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책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때부터 책은 책이 아니라 물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월초에 이사하던 날, 이삿짐센터 청년이 미리 표시해온 순서에 따라 내 책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차분하고 꼼꼼하게 정리해 주고 갔는데도 오후 내내 재정리를 시작했다. 나라별로 배열해도 남는 책이 생기고 작가별로 분류해도 칸이 모자라고 이리 빼서 저리 꽂고를 반복하다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하냐는 눈빛을 보냈고 예전 같으면 결코 굴하지 않았을 내 의지는 슬슬 시들해졌다. 그리고는 하루빨리 처분하자, 고 마음먹었다.   

  우선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은 책, 묵은 잡지류, 더 이상 내 취향도 아니고 남에게 권하기도 뭣한 취향의 책들을 버렸다. 문구점에 가서 빨간 두루마리 끈을 사와 한나절 동안 묶고 또 묶었다. 시원섭섭함 중에 시원함이 더한 바람에 하마터면 몽땅 다 버릴 뻔했다. 아예 싹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 무얼? 그 중 어떤 책은 표지도 한번 쓰다듬고, 좌르르 페이지를 펼쳐보기도 하고, 그 사이에서 조그만 메모나 코팅된 책갈피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아쉬워하던 그 순간은 어디 가고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과거 언젠가 뭔가에 동해서 사들인 책이었을텐데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 모양이다. 엄마와 내가 여러 차례 오르락내리락하며 책을 내어놓자 관리실 아저씨가 누가 공부 끝났나 보죠? 하셨다.  

  숱하게 버리고 나니 친정집과 내집의 책장이 대략 시원하니 휑해졌지만 여전히 한번 읽히고는 그대로 주저앉아있는 책들이 눈에 거슬렸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품질과 상태를 확인한 후, 사정없이 클릭클릭하여 알라딘에 주어버렸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완전 새 책을 무조건 천원에 팔아버리고 나서는 후회하기도 하고, 그간의 구매리스트를 훑어보며 잠깐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거의 다 보내고 아직 한 박스가 남았는데 그 안에는 진중권도 있고 김연수도 있고 김형경도 있다. 관심 있었지만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그들이 쓴 <미학 오디세이>나 <청춘의 문장들>, <세월>은 여전히 갖고 있다.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공들여 쓴 글은 버릴 수도, 줄 수도 없다. 

  책을 다 빼내고 남은 책들을 정리하며 나중에 깨달은 것인데 책을 처분하는 마음 한켠에 미래의 독자가 영달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권선징악, 인과응보스러운 책만 남겨둔 것은 아니다. 나는 영달이가 <마담 보바리>와 <주홍글씨>를 읽고나서 이 여자 나빠, 라고 말하는 난감한 상상도 해본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싫은 것은, 자칫 쓰잘데기 없는 환상 또는 망상만 심어주거나(내가 한때 상당히 심취했던) 제대로 한번 살아보기도 전에 사람의 머리 위에 먹구름부터 드리우는 비관적인 책들(내가 한때 상당히 탐독했던)을 주로 버렸다. 알라딘에 가서 적절한 독자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책들은 주로 문학류다. 읽을 땐 즐겁게 읽었지만 다시 손이 가지 않는 책은 일찌감치 다른 사람에게로 가서 한번이라도 더 읽히는 편이 낫지 싶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사라진 책들의 자리가 쓸쓸하고, 처분하고 싶었는데 버리기는 아깝고 매입도 불가능하여 멍하니 꽂혀있는 몇 권의 남은 책들을 보니 조금 안쓰럽다. 나 자신의 두서없는 과거를 보는듯 해서 부끄럽기도 하다. 아직도 책장을 꿋꿋히 차지하고는 언젠가 한번쯤 더 읽히겠지, 자신감 넘쳐하는 책들의 표정은 부담스럽다. 2년 후 즈음, 내 마음자리가 한번 더 변하여 대거 쫓겨날 운명일지 모르는 일. 그것은 누구에게도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닐테니(고물장수 아저씨나 알라딘은 제외하더라도) 남은 책들을 다시 사랑해주고, 내게 새로 오는 책들을 신중히 골라 착실히 정독해주는 일, 숨쉬는 네모난 인생들을 한낱 짐꾸러미 물체로 전락시키지 않는 일, 그렇듯 책의 진짜 주인이 되는 일에 힘써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짐짓 미워하는 척도 해봤지만 지금 이 순간, 떠나간 책들이 살짝 보고싶고, 조금 미안하고, 매우 감사한다. 그럭저럭 온전한 삶을 꾸려가는 오늘의 나는 어느만치 그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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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10-07-3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사하면서 몇 번 책을 정리했고, 이번에 또 대대적으로 책을 정리할 예정인데, 남일 같지 않네요. 책이란 게 참 그래요. 살 때도, 정리할 때도 참 마음이 쓰여요.

깐따삐야 2010-07-30 17:03   좋아요 0 | URL
그쵸? 참 마음이 쓰여요.
졸업할 때, 이사할 때, 그저 마음이 동해서, 여러가지 동기로 책들을 처분해왔고 그때마다 책 구입에 신중을 기해야겠다고 마음먹곤 하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 크게 버렸고 앞으로 잘할 생각입니다.^^

BRINY 2010-07-30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연말에 이사하고 1월 내내 걸려서 책정리하여 수백권 팔아치우거나 버렸는데, 남은건 허리 통증과 책 팔고 받은 돈 20여만원 뿐이네요.

깐따삐야 2010-07-30 17:05   좋아요 0 | URL
저도 책 묶어 내놓던 날, 온몸이 욱씬거려서 영달이를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답니다. 한때 곰살맞던 책들이 묵찌근한 군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어요. 책을 잘 사든, 잘 못 사든, 남는 게 있다고 위안하곤 했는데 어쩐지 죄책감도 들고. 이젠 좀 신중해야 할까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