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낯선 호텔에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 속의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버리는 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버릇이니까.-6쪽
우울에 대해서 지금까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첫번째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해서 금세 외로워진 결과로서의 감정은 우울이라는 것. 두 번째는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 나의 기대를 저버릴 때의 감정도 우울이라는 것. 그러니 우울은 차마 다른 인간에게 화낼 일이 못 되는 감정인 것 같다.-22쪽
그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우리의 일상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아의 일부란 걸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를 보면 일상과 자아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공동 진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과도 같다. -32쪽
- 내게 여행은 "우리 만난 적이 있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떠난 이후에"라고 말하는 방식이다.-56쪽
-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열렬한 존경을 표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모든 쾌락에는 슬픈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상실의 느낌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으며 보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길 원했다. 모든 수집가는 여행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낯선 호텔의 발코니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며 나도 뭔가 특권을 갖고 있음을 조금 부끄러워하며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 비참한 것을 보면서 감정을 표현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57쪽
'이 돌은 그 자체에 하늘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지. 그러나 이 돌은 사실, 북쪽 땅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북쪽 하늘의 영향을 받는 걸로 알려져 있다. 물리적인 인과에 의존하지 않는, 거리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움직임의 훌륭한 예이지.' 이건 윌리엄 수사가 나침반의 속성에 대해 설명한 이야기다. 이 속성은 사랑에 그대로 부여해도 된다. 끊임없이 떨리면서 한쪽을 집요하게 가리키는 속성. 물리적 인과에 의존하지 않는, 거리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몸과 마음의 주인공이었던 시절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표가 난다. 그는 귀여워하기 쉽다.-67쪽
"책이 당신을 기분 좋게 하는 이유가 뭔가요?" 책은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끝없이 세상과 연결하고 대면할 기회를 갖게 한다는 점 때문이라 우선은 대답하고 싶다. '우리는 그 무엇이긴 하지만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알게 되는 것. 그건 참 기분 좋은 양보다.-81쪽
그러므로 사랑을 끝낼까 말까 머리가 복잡할 땐, 역설적으로 사랑을 선택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나는 견딜 수 있는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 시절로부터 도망치고 싶은가? 지금의 이 빛바랜 사랑은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었으므로, 그 시절에서 출발해 어느 해안으로 밀려왔는가를 따져봐야 할 뿐.-95쪽
'인생은 진실로 위험하지만 도덕이 말하는 방식의 위험은 아니다. 인생은 진실로 버거운 대상이지만 그 본질은 전투가 아니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 때문이다.'-107쪽
'세상 물정 모르는 조그만 계집아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만일 팔자가 좋아 오래오래 살 수만 있다면 결국엔 절망조차 득이 된다는 사실을.' 조용필은 틀렸다. 사랑이 외로운 건 전부를 걸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이 외로운 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135쪽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정일 - 며칠 더 있다 가시라니까. 이명박 - 나도 페미니스트입니다. 정동영 - 단지 기차를 타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르코지 - 루이 14세가 된 기분입니다. 부시 - 성조기가 영원하길 바랄 따름입니다. 공지영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입니다. 쥐스킨트 - 향수 냄새 진동하는 계절입니다. 비 - 훨훨 납니다. 김훈 - 패배는 있어도 치욕은 없습니다. 정혜윤 - 침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아직도 많습니다.-146쪽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는 작별하지만 내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록 자신들이 우연적이고 덧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어떤 방식이 됐든 불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작별 인사라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다.-165쪽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168쪽
나보코프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단지 마법 양탄자를 겹쳐놓기를 좋아할 뿐이다.' 나보코프에게 시간은 겹쳐진 마법 양탄자였다면 그에게 남은 문제는 날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아주 젊고 생기 있는 영혼이었다.-177쪽
'나는 전 생애를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다. 나는 이마에 새벽의 샛별을 이고 다니는 자였다.' 이건 미국 인디언들의 문장이다. 나는 이 말을 개츠비에게도 바치고 술에 전 나에게도 바치고 한 점 불빛을 가슴에 품고 있는 탓에 끝없이 불안한 우리 모두에게 바친다. 개츠비는 우리에게 메아리다.-203쪽
결국 우리는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식으로. '용기는 말한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내가 던진 돌에 내 머리통이 깨져도 다시 한 번 더.-219쪽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어느 경우엔 아주 슬프다.-222쪽
때론 유유히, 때론 스피디하게 이 책 한 권의 하강이 마무리되는 순간, 독자의 몸과 정신은 중력을 아랑곳 않고 높게 떠올랐다가, 짜릿한 쾌감과 함께 달콤하게 안착할 것이다. 바로 그곳이 나와 독자, 누구보다 그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지상에서 가장 아늑한 침대다.-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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