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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시골 출신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없다. 그런데도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글줄이나 써가며 편안하게 살아왔으면서 웬 엄살인가 싶고, 또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꿈도 망상도 아니라 순전히 유전자 때문일 듯 싶다. ...... 여자들은 요새 여자들 핸드백처럼 늘 호미가 든 종댕이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김매고, 밭머리건 논두렁이건 빈 땅만 보면 후비적후비적 심고 거두던 핏줄의 내력은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꽤 집요한 것 같다. (p. 51)
여러가지 사정 상, 당장 그러기는 어렵겠지만 가족들에게 종종 시골로 이사 가고 싶다는 말을 비칠 때가 있다. 나중에 아이들을 낳고 기를 때에도 그 곳이 산도 있고 들도 있는 시골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위의 대목처럼 이건 꿈도 망상도 아니라 순전히 유전자 때문일 듯 싶다. 어릴 적, 추운 겨울마다 앞마당의 샘에 나와 머리를 감을 때에는 내가 하루빨리 이 곳을 뜨던지 해야지, 라고 투덜거리곤 했고 그건 순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매스컴에서 귀농이란 말이 들려오거나 기회가 닿아 산과 들을 둘러보고 올 때면 마음이 공연히 뒤숭숭해지곤 했다. 촉촉한 흙의 촉감과 달큰한 딸기향을 오감으로 느끼며 맨발로 딸기밭을 매던 아이,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즈음 된장찌개에 넣을 풋고추를 따기 위해 고추밭으로 달려가던 시골 아이가 바로 나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집요하다. 그 기억은, 아마 요즘의 아스팔트 킨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촌스러운 유전자를 내 몸 어딘가에 집요하게 새겨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을 닮아간다 했던가. 박완서님의 신간을 읽으면서 이 분도 자연히 자연을 닮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이제는 눈이 아파서 글도 제대로 못 읽겠구나, 하시던 엄마를 떠올리며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 한 권을 묶어내기 위해 때로 깔깔한 눈도 비비고, 저려오는 손도 주무르고, 뻐근해오는 어깨도 두드리고 했을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니 잠시 송구스럽기도 했다. 값싼 재주만 부리다 쉬이 잊혀져가는 작가들에 비하면 알토란 같은 얘깃거리를 들고 뒤늦게 등단해 지금껏 모범적 삶을 일궈오고 있는 박완서님은 문단의 원로이자 우리시대의 어머니, 라고 해도 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히 요술을 부린다 싶을만치 비루하고 남루하기 그지없는 인간사를 천의무봉의 글솜씨로 요리해내는 것을 보면서 타고난 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했더랬다. 그러나 읽기 쉬운 글은 그만큼 쓰기는 어려운 법.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고 동네 사랑방 수다 같기도 한, 쉽고도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락을 읊기 위해서는 점점 더 노쇠해지는 심신과 싸우는 강인한 정신력이 뒷받침 되었을 것이다. 31년생의 작가가 두툼한 수필집을 묶어 내놓고는 책머리에 '하지만 이 나이 이거 거저먹은 나이 아니다'라고 당차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숙연해지는 한 편, 어쩐지 빙글빙글 웃음이 나기도 했다.
새 책에서 작가는 꽃을 키우고 풀을 매고 계절을 보내며 나이 들어가는 일상 속에서 사람과, 음식과, 시대와, 엄마를 그리워한다. 나를 나로 있게 하고 작가를 작가로 있게 한 것, 결국 팔할의 바람이란 것은 그 사람과 음식과 시대와 엄마가 아니겠는가. 소싯적의 옴팡진 촌철살인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지만, 기억들을 보듬어 감싸 안는 작가의 품이 훨씬 더 푸근하고도 넉넉해졌다. 글을 읽으며 문득 나도 박완서님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인형을 업고 있는 외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밥숟가락 위에 참게장을 올려주며 입맛을 잡아주는, 곰살맞고도 유머러스하고, 맛깔스런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별난 사연도 많이 아는, 세상살이와 살림살이에 빠삭한, 귀엽고도 야무진 할머니. 늙수그레하더라도 누추하지는 않게끔, 그렇게 나이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
먼저 산 세월이 한참인 원로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내가 전부 다 공감했다고 말한다면 거짓이겠지만 요즘의 젊은 작가들의 글을 읽었을 때보다 오히려 마음 가는 데가 더 많았던 건 사실이다. 지나온 자의 여유와 거쳐온 자의 통찰이 행간마다 넘쳐났고 삶은 곧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은 곧 그의 글이다, 라는 말을 실감했다. 봄이면 논둑마다 푸릇푸릇하게 올라오는 쑥이며 냉이를 캐러 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언젠가는, 이라는 다짐을 새롭게 하기도 했다. 너무도 한적해서 때때로 심심했지만 지금처럼 때때로 고독하지는 않았던, 그 모든 게 사실은 자연과 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순수한 생명력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절감하고 있다. 이제는 농촌도 예전의 농촌이 아니긴 하지만 내가 발 딛고 움직이는 단 몇 평의 땅이라도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맨흙땅이었으면, 텃밭에서 상추를 뜯고 마늘쫑을 뽑아 밥상을 차리는 소박한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택배 상자 안에는 과꽃의 씨앗 한 봉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올해도 과아꽃이 피었습니다아...하던 노래의 그 과꽃. 이미지를 찾아보곤 아, 하는 반가움과 함께 지천으로 피어나던 들국화를 떠올렸다. 나는 과꽃을 부르면서도 과꽃이 과꽃인 줄 몰랐구나. 한 때는 우리 고향집 앞뜰에도 갖가지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났었다. 까만 씨앗을 깨뜨리면 하얀 분가루가 나오던 분꽃, 물관의 흐름을 살펴본다고 자연시간에 뿌리째 뽑아가야 했던 봉선화, 외사촌 동생이 잘 그리는 꽃 모양처럼 생긴, 예쁘기도 한 이름을 가진 채송화... 고향 땅을 떠나온 지금, 봄을 맞이하여 나는 이 꽃씨를 땅이 아니라 내 마음에 뿌려야겠다.