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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평점 :
유토피아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명백하고,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진 섬.
그대의 발은 탄탄한 증거의 토대를 딛고 서 있다.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다.
이곳에는 혼돈에서 영원히 해방된 나뭇가지로 뒤덮인
'논리적인 가설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우물가에는 곧고 탄탄한 '이해의 나무'가
"옳아! 이제 알겠어!"를 연방 외치는 중.
그 안쪽으로 '명백한 타당성의 계곡'이
드넓게 펼쳐진 푸른 숲이 있다.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싹트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어와 사방으로 흩어놓는다.
메아리는 부르는 사람 없어도 저절로 응답하면서
세상의 비밀에 대해 기꺼이 속삭인다.
오른쪽에는 '의미'가 보관된 동굴.
왼쪽에는 '심오한 깨달음'의 호수.
바닥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진실'이 수면 위로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의 언덕에 오르면
꼭대기에서 '사물의 본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매력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다만 해변에서 희미한 발자국이 발견될 뿐.
그것들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바다에 몸을 던져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 것뿐이라는 듯.
삶이란 워낙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니. (pp.263-264)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알라딘의 리뷰에서 발견한 폴란드 시인인데 모르고 살았으면 아쉬울 뻔 했다. 폴란드 시인은 처음이고 시를 읽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지만 몇몇 갸웃거리는 시들을 제외하곤 대개 잘 읽히는데다, 철학적 사유를 참신한 언어로 담아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책의 너덜거리는 띠지를 곧잘 떼어버리곤 했지만 이 시선집의 띠지는 버리지 않았다. 담배 피우는 시인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실렸는데 무슨 고민 있을 때 쳐다보면 야 인마, 괜찮다, 그럴 것만 같다.
아무도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고 노래했던 이는 김기림이었던가. 명명백백한 유토피아를 피해 모순과 오류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존재, 바로 인간. 위의 시를 읽으면서 과연! 이란 감탄사와 함께 차가운 스타우트가 마시고 싶어졌다. 이렇듯 검고 진한 흑맥주를 부르지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은 시편들이 이 묵직한 시선집 속에 풍성하게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