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책 - 제3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12
강미 지음 / 푸른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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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겨울, 블로그』를 읽고 나서 ‘강미’란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현직 교사이기도 한 작가는 꾸준히 청소년 소설을 써오고 있는데 『길 위의 책』으로 제3회 푸른문학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겨울, 블로그’보다는 ‘길 위의 책’이 더 좋았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유난할 것도 없는 도서반 여고생의 일상이지만 긴 장편을 쓰면서 단 한 문장도 쉽게 쓰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만큼 정갈한 문체가 돋보였다.

 소설은 도서동아리 회원이 되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책이 안내하는 세계에 눈뜨고, 조금씩 자신의 색깔과 꿈을 찾아가는 여고생 ‘필남’의 이야기다. 작가는 학생들의 실상을 항상 가까이서 체감한 교사답게 여고생들의 고민과 성장을 시종일관 세심하고도 따듯하게 바라본다. 이 소설의 또 하나의 미덕은 ‘나비물’, ‘멀기’, ‘버림치’, ‘잘코사니’와 같은 순우리말을 볼 수 있다는 것. 처음 들어본 우리말에 갸웃해져서 사전을 찾다보니 왠지 기분이 고양되더라는. 그 느낌에 맞게끔 참 잘도 지었구나 싶었다.

 또한 모범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도서동아리의 전범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변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에게 권하고픈 책이다. 한 해 동안 읽을 성장소설 목록을 만들어 함께 토론하고 여러 행사를 준비하며 우정을 나누는 가운데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훌쩍 성숙해 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도 풍부한 시기에 입시 공부를 하느라 ‘외딴방’과 ‘길버트 그레이프’를 놓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필남도 그러하거니와 지금의 십대는 대체로 목표의식이 없다. 미래에 대한 꿈이나 희망 없이 그저 학교와 집을 오갈 뿐이다. 어느 선생은 현실이 너무 편해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지금의 십대가 그저 편안하게,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니다. 가족이나 성적이나 친구관계에서 날마다 상처받고 상대적 빈곤감 속에서 살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게 배부른 소리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지금을 사는 사람은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p.194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서 아이들에게 좋은 책과 영화를 많이 보여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와 액션에만 주파수가 고정되기 전에 내가 아직도 잊지 못한 십대 시절의 책들을 그들의 길 위에 놓아주고 싶다.

 92년도 청목에서 나온 ‘생의 한가운데’의 두 번째 페이지에는 “정감이 깃든 눈을 가진 **야.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이라는 글귀가 남겨져 있다. 십년도 더 지난 책이다 보니 아무리 아세테이트지로 싸서 책장의 맨 안쪽에 모셔두었다 해도 누렇게 빛바랜 페이지들이 그간의 세월을 여실히 드러낸다. 소설 속 정현희 선생님을 보면서 당시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셨던 담임선생님을 떠올렸다. 그 때 선생님은 지금 내 나이보다 조금 어렸었다. 아담하고 조용한 분이었는데 어느 가을 날, 나를 부르시더니 ‘생의 한가운데’와 ‘죄와 벌’을 선물해 주셨다. 얼마 전 ‘제인 에어’를 읽었냐고 물으셨을 때 ‘읽었다’고 대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중학교 3년을 마칠 때까지 내게 많은 말씀을 해주신 것도 아니고 그다지 활발하거나 살가운 분도 아니었지만 뜻밖의 책 선물과 글귀만큼은 내 마음 속에 오롯이 남아서 큰 힘이 되었다. 나중에 민음사에서 나온 ‘삶의 한가운데’를 다시 읽게 되었을 때, 어렸던 그때보다 책장은 더 잘 넘어갔지만 처음의 감동을 앞지르진 못했던 것 같다.

 십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일 초의 지체도 없이 아니오, 라고 말하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이 잠깐씩 그립기도 하고 선생님이 보고 싶기도 했다. 책을 읽고 빌리느라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던 도서관 정경도 떠오른다. 책에 있는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큰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던 도서위원 오빠도 생각난다. 뭘 보남? 내가 책 훔쳐가게 생겼남? 하는 눈빛으로 뾰로통하게 응대해주곤 했었는데. 이 책 한권으로 사계절 선선하던 시골 학교 도서관과 그 안에서 블라우스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책 읽기에 빠져들던 어린 내 모습을 회상할 수 있어 다정한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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