수년 전이다. 당시의 나는 죽었다 깨나도 아닌 놈은 아니고 아닌 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새 죽었다 깨나도 반듯한 직조물처럼 정리되지 않는 것이 사람관계며 죽었다 깨나도 이 복잡다단한 관계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에 고개를 숙였다.  

  결국 약간 화가 나 있는 상태를 항상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에게 엄격하면서 타인에게 관대하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둘 다 엄격해서 때로 턱까지 숨이 차오를 지경이고 스스로에게 관대하면서 타인에게 엄격하려 드는 사람을 보면 어린 시절 그 분노의 기개가 움찔움찔 부활한다. 이쯤 되면 불화와 불 화(火)를 항상 안고 다니는 셈이다. 김훈은 불화인 상태로 관계를 떠나 자전거 타면서 건강관리를 하는 모양인데 매번 겉으론 해결된 양 불화를 품고 있는 나는 명만 재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이라는 가정에 많은 기대를 싣곤 한다. 분명 전후가 나뉘는 대대적인 변화임에 틀림없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더욱 너그러워지는 면도 있지만 더더욱 가차없어지는 면도 있다. 일례로 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공연히 가엾고 예쁜데 세상의 많은 어른들에 대해 무심해지거나 적의를 품게 되었다. 나는 무려 영달이의 엄마인데도 가끔 의도치 않게 그 소녀에게 고통을 준다. 나 역시 아이의 마음을 잊어버린 어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런 일은 더 많아질 것이고 그 사실이 미리 아프다. 엄마로서, 어른으로서 나 자신과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이 서글픈 적의는 필연적이다.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고 말하던 장금이는 얼마나 용감하고 현명했던가. 불화를 덮어두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불화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가 중요한 것일까. 나는 지금보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고 더욱이 한 아이의 거울이 되었다. 불가피한 불화의 연속인 삶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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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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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