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처분한 돈으로 또 책을 샀다. 이번에 느낀 것이 많기에 곰곰이 숙고를 거친 끝에 창비세계문학세트로 결정했다. 간지 좔좔 흐르는 전집세트가 배달되던 순간, 늙은 조강지처 내다버리고 세련된 새마누라를 얻는 것 같은 죄책감과 설레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엄습했다. 괜히 영달이를 붙잡고는 영달아, 나중에 너도 읽으라고 산거야. 아직 책보다는 딸랑이, 딸랑이보다는 사람인 영달이는 다 집어치우고 제대로 안아주기나 하라는 듯 코웃음만 쳤다.  

  서평단 활동을 할 때 독일편을 받아보고 괜찮은 전집이 나왔구나 싶어 솔깃했다. 장정은 깔끔했고 해설과 함께 실린 단편들도 신선하고 재밌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올라온 리뷰들도 거의 호평이라서 별다른 망설임 없이 질러버렸다. 전집은 사면 낭패, 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는데 책을 처분하는 시점마다 그래도 끝까지 함께 가는 동무들이 또 전집이다.  

  어릴 때 오빠가 누군가로부터 물려받은 동화 전집이 있었다. 헨젤과 그레텔 쯤으로 보이는 남녀 아이 두 명이 당나귀인지 노새인지를 타고 있는 그림이 모든 책에 똑같은 표지로 들어가 있었다. 오빠가 <로빈슨 크루소>와 <암굴왕> 이야기를 하던 것이 기억나는데 이미 그때부터 오빠와 나는 취향의 노선을 달리했던 모양이다. 한글을 깨친 후, 그 책들이 내 차지가 되면서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 동화집>, <소공녀> 등을 읽으며 착한 어린이가 될 것을 세뇌당했다.   

  하지만 그 어린이는 그다지 풍성한 독서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한 덕에 <새농민>에 실린 연재소설은 물론, 거의 닥치는 대로 읽어대고야 만다. 더욱이 사춘기를 맞기도 전에 고모가 아마도 전시용으로 구입했음이 분명한 한국문학전집이 집으로 배달되고 그 묵직한 책들을 또 닥치는 대로 읽는다. 착했던 어린이가 착할 어른으로 클 수 없었던 배경이 어쩌면 거기에 있다. 독서욕과 지식욕이 왕성한 시기에 적절치 못한 전집에 노출된 폐해다.  

  그 이후, 스물한 살 생일에 엄마가 한국문학전집을 선물해 주셨다. 한국문학이 좋으냐, 세계문학이 좋으냐, 고르라길래 세계문학은 번역이 시시할 수도 있고, 하면서 시덥잖게 잘난척을 해가며 한국문학을 선택했다. 고모가 이사가면서 떠안겼던 전집이 현진건, 김유정 등등의 근대문학이라면 엄마가 사주신 100권의 전집은 김소진과 윤대녕도 끼어 있는, 근현대문학을 통틀어 엮은 대전집이었다. 책장에 착착 꽂아두었을 때만 해도 여름방학 내내 다 읽어치울 기세였지만 십년이 다 된 지금까지 반이나 읽었나 모르겠다. 똥인지 된장인지 가늠 불가한, 이런저런 편력으로 방황하던 시기에 너무 황송하고 과분한 전집이었다.    

  그런 면에서 창비세계문학세트는 부담없는 시도, 밉지 않게 얍삽한 전집이다. <청소년 토지>도 12권인데 고작 9권, <세계의 문학> 같은 문예잡지도 경장편을 싣고 있는데 오직 단편들로만 구성, 더욱이 독자를 배려해서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였고 옮긴이와 엮은이가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신뢰를 얻는다. 폭넓은 독자층을 겨냥, 야심찬 기획 하에 정성껏 엮었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세계문학전집에는 한국문학이 끼면 안 되는 걸까. 근현대 한국 단편들을 엄선해서 보기 좋게 10권으로 내놨으면 어땠을까 싶다.          

  손 타고 코에 바람 들어간 영달이, 친정엄마는 책이나 장난감 보다는 체력 좋은 사람이나 하나 사오라고 하시는데 철없는 영달이 엄마는 육중한 책들을 눈앞에 흔들어대며 나중에 우리 영달이도 이 책들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고 오버에 오버를 넘어서고 있다. 그렇듯 물려주어도 괜찮을 만한 전집인데 전집을 한번도 끝까지 읽어낸 적이 없는 과거전력을 볼 때 조금 불안불안. 엄마는 다 읽었어? 라고 물으면 당연하지, 라고 거만하게 응대하려면 읽기는 읽어야 할텐데. 요즘은 이 맑은 눈이 지켜본다는 생각에, 실제로 빤히 지켜보며 간혹 의미심장한 코웃음까지 날리니, 매사 긴장이 된다. 책 권하는 엄마보다 책 읽는 엄마가 되려면 이 새로운 질감의 창비세계문학세트부터 다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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