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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편혜영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희뿌연 안개와 질척한 습지 안에서 울부짖고 허둥대는 짐승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무사안일한 일상의 이면에 잠복해 있다가는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불시습격을 감행하는 짐승들, 짐승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거나 그들의 냄새를 맡는 순간 숨겨두었던 본능을 드러내는 인간의 허울을 뒤집어쓴 짐승들. 안락과 유희를 찾아 떠난 주인공들은 우연히 맞닥뜨린 짐승의 시간 속에서 한껏 으르렁거려보지만 결국엔 속수무책이다. 작가는 교외로 소풍을 떠난 연인들과 삶의 안정을 꿈꾸는 가장들 코앞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의 살점을 던져준다. 너희가 기대한 바는 아니겠지만 피해갈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식으로. 그것은 그로테스크함을 극단까지 추구함으로써 파생되는 엽기나 잔혹함이라기 보다는 염려와 기우 없는 평면적 일상에 울려대는 경종처럼 들린다.
사육장에서 탈출한 개에게 물어뜯긴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향해 차를 모는 아버지. 그러나 그가 운전하는 방향은 개들이 짖어대는 사육장 쪽이라는 아이러니. 고속도로의 거대차량들은 시시때때로 이들의 행로를 위협하고 개 짖는 소리와 기계음이 뒤섞인 소음 속에서 주인공들은 공포와 혼돈의 맨 구석까지 몰리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을 무심하고 간결한 단문들로 서술하는 작가의 솜씨가 그런 면에서 더욱 섬뜩하게 옹골차다.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 내 귓전에다 대고 정신 차리시라, 고 하는 경고문을 듣는 것 같았다. 방바닥을 뜯으면 집채만한 잡쥐들이 우글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맨홀 뚜껑을 여는 순간 폐수에 젖은 너구리나 족제비가 얼굴을 할키며 달려들거야. 이렇듯 점점 괴기스런 상상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그것들이 짐승의 탈을 빌려쓴 인간이거나 재주만 몇 번 넘으면 인간으로 화하는 요물이라면 그 공포는 배가 되리라. 정글에, 땅굴에, 동물원에, 사육장에 숨어있고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과욕과 허영 때문에 멧돼지의 습격을 받았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집과 차와 여가를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인 생활인들이여. 아파트 마지막 납임금을 내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길, 도로 한복판에서 돼지떼의 습격을 받는다면, 그 와중에 덩치 큰 트레일러의 묘기 운전에 위협받게 된다면, 당신은 집과 차와 더불어 무엇을 더 가지고 싶은가.
짐승과 관련된 공포 스토리 한 두 가지 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어릴적에 집에서 소를 기른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외양간에 소를 보러 갔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다. 성장한 개마냥 커다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삼각형으로 오므라드는 눈빛을 번뜩이며 나를 쏘아보고 있더라는. 대개 호랑무늬의 크지 않은 도둑고양이와 맞닥뜨린 적은 있어도 그런 기묘한 고양이는 난생 처음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돌로 굳어선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고양이 역시 꿈쩍도 안 하고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더라는. 결국 눈싸움에서 지고 만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후다닥 도망쳐 얼른 마루 위로 뛰어 올라왔었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내내 고양이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한번은 집에서 키우던 발바리가 새끼를 낳아서 강아지를 보러 갔는데 세상에나. 발바리 짝퉁처럼 생긴 시커머죽죽한 너구리 한 마리가 우리 강아지들을 떡하니 품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소리를 질러가며 헐레벌떡 집안으로 뛰어들어갔고 아빠가 너구리를 멀리멀리 쫓아낼 때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뭔가를 밟았는데 물컹해서 보니 뱀이었다던가, 쥐가 갉아놓은 빨래비누 등을 발견하는 건 시골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저 두 가지 경험은 아주 어릴적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뇌리 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인간의 시간 속에 길들어버린 가축들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 안이하고 평온한 일상에 길들어버린 인간들도 마찬가지.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은 그 길들인 균형 속에 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끼어들어 균열을 일으키고 소음을 내는 짐승의 시간이다. 수십배의 덩치에 달하는 소도 두렵지 않은 고양이, 다른 동물이 낳은 새끼들은 떡하니 품고 있는 너구리. 이들은 어제와 다르지 않던 오늘에 무참히 끼어든 침입자들이다. 여기에서 하필 왜? 라는 질문은 무색하고 부질없다. 밤길 운전 중, 족제비 배를 깔아버린 채 그대로 내달리는 승용차를 향해 하필 왜? 라고 질문하는 족제비가 없는 것을 보라. 저기 불빛들이 꼭 달빛 같지 않니? 여자는 남자의 상투적인 비유들을 못 견뎌하지만 상투 튼 점잖은 일상을 헤쳐놓는 비상투성은 공포의 낭떠러지로 여자를 몰아간다. 토사물 한 봉지와 함께 다시 인간의 시간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작가는 팔짱을 낀 채 무심히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아까 어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