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참 이상한 소설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첫번째 독서를 마쳤다. 은교와 무재는 알듯말듯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고, 한계 상황에 다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는 기묘한 설정, 철거 중인 상가 입주민들의 오래된 삶이 하나씩 소개되고, 은교와 무재는 어제와 다름없다.  

  뭔가 빠뜨린 것이 있을 거라고 두번째 독서를 시작한 것은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거든,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런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p.144)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현실을 다루되, 작가 김이설의 소설이 얼음송곳으로 정수리를 내리찍는 강렬함이었다면 황정은의 소설은 미지근한 여름비를 맞고 났을 때처럼 노곤하고 서늘했다. 외계 소설이 들끓는 이천년대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젊은 작가들을 보고 있으면 소설이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몫을 하고 있구나 싶어 다행스럽고, 반갑다.  

  이 시(詩)적인 소설은 소란스런 요설은 저만치 접어두고, 고요히, 곱씹으며 읽어야 한다. 나의 첫번째 감상처럼 참 이상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두번째 독서에서는 그동안 스스로가 얼마나 탐욕과 상처의 언어에 길들어 있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곤 씨나 오무사 할아버지 같은, 숨겨진 삶, 사라진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릴적 우리 동네에 '김씨 아저씨'가 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내가 아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저씨를 김씨, 또는 김씨 아저씨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김씨 아저씨를 싫어했다. 지저분한 차림새에 늘상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길에서 나를 보면 히히거리며 쫓아왔다. 쫓아오고 싶어 쫓아오는 게 아니라 아저씨를 보자마자 내가 무조건 겁에 질린 얼굴로 내달렸기 때문에, 그 모습이 재밌어서 쫓아왔던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김씨 아저씨가 어때서, 네가 귀여워서 그러는 거다, 라고 하셨다. 부모님과 이야기할 때 김씨 아저씨는 조금 멀쩡해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나만 보면 왜 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겁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동네에서 김씨 아저씨가 사라졌을 때 엄마와 아줌마들의 수다 속에서 아저씨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아저씨는 동네 땅부잣집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지독하던 지주 노인네가 부려먹을만큼 실컷 부려먹고는 세경을 주기 싫어 누명을 씌워 감방에 보낸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아저씨가 참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서운 사람이 안 보이니 마음만은 편했다. 아저씨는 얼마 후 감옥에서 나와 몇 달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성희롱은 물론 억지로 오줌을 먹는 등, 감방에서 별별 짓을 다 당한 까닭이었다. 엄마는 그 지주 노인네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몇년 후, 그의 큰아들이 가해자도 없는 원인불명의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의심쩍게 수군거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지주의 큰아들은 늦은 밤, 도로 한복판에서 히히거리며 쫓아오는 김씨 아저씨의 그림자라도 보았던 걸까.        

  이 소설을 읽으며 지난 날, 기억의 후미진 저편으로 사라졌던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그림자를 하나씩 바라보고 읽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내 유년기의 목소리로 김씨 아저씨에게 이별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저씨, 잘가. 이젠 쫓아오지 말고 푹 쉬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