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 구해졌다. 기대 반, 체념 반이었는데. 온라인의 놀라운 힘이란. 소설은 수기와 소설 중간 쯤 된달까. 어떤 선배들은 작가와 주인공을 똑같이 놓고 보는 게 가장 저급한 독서라고 했는데 이런 책을 만나면 그럴 수밖에 없다. 많은 부분 허구가 가미되었을지라도 체험이 아니고는 절대 이렇게 못 쓴다, 싶은 구절들이 대부분이었다. 불우한 여자의 성장기(한편, 그 후의 이야기가 반드시 나올 것만 같은)이자 예술가 소설일 수도 있는데, 문학적 완성도를 넘어서 바닥까지 가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진정성이 있었다. 이러한 진정성과 마주하면 글을 쓸때 개요를 짜라, 은유는 직유보다 더 고급한 비유법이다, 등등의 도식적인 말들은 영 무색해지고 만다. 더욱이, 대개 작가들의 성장소설에는 자기동정이나 자기합리화가 은연 중에 엿보이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야말로 얄짤없었다. 그 산뜻한 매서움이 좋았다.      

# 백만년만에 H 언니와 연락. 요즘 영국 여행 중이라고. 언니는 나와 달리 대학원 생활이 재미없단다. 무슨 수업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듣자하니 지도교수님마저 지루한 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복학생, 언니는 늦깍이 편입생이었다. 둘 다 학구열에 불타던 시절이었는데 늘상 충혈된 눈으로 만나 이것저것 숱한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발령을 받고 몇 년 전, 모교 근처의 술집에서 오후 네시 쯤, 아무 손님도 없는 곳에서 둘이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6,70년대 영화 포스터를 천장과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집이었는데 술집 이름도 자유부인인가 뭐인가 했다. 둥글둥글 잘생긴 젊은 사장님이 있었고 고기가 끝내주게 맛있었던 기억. 내가 어려서 실수한 것도 많았을텐데, 어떤 장면은 두고두고 되새김질이 되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는데, 다행히도 언니는 나를 똘똘하고 거짓없는, 이라고 황송하고 쌈빡하게 떠올려주었다. 두터운 원서를 무슨 잡지책 보듯 편안히 읽던 모습, 두눈을 반짝이며 파안대소를 하던 순간, 어깨에 빼뚜름히 매고 다니던 검정 가죽가방 등, H 언니는 몇몇 삽화와 더불어 인상적인 사람으로 남아있다.  

#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내 일터에서, 결국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자각이 자학으로 이어질 무렵, 너야말로 천사병 걸린 푼수 아니냐고 엄마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당신 딸이 방바닥을 누비면서도 코큰 소리를 했으면 하는 게 모든 친정엄마 마음이겠지만 출산 후에 엄마의 수고가 너무 많아 그 점이 가장 아프다. 내가 커감에 따라 엄마 고생도 좀 덜어지겠지, 생각했는데 어째 점점 더 들러붙는 형국이다. 나의 전반적 심경에 대해 남편은 교사들은 순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지 몰라도 당신 또래 여자들은 대부분 다들 그래, 라는 위로도 책망도 아닌 담담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고 내내 다짐하는 것인지, 원래 남이었지만 참 남 같다. 그새 바깥 바람 맛을 들인 영달이는 아파트 단지 둘레둘레를 해찰하러 다니느라 바쁘고, 매일 밤, 어깻죽지가 뻐근한 나는 빨래 안 마르는 장마, 이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여름이 언제끔 끝날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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