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눈에 꽂히는 것들이다. 영달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 새롭게 보이고, 영달이가 꽃을 좋아하니 꽃이 있는 곳이면 화단이든 화원이든 발길이 머문다. 나가자고 보채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들도 왜 이렇게 많은지. 많이 보이는지.   

  이른 저녁, 목욕을 마치고 좀 선선해지면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씩 산책하곤 하는데 어제는 나갔다가 귀여운 여자아이를 만났다. 조랑말 무늬 상하복에 단발머리,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동글동글한 세살짜리 꼬마아가씨였는데 블라우스와 바지가 휘휘 돌아가도록 빠짝 여윈 할머니와 놀이터 회전대를 타며 놀고 있었다. 내가 영달이 대신, 언니야, 하고 부르니 반달눈으로 웃어가며 반갑게 다가왔다. 토실토실한 영달이 팔을 만져보더니 느낌이 좋은지 얼굴을 만지려하자 할머니가 얼굴은 만지지 마, 하고 제지, 나는 괜찮다고 했다. 할머니는 몇개월이냐고 물으셨고 우리 영달이는 언제 저만큼 크나요, 했더니 금방 큰다고 걱정 말란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은 엄마든, 할머니든, 누구나 쉽게 말문을 트고 하나같이 언제 크나요, 란 말에 하나같이 금방, 이라고 말한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꼬마를 또 만났다. 마트에서 껌을 사갖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영달이 팔을 만지며 또 좋아라 한다. 언니야, 안녕, 그러자 빠빠이를 하며 할머니 손을 잡고 들어간다. 바람 한번 쏘였으니 할머니는 저녁밥을 지어 아이에게 먹일 것이고 어쩌면 아이는 또 나가자고 보챌 지도 모르겠다.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아직은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영달이는 꽃을 아이들만큼이나 좋아한다. 처음에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보일 땐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고 좋아할까, 궁금했는데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기보다는 아이들의 다이나믹한 움직임과 시끌벅적한 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럼 꽃은 왜 좋아할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조차 없는데. 알록달록한 색감 때문일까. 하지만 무덤덤한 흰꽃이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잔꽃은 어떻게 알아보고 좋아할까. 나는 그냥 영달이도 사람이니까, 라고 결론지었다. 좋아하지 않는 꽃은 있어도 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못 보았으니까. 영달이 덕분에 나도 뒤늦게 꽃과 꽃 이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친정집과 우리집, 두 아파트 단지 화단에 공통으로 핀 꽃이 '베고리아'다. 항상 지나치던 꽃이었는데 이제서야 제대로 살펴보고 이름도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 세상엔 아이들을 돌봐주는 할머니들이 참 많기도 하다. 당신 자식 뼈빠지게 키워서 세상에 내놓고 나니 이제는 그 자식들이 또 자식을 낳아 키워달란다. 일 할래, 애 볼래, 하면 일한다고, 일한 공은 있어도 애 키워준 공은 없다고, 그런 말들이 실상 하나도 틀리지 않는데 알면서도 어찌 하겠는가. 자식들의 이기심은 가장 믿을만한 양육자에게 쏠리기 마련이고 부모는 부모라서 그것을 거절하지 못한다. 놀이터에 나가보면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네를 밀어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떤 할머니는 물총을 쏘는 손자에게 제발 나무한테만 쏘라고 다그치지만 손자는 그럴수록 더욱 사방팔방 물총을 쏘아댄다. 늦은 밤, 아이 우는 소리라도 들리면 이젠 시끄럽다기 보다는 아이를 달래고 있을 누군가가 얼마나 힘이 들까 싶다. 세상의 할머니들은 할머니의 정성스런 손길 덕분에 무럭무럭 '금방' 크는 아이들처럼 어느새 '금방' 늙고 만다. 영달이도 나와 함께 있을 때 보면 결코 쉬운 아이는 아닌데 외할머니 노고 덕에 잘 웃고 잘 먹으며 쑥쑥 크고 있다. 그리고 영달이의 외할머니는 쑥쑥 늙고 있다. 보인다.  

  보이지도 않았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하지만 이제는 두눈과 마음에 꼭꼭 밟히는, 세상의 아이들과 꽃과 할머니들이 내내 건강하길. 이 거친 더위도 그들을 위해 어서 꺾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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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2011-06-21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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